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키예프) 방면에서 물러나고 있으나 전쟁으로 인한 우크라이나인들의 고통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은 르비우에서 피란 생활을 하고 있는 올렉산드르 구젠코(28)가 전쟁의 현실을 알리고 싶다며 보내온 글을 싣습니다.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구젠코는 전쟁 전에는 키이우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으며 현재는 르비우에서 외신 기자들의 취재를 돕고 있습니다.
피란길에 오른 첫 12시간 동안 20㎞도 채 이동하지 못했다. 기반시설인 기차역은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해가 지면 조명을 껐다.
집 떠난 지 40시간이 지나고서야 오래된 영화관 지하에서 처음으로 잠을 잘 수 있었다.
모든 중·장기 계획은 사라지고 내일만 남은 ‘뉴노멀’…기도하듯 뉴스를 확인하며 매일을 견뎌낼 뿐이다.
전쟁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죽음과 파괴에 관한 이야기, 또 다른 하나는 끝 모를 복잡한 상황에서도 계속 진화하고 적응해나가는 이야기이다. 한 달 전 전쟁이 찾아와 나와 내 가족, 친구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이후 우리의 삶은 혼돈과 혼란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우리는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삶의 이야기이다.
2월24일 목요일 오전 6시38분. 나를 깨운 건 성가신 알람이 아니라 날카로운 공습 사이렌이었다. 그렇게 이상하고 불안한 소리를 들은 것이 처음이라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찢어지던 소리는 우크라이나 사람 누구에게나 막 펼쳐지기 시작한 불행의 서곡이었다. 우크라이나 북부와 남부, 동부의 국경에서 전투가 발발했다. 나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나쁜 상황이지만 더 나빠지기 전에 뭘 해야 할까. ‘일단 도망가야 한다’고 빠르게 결론냈지만 또 다른 물음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디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전날까지 나는 컨설팅 업계에서 일하던 직장인이었다. 프로젝트를 계획대로 진행하고 있었고, 미국 대학원 입시도 준비하고 있었다. 삶에 수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은 내 자신감부터 집어삼켰다. 나와 어머니는 두 검은 고양이와 함께 익숙한 것들을 뒤로한 채 문을 닫고 암흑 속으로 떠났다. 다음 문이 열릴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든 부분 중 하나였다.
첫 공습부터 40시간 만에 잠들기까지
피란길에 오른 첫 12시간 동안 우리가 이동한 거리는 20㎞도 안 됐다. 키이우 외곽의 작은 기차역에 앉아 3시간, 5시간, 7시간 연착되는 기차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기차역은 해가 지면 조명을 전부 껐다. 국가의 중요한 기반시설이라 시선을 끌면 안 되기 때문이다. 어둡고 추운 건물에서 미친 듯이 뉴스를 검색했다. 기사들은 온통 우울했다. 최악의 악몽 같은 시나리오가 어떻게 현실이 된 건지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오전 2시쯤 마침내 기차가 도착했다. 사람들로 가득 찬 옛 소련제 기관차였다. 탑승권은 필요 없었다. 승무원들은 모든 사람을 들여보냈다. 사람들은 빈 공간이 생길 때마다 앉고 서기를 반복했다. 4시간이면 갈 수 있었던 거리를 가느라 14시간 동안 앉아 있어야 했다. 열차는 뜬금없는 곳에서도 섰다. 열차에 미사일이 떨어지거나 선로가 파괴되어 더 이상 갈 수 없게 될 위험은 항상 있었다. 그런 일은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곧바로 난민 중심지가 된 서부 우크라이나의 도시 르비우에 도착했다. 르비우 기차역은 절망의 구덩이였다. 이동하는 내내 굶은 아이들이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계엄령에 따라 우크라이나를 떠날 수 없는 성인 남성들과 곧 헤어질 가족들 간의 대화, 일단 안전히 도착한 사람들과 집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 사이의 큰 통화 소리가 들렸다. 그곳을 채운 슬픔과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르비우 주민들이 피란민들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우리의 행운이었다. 그들은 꽃이 피던 곳에 크고 파란 텐트를 세웠다. 텐트에는 음식, 담요, 기본적인 의약품이 준비돼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황망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도와줄 전문가도 있었다. 자원봉사자에게 나와 어머니, 그리고 두 고양이가 머물 곳이 있는지 물었다. 호텔, 에어비앤비, 호스텔 등은 모두 예약이 차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을 참으며 끈기 있게 기다렸다. 한 자원봉사자가 역에서 몇 ㎞ 떨어진 오래된 영화관의 지하 공간을 소개해줬다. 영화 포스터, 상영관의 부드럽고 편안한 의자…. 삶이 더 쉽고 단순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자원봉사자들은 우리에게 매트리스와 담요를 준비해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집을 떠난 지 약 40시간 만에 처음으로 잠을 잤다.
