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만 걸은 ‘프랑스판 강남좌파’…출마 위해 중도로 변신

김진호 선임기자

프랑스 대선 유력 후보 마크롱, 그는 누구인가

5월7일(현지시간) 결선투표를 벌이는 프랑스 대선은 중도 ‘앙마르슈(전진)!’의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39)와 극우 민족전선(FN)의 마린 르펜 후보(48) 간의 대결로 좁혀졌다. 이 중 마크롱은 엘리제궁의 대통령비서실 부실장 2년과 경제장관 2년의 일천한 경력 끝에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그는 누구이며, 어떤 비전을 갖고 있을까.

■ ‘금수저’에 꽃길 걸은 귀공자

에마뉘엘 장-미셸 프레데릭 마크롱은 프랑스 북부 아미앵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의사였다. 그는 중학교 교장 출신 할머니의 영향으로 정치에 투신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파리의 명문 앙리4세 고교를 졸업한 마크롱은 파리 10대학에서 철학 전공으로 박사과정(DEA)을 마쳤다. 이후 엘리트의 산실인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을 거쳐 2004년 국립행정학교(ENA·에나)를 졸업했다. ‘전진!’의 대선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자기소개의 첫 줄이 “나는 에나를 졸업했다”는 것이다. 선민의식이 엿보인다.

■ 금융 인수·합병(M&A)의 귀재

에나를 졸업한 2004년(27세), 마크롱의 첫 일터는 프랑스 재정감독청(IGF)이었다. 자크 아탈리의 ‘프랑스 성장의 자유화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2008년 로스차일드 계열 은행으로 자리를 옮겨 금융가로 변신했다. 에나 졸업생은 10년 동안 국가기관에서 일을 해야 한다. 이를 어겼기에 5만4000유로(약 6600만원)를 국가에 납부해야 했다. 마크롱은 네슬레의 화이자 유아 우유부문 재인수(90억유로 규모) 및 일간지 르몽드 매각 등에 관여했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 손꼽히는 M&A 전문가로 성장했다. 2009~2013년 그가 신고한 소득은 280만유로(34억6000만원)에 달했다.

2012년 대선 직후 엘리제궁 대통령비서실 부실장으로 취임했다. 사회당 당적을 10년간 갖고 있었지만, 그가 당비를 납부한 것은 2006~2009년 3년뿐이다. 마크롱은 잠시 공직을 떠났다가 2014년 8월 36세에 경제·산업·디지털장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1962년 43세에 최연소 경제장관이 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의 기록을 깼다.

그는 경제장관 시절 ‘마크롱법’으로 알려진, ‘성장과 (경제) 활동 및 경제적 기회의 평등을 위한 법’을 제정했다. 친기업적인 개혁을 골자로 하지만 프랑스 경제의 성장에 별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이 법의 효과가 향후 5년간 국내총생산(GDP)의 0.3% 정도라고 평가했다.

마크롱은 사회당 우파의 전형적인 ‘캐비어 좌파’였다. 고급 수제양복을 입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비싼 와인을 마시면서 좌파의 가치를 역설하는 프랑스판 ‘강남좌파’다. 그나마 대선 출마를 위해 사회당 정부를 떠나면서 좌파의 모자를 벗어던지고 중도로 탈바꿈했다.

■ ‘올랑드2’인가, ‘슈뢰더2’인가

마크롱은 2011년 사회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캠프에 가담하면서 올랑드와 인연을 맺었다. 올랑드가 당선되자 2012년부터 2년간 엘리제궁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부실장으로 일했다. 올랑드가 ‘정치적 대부’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번 대선에서는 인기 없는 올랑드와 거리를 뒀다. 소득 불균형과 부의 재분배 문제를 다룬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가 마크롱에게 “가면을 벗으라”고 비난했다. 피케티는 “올랑드 정부 경제 실패의 책임자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고 질타했다. 마크롱은 2016년 4월 정치운동단체 ‘전진!’을 결성한다. 좌도 우도 아닌, 또는 좌이기도 우이기도 한, 초당적 정치를 표방했다. 현재 회원은 20만명이다.

