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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미국 사회가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둘러싸고 분열의 소용돌이로 빨려들고 있다. 연방 대법원이 1973년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기로 결정한 판결문 초안이 언론을 통해 유출되면서다. 임신중단 찬성·반대 단체와 시민은 물론이고 정치권까지 논쟁과 논란에 휩쓸렸다. 결정문 초안대로 대법원의 판결이 이뤄진다면 미국의 절반 가까운 주에서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가 제약받게 될 전망이다.

5월 4일(현지시간)워싱턴 DC에서 시민들이 임신중단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5월 4일(현지시간)워싱턴 DC에서 시민들이 임신중단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대법원의 판결문 초안이 공개된 다음날인 3일(현지시간) 워싱턴의 연방대법원 앞에는 임신중단 찬·반론자 수백명이 몰려들었다. 찬성론자들은 ‘내 몸에 대한 선택은 내가 한다’ 등의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으려는 대법원에 항의했다. ‘법원은 당신의 권리에 관심이 없다’는 구호도 등장했다. 반면 천주교 신자 등 임신중단 반대론자들은 “임신중단은 살인”이라며 대법원 결정을 지지했다. 경찰은 대법원 정문 앞 도로를 경찰차와 바리케이드로 막고 물리적 충돌에 대비했다.

미국사회에서 임신중단은 기존에도 가장 민감한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자유와 생명존중, 진보와 보수, 종교적 신념 등이 맞물리며 찬반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왔다. 이런 상황에서 로 대 웨이든 판례를 뒤집기로 한 대법원 판결문 초안 유출은 논란에 불을 댕겼다.

정치권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여성의 선택권은 근본적이라고 믿는다”면서 “로 대 웨이드 판례는 거의 50년 동안 국법이었고, 우리 법의 필수적인 공평성과 안정성을 위해 뒤집혀선 안된다”고 밝혔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도 “로 대 웨이드 판례 반대자들은 여성을 처벌하고 여성의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빼앗길 원한다”면서 여성의 권리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정부 수반이 초안 상태의 대법원 결정문을 정면 비판하는 이례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5일(현지시간)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에서 임신 중단권을 보장하기 위한 입법을 추진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5일(현지시간)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에서 임신 중단권을 보장하기 위한 입법을 추진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임신중단권을 보장하기 위한 입법을 즉각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연방 법률로 성문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입법 시도는 상징적 제스처에 그칠 공산이 크다. 상원 의석의 절반인 50석을 차지한 공화당의 반대를 돌파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대체로 대법원의 입장을 환영하면서도 결정문 초안 유출 사태에 초점을 맞췄다. 유출 사태가 대법관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한 것이다. 공화당 하원 지도부는 공동성명에서 “(이번 사건은) 대법관들을 위협하고 방해하기 위한 조직적인 행동이 명백하다”면서 “우리는 생명의 존엄성을 옹호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유출된 초안이 진본이라면서도 대법원이나 대법관 개인의 최종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로버츠 대법관은 “이번 일은 법원과 법원에서 일하는 공직자 공동체에 대한 모욕이자 신뢰에 대한 얼토당토 않은 침해”라고 비난했다. 대법원이 판결의 신뢰를 높이고 대법관들 사이의 원활할 의견 교환을 위해 최종 판결 전까지 철저한 보안을 지키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미국 언론들은 대법원 판결문 초안이 유출된 것은 미국 현대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지적했다.

공화당과 보수 진영은 진보 성향 인사가 유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로버트 대법원장이나 브렛 케버노 대법관 등 보수 성향이지만 임신중단 이슈에 대해 입장이 단정적이지 않은 대법관들을 압박하기 위해 보수 성향 인사가 유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했다.

유출된 결정문 초안은 임신중단 허용 시기를 임신 15주 이내로 제한한 미시시피주 법에 관한 것이다. 미시시피주 임신중단 제한 법에 대한 최종 판결은 오는 6월 또는 7월 나올 전망이다.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는다면 파장은 미국 전역으로 퍼질 것으로 예상된다.

임신중지권을 허용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내용의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 초안문이 유출되자 2일(현지시간) 워싱턴에 있는 연방대법원 앞에 임신중지권에 찬성하는 시민 수백여명이 몰려와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 | AP연합뉴스

임신중지권을 허용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내용의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 초안문이 유출되자 2일(현지시간) 워싱턴에 있는 연방대법원 앞에 임신중지권에 찬성하는 시민 수백여명이 몰려와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 | AP연합뉴스

📌[플랫]‘임신중단’ 전면 금지한 폴란드, 여성들은 ‘옷걸이’를 들었다

임신중단권 옹호 단체인 구트마허연구소는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무효화 되면 미국 50개 주 가운데 26개 주가 임신중단을 사실상 금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공화당이 우세인 지역을 중심으로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나오기 전에 존재했던 임신중단 금지법을 부활시키거나 새로운 금지법 제정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경우 13~44세 미국 여성 가운데 4000만명이 임신중단이 제한되는 주에 거주하게 된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의 임신중단 건수는 1980년대 이후 계속 감소해 2017년 86만2320건으로 집계됐다.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뒤집히면 최소 수십만명의 여성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되는 것이다. 민주당 소속 캐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주 헌법에 명시하기 위한 개헌 작업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가 11월 중간선거에 미칠 영향도 관심사다. 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해 고전하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은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임신중단권을 옹호하는 진보 및 여성 유권자들을 결집시키고, 중간선거를 바이든 정권에 대한 평가가 아닌 공화당 심판 선거로 전환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공화당에서도 임신중단에 반대하는 유권자들이 다른 이슈에 비해 결집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불리할 게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든, 유지하든 미국 사회는 당분간 임신중단 문제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극한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로 대 웨이드 판결

미국에서는 1970년대 초까지 대부분의 주에서 임신부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를 제외한 임신중단은 불법이었다.

1969년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강간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됐다며 임신중단 수술을 하려다 거부당한 노마 매코비는 텍사스주를 상대로 위헌소송을 제기한다. 그는 신변 보호를 위해 ‘제인 로’라는 가명을 사용했는데, 청구인인 그의 가명과 피고인이었던 지방검사 헨리 웨이드의 이름을 따 소송 명칭이 ‘로 대 웨이드’라고 불리게 됐다.

1973년 연방대법원은 태아가 산모의 자궁 밖에서 스스로 생존이 가능한 시기에 이르기 전, 여성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임신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임신 약 28주차가 기준이 됐다. 현재 미국에서는 이 판결에 따라 임신 6개월 이전까지의 임신중단은 사실상 합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워싱턴|김재중 특파원 hermes@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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