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까지 ‘평화 국가’로 알려져 있었던 노르웨이는 이번의 오슬로 참극이 계기가 되어서 그 이면을 드러내고 말았다. 우리에게 노르웨이는 무엇보다도 ‘사민주의 복지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이번의 비극이 보여주었듯이 모든 노르웨이인이 사민주의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2011년 7월 중순에는 사민주의를 대변하는 노르웨이 노동당의 지지율이 29% 정도였지만, 테러범이 한때 몸 담았던 극우정당 ‘진보당’의 지지율도 무려 20%에 이르렀다.
진보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진보당’의 주된 목표들은 무엇인가? 지금 노르웨이 국내 상장 기업 총(總)주가의 약 30%를 차지하는 거의 모든 국영기업의 민영화, 민영병원 위주의 의료체제 구축, 1년 내 ‘비(非)서구 이민자’의 수를 1000명으로 제한하고 그 중에서 피난민의 수를 100명으로 제한시키는 초강경 이민규제다. 공공부문이 발달하고 ‘다문화주의’를 공식 이데올로기로 내거는 오늘날 노르웨이로서는 이와 같은 강령이 ‘미친 정책’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미친 정책’을 유권자들의 5분의 1이나 지지한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가지 오해부터 풀어야겠다. 복지국가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위한 경제질서’ 같은 것이 법제화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지국가란 다수를 위해 일부 세액을 재분배하는 메커니즘을 일컫는 것일 뿐이다. 복지국가들 중에서도 노르웨이는 유독 강력한 공공부문을 보유하긴 하지만, 일단 다수의 생산수단은 대기업들이 소유한다.
에너지기술 등을 생산하는 기업 ‘아케르 솔루션스’ 주식의 다수를 소유하고 있는 켈 인게 러케나 노르웨이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알려진 ‘부동산 왕’ 울라브 툰 등 소수의 대자본가들은 복지국가의 테두리 안에서도 생산부문을 좌우하고 있다.
세계 대다수의 부자들이 그렇듯이 그들도 신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세율의 인하와 대대적 민영화 조치 등을 갈망한다. 그들의 이상적 모델은 이번 참사의 테러범도 찬양해 마지 않은 저(低)세율과 노동자 해고의 자유, 부동산투기 자유의 왕국, 즉 대한민국이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꼭 이민자들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평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한민국이나 일본을 벤치마킹해서 ‘문화적으로 다른’ 다수의 근로이민자들의 정착을 막는 이민규제정책을 실시하겠다고 큰소리를 칠 수도 있다.
그런데 상당수의 기층민중은 배타적 감정의 유포를 통해서 정치적 자본을 축적하려는 부자들에 의한, 부자들을 위한 정당인 ‘진보당’을 왜 지지하고 있는가?
하기 싫은 말이지만, 상당수의 민중을 ‘진보당’의 지지자로 만든 것은 바로 노르웨이의 온건좌파, 특히 오랫동안 권력을 견지해온 노동당의 실책, 즉 신자유주의의 부분적 수용이었다. 한국과는 비교되지 않는 규모이지만 노르웨이에서도 지난 20여년 동안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이 많은 민중에게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노동당이 방관해온 저임금 국가로의 제조업 이전으로 특히 전통적인 제조업의 중심지에서 실업이 발생하고, 우체국의 독립법인화도 체신 서비스의 질을 낮추고 수천명의 실업자를 만들었다. 국가와 지역자치단체들이 청소를 비롯한 비본질적 업무를 외주화하는 과정에서 특히 저임금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악화됐다. 국영병원의 예산 부족이 야기한 여러 문제들은 상당수 일반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와 같은 반(反)민중적 정책을 실행해온 것이 다문화주의를 지지하는 온건좌파 세력인 노동당이었기에, 수많은 과거의 노동당 지지자들은 만악의 근원이 ‘무절제한 이민자 유입’이라는 거짓말로 민심을 잡아보려는 극우파 포퓰리스트들에게 가버리고 말았다. 온건좌파가 좌파성을 잃었기에 극우파가 양산된 것이다.
전투적이고 철저하게 반(反)신자유주의적 ‘좌파 야성의 부활’만이 극우파의 창궐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좌파가 극우들과의 투쟁에서 이기려면 일단 자기 원칙에 충실한 반신자유주의적 실천부터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