마크롱의 등장을 두고 신자유주의 개혁에 실패한 사회당 우파가 ‘얼굴마담’을 바꿨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포린폴리시는 사회당이 마크롱을 내세워 사실상 당을 해체하는 ‘정치적 자살’을 통해 활로를 모색한 것이라고 짚었다. 실제로 사회당 중진들은 1차 투표 전부터 사회당 대선후보(브누아 아몽)가 아닌 마크롱을 지지했다. 올랑드는 1차 투표 뒤 마크롱 지지를 표명했다. 마크롱의 공약도 상당 부분 올랑드 정부의 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노동시간은 현행 주 35시간제를 고수하되 탄력적으로 운영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부유세(ISF)를 상속 부동산에만 국한하고 기업 투자를 장려하며, 법인세 인하 및 사회보장세(CSG) 인상, 부가세(TVA) 현행 유지 등을 약속하고 있다. 독일 사민당(SPD)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2003년 추진한 ‘아겐다2010’처럼 복지를 줄이고, 기업을 도와주는 개혁안들을 담고 있다.

■ 마크롱과 오바마

마크롱은 2008년 미국 대선에서 ‘희망’의 상징이었던 버락 오바마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오바마는 케냐 유학생과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흙수저’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외할아버지는 영업사원이었다. 가장 큰 차이는 마크롱은 공적 가치를 위해 헌신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오바마는 컬럼비아대로 편입, 졸업한 뒤 시카고 지역공동체의 조직활동가로 일했다.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빈민운동이었다. 세입자 권리옹호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오바마는 또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을 거쳐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지만, 마크롱은 선출직 경험이 없다. 국민의회(하원) 의원에 출마하려다 사회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

오바마는 희망뿐 아니라 변화를 말했다. 하지만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변화’의 아이콘은 마크롱이 아닌 것 같다. 지난달 24일 여론조사기관 엘라브의 조사 결과 응답자의 47%가 마크롱이 아닌, 르펜을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후보로 꼽았다. 초선 연방 상원의원이던 오바마는 워싱턴의 아웃사이더였지만, 마크롱은 파리의 인사이더로 살아왔다.

■ ‘잘난 대통령’과 ‘불편한 대통령’의 사이

마크롱은 올랑드 대선캠프의 젊은 금융가로 시작해 대통령비서실 근무 2년, 경제장관 2년의 짧은 경력으로 대권을 거머쥘 수 있는 위치에 와 있다. 운이 따른 덕분이다. 당초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던 중도우파 공화당의 프랑수아 피용 후보가 지난 2월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대안으로 떠올랐다. 1차 투표 전 각종 여론조사에서 마지못해 그를 뽑는다는 소극적 지지자가 45~52%에 달했다. 포퓰리즘의 르펜에 대한 경계심도 마크롱에게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마크롱의 이력 가운데 유일하게 눈길을 끄는 대목은 15세 때 처음 만난 고등학교 국어교사 브리지트(65)와의 결혼이다. 브리지트의 딸 로랑스(39)가 마크롱과 같은 반에 있었다.

잘난 이미지와 소탈한 서민 이미지가 대선에서 맞붙으면 많은 경우 후자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는다. 미국인들이 2000년 대선에서 앨 고어 민주당 후보 대신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를 선택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굳이 비교하자면 오히려 르펜이 서민대통령에 가깝다. 문제는 르펜의 극우 색채가 많은 유권자들에게 불편하다는 점이다.

지난달 26일 마크롱과 르펜은 모두 북부 아미앵의 월풀공장을 찾아갔다. 내년 폴란드로 공장이 옮겨가면서 노동자 290명이 실업자가 될 처지다. 마크롱은 아미앵 상공회의소에서 노조지도자들을 먼저 만났지만, 르펜은 공장부터 찾아가 노동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뒤늦게 공장으로 달려온 마크롱은 주차장에서 노동자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르몽드는 이날의 두 장면이 이번 대선의 가장 중요한 장면의 하나라고 논평했다. 지향점은 슈뢰더에, 현실은 올랑드에, 이미지는 오바마에 맞추려는 마크롱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마크롱은 지난달 23일 1차 투표 승리 뒤 대선캠프 연설에서 “우리는 1년 만에 프랑스 정치의 얼굴을 바꿨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머리와 몸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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