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현지시간) 멕시코 대선에서 집권 국가재생운동(모레나)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후보(62)가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되며 1824년 정부가 수립된 지 200년 만에 첫 여성 대통령이 됐다. 환경공학자 출신인 셰인바움 당선인은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현 대통령의 정책 방향을 계승하고 친환경적인 개발 등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마약 카르텔과 갱단 폭력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짐도 짊어지고 있다.
멕시코 선거관리위원회(INE)는 표본을 토대로 득표율을 추산하는 신속 표본 집계 결과, 셰인바움 후보가 득표율 58.3%∼60.7%를 기록해, 26.6~28.6%를 얻은 우파 야당 연합 ‘멕시코를 위한 힘과 마음’ 소치틀 갈베스 후보(61)를 누르고 승리했다고 밝혔다. 중도좌파 시민운동당(MC) 소속이자 유일한 남성 후보인 호르헤 마이네스 후보(39)의 예상 득표율은 9.9~10.8%에 그쳤다.
승리가 확정되자 셰인바움 당선인은 멕시코시티의 한 호텔에서 취재진에게 “나는 혼자서 해낼 수 없었다. 조국을 준 영웅들과 어머니, 딸들, 손녀들과 함께해냈다”며 “우리는 멕시코가 평화로운 선거제도를 가진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나머지 두 후보들도 셰인바움 당선인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
셰인바움 당선인은 오는 10월1일부터 임기를 시작한다. 멕시코 대통령은 6년 단임제다.
남성주의적 ‘마초’ 문화가 있는 멕시코는 1953년에야 여성의 투표권을 보장했지만 민주주의 종주국 미국보다 일찍 첫 여성 대통령을 배출하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셰인바움은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인 멕시코의 첫 여성 대통령이자 유대계 대통령이라는 두 개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보도했고 AP통신은 “셰인바움의 이름은 멕시코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대선에선 이례적으로 보수와 진보 두 진영에서 모두 여성 후보들이 경선을 뚫고 대통령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9900만여 명의 유권자 중 약 60%가 이날 투표장으로 향했다.
셰인바움 당선인은 환경공학 연구원으로 시작해 환경부 장관, 수도 멕시코시티 시장 등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화학공학자, 어머니는 세포생물학자로, 이들 부부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동유럽에서 멕시코로 건너온 이민자다. 셰인바움 당선인의 유년 시절, 그의 부모님은 독재 정권 제도혁명당(PRI)에 맞서 싸우는 활동가들에게 자택을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당선인도 멕시코국립자치대(UNAM)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던 1980년대에 공교육 민영화에 반대하며 학생 운동을 했다.
멕시코 언론들은 셰인바움 당선인이 ‘친 오브라도르’ 이미지를 유지하며 높은 지지율을 끌어낸 것으로 분석했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임기 말까지도 60%의 안정적인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다. 당선인은 국민에게서 호평을 받은 적극적 사회복지,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 오브라도르 정부의 정책을 이어나가겠다고 공약했다.
셰인바움 당선인이 공직을 맡은 계기도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제안 때문이다. 오브라도르는 2000년 멕시코시티 시장으로 당선됐을 당시 UNAM의 환경공학 연구원이었던 셰인바움 당선인에게 멕시코시티 환경부 장관직을 제안했다. 당선인은 또 2011년 오브라도르 주도로 만든 모레나 정당의 개국 공신이며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임명으로 2015년 중앙정부에서 환경부 장관을 지냈다.
일각에서는 셰인바움 당선인이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에 셰인바움 당선인은 “2층을 세울 것”이라며 기존 정부의 정책을 기반으로 새로운 멕시코 사회를 만들어가겠다는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셰인바움 당선인의 전기 작가인 호르헤 세페다는 당선인이 과학적 데이터를 토대로 정책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현 대통령과 다르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코로나19 대유행 당시 오브라도르 정부가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반감을 품은 국민을 의식해 방역에 소극적인 정책을 펼칠 때 멕시코시티 시장이었던 셰인바움 당선인은 비말 감염에 관한 연구 결과를 근거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셰인바움 당선인은 멕시코시티 시장 시절 환경공학 지식을 이용해 다양한 도시사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도로 확장을 통해 교통혼잡을 줄이고, 도시 배기가스 배출량을 줄였다. 도심에 거대 태양광 공원 건설을 추진하고, 대중교통 이용을 늘리기 위한 메트로 버스 노선을 개설한 것 등도 그가 친환경 도시를 만들기 위해 추진한 프로젝트다.
셰인바움 당선인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린 영상에서 “정치가 학문적, 과학적 사고방식과 함께 만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자랐다”고 말했다.
그는 취임 이후 ‘친환경 에너지 전환’ 정책에 힘을 쏟겠다고 공약했다. 다만 경기 침체 등을 타개하기 위해 꺼내든 기반 시설 프로젝트 강화 등 정책이 이 같은 기조와 충돌할 수 있다고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지적했다.
지지자들은 연간 페미사이드(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것) 사건이 1000건 넘게 일어날 정도로 젠더폭력이 만연한 멕시코 사회에서 셰인바움 당선인이 문제를 해결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그는 폭력 피해 여성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멕시코 사회의 주요 의제로 떠오른 마약 카르텔과 갱단 문제에 대해선 소극적으로 나서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총선,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이번 멕시코 대선 과정에서도 갱단의 폭력 사태가 일었다. 2일 중부 에블라주 코요메판 투표소에 신원 미상의 괴한이 총격을 가했으며, 선거운동 과정에서 현직 시장과 지방선거 후보 등 50여 명이 살해됐다.
경쟁자 갈베스 후보가 수사·재판 기관 인력을 2배로 늘리는 등 ‘강경책’을 공약으로 꺼내든 것과 다르게 셰인바움 당선인은 청소년이 갱단에 들어가지 않게 이들에게 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방식으로 마약 카르텔을 줄이겠다고 했다.
당선인은 취임 이후 이민자와 무역 문제를 두고 차기 미국 지도자와 머리를 맞대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특히 멕시코 관리들은 오는 11월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재선될 경우 이민자와 마약 밀매를 둘러싼 양국 안보 협력이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멕시코에서 생산되는 중국 회사의 자동차에 대해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