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전 잃은 라하이나 주민들, 재건 이후도 걱정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주거비 치솟았는데
정부 지원금·보험금 지급까진 수년 걸릴 듯
‘살아 남았다’는 안도감은 다시 불안으로 변했다. 미국에서 100여년 만에 최악의 산불이 할퀴고 간 하와이주 마우이섬 주민 리치 팔라레이(25)는 살던 집과 일터를 모두 불길에 잃었다. 순식간에 마을을 잿더미로 만든 화마에서 살아남았다는 기쁨도 잠시, 그는 이제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두렵다고 말했다. “잿더미가 된 땅에, 토지 개발업자들이 들어와 재건을 곧 ‘기회’로 여기게 될까봐 걱정이에요.”
엿새째 이어진 산불로 폐허가 된 마우이섬 재건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서부 라하이나 주민들은 ‘재건 이후’를 걱정하고 있다고 AP통신이 13일(현지시간) 전했다.
외지인의 유입으로 하와이 주택시장이 들썩이는 상황에서 원주민들이 오랫 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지상 낙원’ 마우이섬이 재건 후 열대 휴양지를 찾는 ‘부자들만의 낙원’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팔라레이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고 살 여력도 되지 않는 호텔과 리조트가 들어서는 것이 주민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라고 AP통신에 말했다.
마우이섬은 이번 참사 이전부터 만성적인 주택 부족과 부유한 외지인의 이른바 ‘세컨드 하우스’ 구매가 겹치며 치솟은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한 주민들이 섬을 떠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어 왔다.
여기에 라하이나가 위치한 웨스트 마우이 지역의 건물 2700채 중 80% 이상이 이번 산불로 불탔다. 이 가운데 86%가 주택이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해안가 인근의 소규모 목조 주택들은 이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전소됐다.
당국은 주민 4500명이 산불로 대피했다고 밝혔지만, 현지 언론은 이재민 수가 1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라하이나 인구는 2020년 통계 기준 1만2702명으로, 이 추산대로라면 라하이나 주민 대다수가 이재민이 된 것이다. 방 한 칸을 빌리기 위해 1000달러(약 133만원)의 월세를 내왔던 팔라레이의 셰어하우스도 이번 화재로 불타 그는 대피소에서 머물고 있다.
마우이 주택의 평균 가격은 120만달러(약 16억원)까지 올라 일반적인 임금 노동자가 주택을 구입하기 쉽지 않다. 주거 관련 비영리단체인 ‘하우징 하와이 퓨처’의 스털링 히가는 “미국 본토에서 온 부유층의 마우이섬 내 부동산 구매가 늘어나면서 대대로 살아온 원주민 가족을 대체하고 있다”며 “이는 마우이섬 서부지역 전반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 20년 전에는 평범했던 주택이 이제 100만달러에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라하이나 주민들은 정부의 재건 지원금이나 보험금이 지급되기까지 수년이 걸릴 수 있어 그 사이 대체 부동산이나 임대료를 마련하기 힘들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1992년 허리케인 이니키가 하와이 카우아이섬을 강타했을 때도 주민들은 보험금 지급을 두고 수년간 싸웠으며, 라하이나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조시 그린 하와이 주지사는 라하이나 지역을 방문해 주정부가 이재민을 위한 주택 건설 등에 사용할 토지를 매입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재건 이후 라하이나 주거 비용이 주민들에게 너무 비싸지 않도록 하겠다”면서 “라하이나가 낙원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또 다른 사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