동이 트자, 인류애와 공감, 배려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기 시작했다. 수천명의 다른 가족들도 그날 밤 똑같은 경험을 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은 누군가의 어깨에 기댈 수 있었다.
피란민의 새 일상
정확한 목적지도 모른 채 시작된 여행이 서서히 꼴을 갖추고 있었다. 어머니를 혼자서라도 국경 바깥으로 보내드려야만 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두고 수없는 논쟁을 벌였다. 법에 따르면 여성과 아이들의 출국은 허용된 반면 18~60세 남성들은 남아 있어야 했다. 아들과 떨어지길 원하는 어머니는 없다. 전쟁으로 피 흘리는 나라에 자식을 두고 떠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성이 감정을 이겨야만 했다.
12시간 후 나와 어머니, 그리고 토트백 안의 두 고양이는 슬로바키아 국경 근처에 줄을 서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밤은 항상 춥지만 그날은 특히 더 추웠다. 지역의 자원봉사자들이 국경을 넘어가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눠줬다. 수프와 차, 커피, 쿠키가 준비돼 있었다. 줄 서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죽은 듯 침묵했고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이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 빠르고 어려운 작별이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각자 새로운 일상, ‘뉴 노멀’을 살아가야 했다. 모든 중·장기 계획은 사라졌고, 내일의 계획만 남았다. 그 계획이란 내일 잘 곳을 찾는 것처럼, 아주 기초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나는 언제나 이동 중이었다. 지난 3주간 기차, 버스, 기차역에서 밤을 새웠다. 난민 대피소, 방공호, 자원봉사자와 아주 먼 친척들의 집을 전전했다. 시내 숙박시설은 항상 예약돼 있어 취소가 발생해야만 이용할 수 있었다. 집이 그리웠다.
운 좋은 날엔 오전 8시까지 잘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날 한밤중에는 공습 사이렌이 울려 모두를 깨웠다. 일주일 전(3월23일쯤) 오전 2시에도 사이렌이 울렸다. 나는 유스호스텔에 머물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나자 모두 침대를 비우고 건너편 방공호로 내려갔다. 방공호는 먼지가 많고, 추운 데다 빛도 거의 들지 않았다. 정어리 병조림처럼 작은 방이 가득 찰 때까지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잠을 청하려 애썼지만 불가능했다. 다들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꼈다. 몇 시간 후 또 사이렌이 울렸다. 위협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방공호에서의 일시적 해방이었다. 아침이 온 뒤였다.
