35세 좌파 대통령 탄생…“칠레가 깨어났다”읽음

이윤정 기자

학생운동 경력 보리치, 극우 후보 상대 10%P 이상 이겨 당선

불평등 반대 시민 호응…다시 일렁이는 중남미 ‘핑크 타이드’

칠레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19일(현지시간)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후 자신의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할 준비를 하고 있다. 30대 좌파 후보인 보리치는 칠레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다.  산티아고 | EPA연합뉴스

칠레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19일(현지시간)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후 자신의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할 준비를 하고 있다. 30대 좌파 후보인 보리치는 칠레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다. 산티아고 | EPA연합뉴스

칠레에서 최연소 밀레니얼 세대 좌파 대통령이 탄생했다. ‘보다 평등한 칠레’를 구호로 내건 가브리엘 보리치(35)가 19일(현지시간) 대선에서 극우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보리치 당선자는 2019년 불평등 반대 대규모 시위 이후 커진 사회 변화 목소리를 새 헌법과 정책에 적극 반영할 것으로 보인다. 페루, 온두라스에 이어 칠레에서도 우파 정권이 무너지고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에 밀려 후퇴했던 중남미 ‘핑크타이드(좌파 물결)’가 재현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 보리치 “신자유주의 무덤 될 것”

칠레 선거관리국은 이날 개표가 99.95% 진행된 가운데 좌파 연합 ‘존엄성을 지지하다’의 보리치 후보가 55.87%의 득표율로 승리를 확정지었다고 발표했다. 경쟁 후보인 공화당 소속 우파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55)의 득표율은 44.13%로 보리치 당선자에 10%포인트 이상 뒤졌다.

보리치 당선자는 승리 확정 후 수도 산티아고 선거본부에서 “칠레가 신자유주의의 요람이었다면 이젠 신자유주의의 무덤이 될 것”이라면서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이 불평등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여성 지지자들을 향해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유산을 청산하는 데 정부가 앞장서겠다”고 약속했다. 보리치 당선자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연금과 의료 시스템을 개혁해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주당 근로시간을 45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이는 한편 녹색 투자를 늘리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AFP통신은 이날 보리치 당선자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산티아고 시내로 쏟아져 나와 2019년 불평등 시위 구호였던 “칠레가 깨어났다”를 외쳤다고 전했다. 당선 축하를 위해 거리로 나온 교사인 보리스 소토는 AP통신에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라면서 “우리는 파시즘과 극우를 물리쳤다”고 말했다. 경쟁자였던 카스트 후보는 ‘칠레의 트럼프’라 불리는 극우 정치인으로 군부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두둔하기도 했다. 지난달 치러진 1차 투표에선 카스트 후보가 27.9%로, 보리치 후보(25.82%)에 앞섰지만 이날 결선에서 보리치 당선자가 대승을 거뒀다.

■ 최연소 좌파 지도자 탄생

뉴욕타임스는 보리치 당선자가 세계에서 가장 젊은 좌파 지도자라고 소개했다. 현재 가장 젊은 국가 지도자는 유럽 소국 산마리노 공화국의 자코모 시몬치니(27세)다. 35살인 보리치는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36세), 마하마트 데비 이트노 차드 과도군사평의회 의장(37세)보다 젊다.

칠레 최남단 푼타아레나스 출신인 보리치 당선자는 2004년 산티아고로 올라와 칠레대 로스쿨에 다니며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2013년 고향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4년 뒤 재선에 성공해 현재까지 하원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답게 몸에는 문신이 있고, 정장보다는 캐쥬얼한 옷을 즐겨 입는다.

보리치 당선자의 승리는 2년 전인 2019년 칠레를 뒤흔든 사회 불평등 항의 시위의 산물로 볼 수 있다. 당시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인상에 대한 분노는 교육·의료·연금 등 불평등을 낳는 사회 시스템 전반에 대한 불만으로 번졌다.

이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정권(1973∼1990년) 시절 제정된 현행 헌법 폐기와 새 헌법 제정 결정으로 이어졌다. 보리치 당선자가 정치 경험이 많지 않다는 점을 우려하는 시각도 많지만 오히려 기성 정치권에 연연하지 않고 불평등 구조를 개혁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높다. 보리치 정권에서 헌법 개정과 함께 공공정책 전면 개편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35세 좌파 대통령 탄생…“칠레가 깨어났다”

■ 중남미 핑크타이드 거세질까

칠레 대선 이후 중남미 지역의 정치 변화에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페루에선 지난 7월 ‘빈농’ 출신의 좌파 정치인 페드로 카스티요(51)가 우파 엘리트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지난달 치러진 온두라스 대선에서는 좌파 여성 정치인 시오마라 카스트로가 대선 승리를 확정하면서 12년만에 좌파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콜롬비아와 브라질도 각각 내년 5월과 10월 대선을 앞두고 있으며 좌파로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알자지라는 중남미 지역에서 ‘밀레니얼 좌파’가 힘을 얻고 있다면서 대표적인 예로 보리치 당선자를 꼽았다. 멕시코 정치사회 분석가인 발레리아 바스케스는 “현재 중남미에서 힘을 얻고 있는 좌파는 기존 사회주의 세력에 기반을 두면서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적극 활용하고 기후변화, 불평등 등 사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새로운 좌파”라고 소개했다. 미국 워싱턴 정책연구소의 존 카바나 선임 연구원은 “현재 중남미 좌파 물결은 전통적인 ‘핑크(사회주의)’와는 다르다”면서 “젊은 유권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이 합류해 환경 문제에 민감하고 분위기도 마초적이지 않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중남미 전역에서 좌파 정권이 더 힘을 얻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핑크타이드는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 점차 퇴조했고 2015년 이후 중남미 나라들엔 우파 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중남미 지역의 고질적인 불평등, 열악한 보건 문제가 불거지면서 다시 좌파에 힘이 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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