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제빵사 파리에 모은 프레데리크 루이
전통 장인 옹호자에서 에너지 위기 상징으로
20배 폭등한 전기료 고지서 받고 폭발한 프랑스 소상공인들
지난 2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12구에 위치한 재정경제부 건물 앞으로 요리사 모자와 흰색 조리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의 손에는 ‘제빵사가 위기에 처했다’라고 쓰여진 피켓이 들려 있었다. EDF(프랑스국영에너지기업)가 기요틴(단두대)에 매달려 있는 그림이 수놓여진 앞치마도 눈에 띄었다.
프랑스 서부 루아르아틀랑티크주의 마을 오동에서 왔다는 제빵사 마리안(47)은 “이 사람은 정육업자이고 이 사람은 레스토랑 요리사”라고 동료들을 소개하며 “에너지 문제에 항의하기 위해 동네 소상공인들과 함께 왔다”고 말했다.
모인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은 다양해 보였다. 프랑스 국기를 흔드는 사람부터,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진 가방을 메고 온 사람도 있었다. 북부 도시 릴에서 멕시코풍 공예방을 운영하는 클레르 비니에르는 “바게트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선정된 프랑스인의 자부심”이라며 ‘모두를 위한 질 좋은 빵’이라고 적힌 피켓을 높이 치켜들었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프랑스 전역의 소상공인을 한자리에 불러모은 이는 ‘니스의 제빵사’로 알려진 프레데리크 루이(53)다. 그는 지난해 11월 동료 제빵사 2명과 함께 ‘빵집과 장인의 생존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그가 지난달 트위터에 올린 두 달치 전기요금 고지서는 ‘바게트 위기’를 알리는 기폭제가 됐다. 그가 받은 지난해 11월 고지서에 780유로(약 104만원)로 찍혔던 전기요금은 12월에 1만7514유로(약 2354만원)으로 폭등했다. 이후 SNS에서는 전국의 제빵사들이 너도나도 에너지 요금 고지서를 인증하는 운동이 펼쳐졌다.
재정경제부는 지난 6일 소상공인을 위한 에너지 대책을 발표했다. 세금 납부를 연기하고, 과도하게 에너지 가격을 올린 공급업체와 무료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하며, 사업자의 전기요금 인상 폭을 15%로 제한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단,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전기요금 상한제는 연매출액 200만유로 미만, 사용전력 36kVA 미만, 직원 10명 미만인 가게 등에만 해당된다. 루이는 “모든 소상공인들에게 전기요금 인상 상한제가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번 시위를 독려했다.
루이는 언론에서 ‘프랑스 제빵업계의 십자군’, ‘미디어 괴물’로 불린다. 그는 지역 언론, 공영방송 가리지 않고 상당한 양의 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있으며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계정을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트위터 자기 소개 글에는 “요리 유산 보존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니스의 제빵장인. 홈메이드와 팽 오 쇼콜라의 열렬한 옹호자”라고 적어놓았다.
지역언론 니스마탱에 따르면 그는 미디어를 통해 유명세를 타기 전에도 해당 지역에서 수십년 전 모델의 구형 자동차로 빵을 배달하는 빵집 ‘르 사피톨’ 주인으로 유명했다. 오전 3시30분에 출근해 생지를 직접 반죽하는 등 전통 방식대로 만드는 크루아상과 빵 오 쇼콜라가 그의 주력 상품이다.
루이가 SNS를 통해 제빵업계 정책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2016년 무렵은 식생활 변화로 프랑스인의 자부심으로 꼽히는 바게트조차도 이미 급격한 판매량 감소 추세에 접어든 후였다. 연중무휴 운영되는 슈퍼마켓 체인이 늘면서 동네 소상공인들을 위협했다. 2014~2015년 유럽 낙농파동의 반작용으로 2017년에는 우유, 버터 가격이 크게 올라 빵집의 시름이 깊어졌다. 인구가 적은 시골 빵집들이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루이는 2017년 대선 때 각 정당 후보들에게 “전통 방식으로 생산되는 크루아상에 인증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제언하며 눈길을 끌었다. 프랑스 정부가 1993년 제빵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바게트에는 밀가루, 물, 소금, 이스트만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빵집을 뜻하는 ‘불랑제리’라는 이름은 즉석에서 반죽해 빵을 굽는 가게만 사용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한 데서 착안한 것이었다.
루이는 첨가물 없는 밀가루, 지리적 표시제 따른 생산지 명칭이 붙은 최고 품질의 버터만을 사용해 공장이 아닌 빵집에서 구운 크루아상에만 인증 마크를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6일 80시간 일하면서도 최저임금 수준 이하로 벌고 있다며, 자신과 같은 장인의 빵이 공장에서 생산된 빵에 밀려 사라지는 것은 ‘프랑스 요리 유산의 상실’이라고 주장했다.
루이의 주장에 가장 크게 호응해 준 것은 공화당이었다. 공화당은 드골주의 성향의 우파 정당이다. 니스 마탱에 따르면 루이는 니스를 지역구로 둔 현 공화당 대표 에릭 시오티 의원과 함께 활동해 왔다.
그는 이 과정에서 “프랑스 크루아상의 85%가 공장에서 생산된 빵”이라고 주장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프랑스제과제빵전국연합(CNBPF)은 루이의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동료들을 모욕하지 말라”고 밝혔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 출범 후 그는 브뤼노 르메르 재정경제부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크루아상 인증제 아이디어를 전했지만 “유럽연합(EU) 전체 규정을 바꿔야 해서 불가능하다”는 답을 받았다. 루이는 이후에도 프랑스 전통 방식 크루아상을 알리는 캠페인에 주력하다, 지난해 말부터 소상공인이 겪는 에너지 문제에 관해 활발하게 발언하고 있다.
그러나 23일 열린 전국 소상공인 시위는 변화를 이끌어 내기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 최대 제빵업자 모임인 CNBPF는 시위에 불참했다. 제빵사들 사이에서도 정부와 협상하는 것이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다. 루이는 장관과의 면담 결과는 “실망스러웠다”며 니스가 포함된 알프마리팀 지역에서 계속 시위를 이어가겠다고 BFM-TV에 말했다.
하지만 ‘소상공인의 죽음’을 외쳐온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주목을 받고 있다. 니스마탱은 “처음에는 우파 외에 루이에 공명하는 이들이 드물었지만 급격한 에너지 가격 상승 이후 그는 제빵사들의 싸움에 필수적인 존재가 됐다”고 평했다.
▶사진으로 보는 제빵사 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