모두가 빠짐없이 하는 일 중 하나는 스마트폰이든, TV든, 라디오든 뉴스를 확인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뉴스는 전선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보도하는데, 외신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왜 외신들이 지상 상황에 대해 그렇게 회의적이고 암울하게 보도하는지 종종 궁금해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는 사람들이 ‘적들이 큰 손실을 입고 격퇴된다’는 좋은 소식을 듣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러시아군의 손실은 우리에게 매일 알려지고 있지만 우크라이나군의 사상자와 부상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아마도 이 정보를 보류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부당한 전쟁에서 단 한 명의 영혼을 잃었다고 해도, 너무 큰 희생이다. 이 전쟁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전투는 전쟁터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정보 공간도 치열한 전장이다. 정부 기관이나 자원봉사 단체가 떠도는 이야기 가운데 가짜뉴스를 빠르게 솎아낸다. 딱지를 붙이고, 필요에 따라 아예 지우기도 한다. 적들은 승리하기 어려운 전쟁이라는 인식을 퍼뜨려 우크라이나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우리에겐 우크라이나가 겪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단단히 견뎌 다시 승리할 것이라는 한 믿음이 있다. 뉴스를 읽느라 스크롤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건 하루에 적어도 한 번, 기도처럼 실천하는 유일한 일상적 활동일 것이다.
죽음, 인류애, 비열함…전쟁의 얼굴들
나는 르비우에서 외신 기자들의 취재를 돕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보다 정보에 가깝게 있을 수 있었다. 일주일 전 르비우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마을의 난민 지원 시설을 찾았다. 이곳은 지역 공공기관과 NGO,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마리우폴, 하르키우, 이르핀과 같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역에서 온 난민 수천명을 수용했다. 피란처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등록하기만 하면 마을의 대학 기숙사 방을 얻거나 일정 기간 홈스테이를 할 수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피란민들을 위한 침대와 작은 가구를 만들었고, 생필품 한 보퉁이만 지고 온 사람들이 침대, 새 옷, 개인 위생용품, 따뜻한 음식을 얻었다.
현재까지는 여성과 어린이들만 그런 곳에서 머물 수 있다. 남성들의 경우 다음 목적지가 집이건 혹은 최전선의 참호건 떠나기 전날 단 하루밖에 머물지 못한다. 시설에 머물고 있는 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글썽이는 눈으로 “머리 위로 전투기가 날아다니지 않고 바로 옆에서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곳을 발견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아이들이 전쟁 트라우마와 불안을 극복하도록 돕는 심리학자들도 함께했다.
르비우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편이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지난 3월13일 르비우 외곽 야보리우 근처의 군사시설에 미사일 공격이 발생했다. 나는 기자들과 즉시 현장으로 떠났다. 현장은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봉쇄돼 있었다. 공격의 규모를 가늠할 수 없었다. 빠르게 가까운 병원으로 갔다. 가는 길에 구급차가 줄줄이 서 있고 사이렌이 울렸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붕대와 핏자국뿐이었다. 야보리우의 병원은 모두를 수용하기엔 너무 작았고, 전문적인 치료를 충분히 수행하기에도 부족했다. 부상자들을 응급처치한 뒤 전문시설로 옮긴 의사들은 내면의 평화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난장판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면서도 긴장감 있는 풍경이었다. 아무도 야보리우처럼 외진 지역이 목표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뼈아픈 깨달음이 찾아왔다. 어디에서도,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이용하는 이들도 있다. 전쟁 첫 주, 내가 국경 너머로 어머니를 보내려 할 때였다. 국경으로 가는 표를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는 국경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개인 버스를 인터넷에서 발견했다. 버스가 처음에 한 시간 연착한다더니 3시간, 5시간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다. 기사나 서비스 제공자에게 전화를 걸어도 누구도 받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전화를 걸었을까, 버스는 애초 도착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기였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임무가 넘치는 경찰에게 신고할 가치도 없는 경미한 범죄였다. 인간의 추한 면모는 정말이지 드러나고야 만다.
전쟁이 얼마나 삶을 헝클어 놓는지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목격자들뿐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구도 그런 끔찍한 경험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또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왜 우크라이나의 비극에 주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끔찍한 교훈이 어째서 잊혀선 안 되는지,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글·사진 | 올렉산드르 구젠코
번역·정리 | 정유미 미디어·비즈니스 전문가그룹 빌런앤컴퍼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