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공을 침공이라 말했다가…러 교사들 ‘해직·기소’

박은하 기자

반전 교육, 학생이 녹음 신고

‘가짜뉴스’ 혐의 최대 15년형

가족·이웃 고발 핫라인 구축

여론 왜곡 ‘전체주의화’ 조짐

왠지 겹쳐 보이는 6일(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기념품 가게에 구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사진이 새겨진 컵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 AP연합뉴스

왠지 겹쳐 보이는 6일(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기념품 가게에 구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사진이 새겨진 컵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 AP연합뉴스

러시아 중부 도시 펜자의 영어·독일어 교사 이리나 겐(55)은 지난달 18일 13~14세 학생들에게 “러시아 운동선수들은 요즘 왜 국제대회에 못 나가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겐은 “러시아가 키예프(키이우)로 가서 우크라이나 정부를 끌어내리려 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된 주권국가”라며 “러시아가 문명화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러시아 선수들에 대한 보이콧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마리우폴의 산부인과 병동 포격이 우크라이나 무장세력이 저지른 테러라는 러시아 국영언론의 보도는 잘못됐다고 말했다. 닷새 후 겐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으로부터 출석 통보를 받았다. 학생들 중 누군가 녹음해 신고한 것이다. 겐은 가짜뉴스를 유포한 혐의로 기소됐으며 교직에서도 해직됐다.

러시아에서 반전 목소리를 내는 일이 점점 더 어렵고 위험한 일이 되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지난달 4일 러시아군에 대한 ‘가짜뉴스’를 유포할 경우 최대 징역 15년을 선고할 수 있다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달 초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거나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가족과 친구, 이웃 등을 고발하라며 핫라인과 웹사이트까지 구축했다. 겐은 “학생들에게 넓은 시야를 보여주고 싶었다. 선전·선동에 맞서고 싶었지만 감옥에 가게 됐다”며 “내가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조차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는 걸 보는 일이 너무 끔찍하다”고 6일(현지시간) 가디언에 말했다.

학교와 언론은 전쟁 찬성 여론을 생산하는 전진기지로 활용되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지난달 1일 전국 학교에 ‘우크라이나 탈나치화를 위한 특별군사작전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특별 수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교사들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공격한다는 말은 ‘미국의 공작’일 뿐”이라는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 모스크바의 교사 캄란 마나플라이(28)는 이 같은 조치에 대해 “나는 국가 선전의 거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인스타그램에 썼다가 사흘 만에 해직됐다. 반면 한 유치원은 아이들이 매트리스에 전쟁 찬성의 상징이 된 Z 대형으로 누워 있는 모습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특별군사작전’이라고 부르는 러시아 정부는 지난달 4일 우크라이나 전쟁을 “전쟁”이나 “침공”으로 부르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를 위반하면 최고 15년형에 처한다. 언론인, 공무원, 인플루언서 등 최소 8명이 온라인에 특별군사작전이 아닌 전쟁이란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법정에 넘겨졌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NTV, 로시야TV 등 러시아 국영방송에는 러시아군 공격에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 도시의 모습이나 피 흘리며 숨진 어린이 등 민간인 피해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신나치주의자들이 돈바스 등에서 주민들을 ‘인간방패’로 삼고 있다는 보도가 반복된다.

러시아 여론조사기관인 레바다에 따르면 지난달 26~30일 조사에서 러시아인 81%가 전쟁을 지지한다고 답했으며 푸틴 대통령 지지율은 전쟁 전인 71%에서 83%로 뛰어올랐다. 러시아의 시위감시기구 OVD-Info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현재까지 1만5000명 넘게 반전시위를 벌이다 체포됐지만 지난 3월13일 이후 대규모 시위는 잦아들었다. 이제는 시민들이 반전 여론 탄압에 가세하는 일도 나타나고 있다. 지나가다 반전 메시지를 내건 가게를 발견하면 항의하는 일들도 보고된다.

러시아 싱크탱크 카네기모스크바센터의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는 “권위주의 정권에서 전체주의 정권으로 변하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며 “새로운 세대의 ‘파블리크 모로조프’가 나올 수 있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모로조프는 1930년대 아버지를 반체제 인물로 고발한 10대 소년으로 이오시프 스탈린 체제의 소련 정부는 그의 동상을 전국에 세우는 등 그를 영웅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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