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3세, 영국왕실 ‘흑역사’ 노예무역 연구 협조키로

선명수 기자
5일(현지시간) 영국 요크 민스터에서 열린 성목요일 예배에 참석한 찰스3와 카밀라 왕비. 로이터연합뉴스

5일(현지시간) 영국 요크 민스터에서 열린 성목요일 예배에 참석한 찰스3와 카밀라 왕비. 로이터연합뉴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왕실의 노예무역 역사를 밝히는 연구에 협조하기로 했다. 영국 왕실이 노예무역 연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협조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6일(현지시간) 영국 왕실은 17~18세기 선대 국왕들과 노예무역 간 연결고리를 밝히는 연구를 지지하며, 왕실 자료를 연구에 제한 없이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왕실 대변인은 국왕이 노예무역에 연루된 왕실의 과거를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 맨체스터대학이 왕궁관리청(HRP)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이번 연구는 지난해 10월 찰스 3세 즉위 이후 시작돼 2026년 완료될 예정이다.

앞서 가디언은 1689년 윌리엄 3세(1689∼1702년 재위)가 노예무역상인 에드워드 콜스턴으로부터 노예무역회사 로열아프리칸컴퍼니 주식 1000파운드 상당을 받은 기록이 담긴 미공개 문서를 최근 보도했다. 콜스턴은 2020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당시 브리스틀에 세워진 동상이 시위대에 의해 바다에 처박히면서 재차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노예무역으로 돈 번 왕실…찰스 3세, 영연방 이탈 움직임에 ‘이미지 쇄신’

영국의 한 기록보관소에서 미공개 문서를 찾아낸 미국 버지니아커먼웰스대학의 역사학자 브룩 뉴먼 박사는 콜스턴의 주식 양도가 “영국 군주제가 노예무역에 중심적으로 관여했으며, 왕실의 재산 축적에서 노예제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노예제와 노예무역에 대한 수세기에 걸친 투자가 오늘날 영국 왕실의 지위와 명성, 재산을 축적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타계하면서 국왕에 오른 찰스 3세는 내달 예정된 대관식을 앞두고 왕실 이미지 쇄신에 힘쓰고 있다. 노예무역 연구에 대한 왕실의 협조 발표는 여왕 타계 이후 영연방 이탈을 막기 위한 쇄신의 제스처로 풀이된다.

영국 군주 중 최장기간인 70년간 재위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난해 타계하자, 일부 영연방 국가들에선 영국 왕실과 결별하고 공화국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영국 출신 이주민 비중이 낮고 식민지배 착취의 현장이었던 카리브해 국가들이 특히 공화국 전환에 적극적이다.

카리브해 섬나라 앤티가바부다는 여왕 타계 사흘 만에 공화국 전환을 묻는 국민투표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자메이카 총리도 지난해 3월 윌리엄 왕세자 부부가 방문했을 당시 영국 왕실과 결별하고 공화국으로 독립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자메이카에서는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과거 영국의 식민지배와 노예무역에 관한 사과와 보상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이들 국가들은 영국의 왕을 군주로 삼는 ‘연연방 왕국’ 14개국에 포함돼 있다.

지난해 2월22일(현지시간) 영국 윌리엄 왕세자 부부의 방문을 앞두고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시민들이 식민지배와 노예제에 영국이 사과할 것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2월22일(현지시간) 영국 윌리엄 왕세자 부부의 방문을 앞두고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시민들이 식민지배와 노예제에 영국이 사과할 것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찰스 3세는 2018년 11월 아프리카 가나의 노예 요새를 방문했을 당시 노예제가 초래한 고통에 대해 유감을 밝힌 바 있다. 지난해 6월 아프리카 르완다에 열린 영연방 정상회의에선 “과거의 잘못을 인정해야 공통된 미래의 힘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유감의 뜻을 표했을 뿐, 영국 국왕으로서 노예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과 표명을 한 적은 없다.

역사학자들은 왕실의 연구 협조를 환영하면서도 노예무역 역사가 방대한 만큼 보다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먼 박사는 “수세기에 걸친 영국 왕실의 노예무역 개입과 이를 통한 재산 증식을 조사하려면 더 많은 연구원과 자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국 싱크탱크인 러니미드 트러스트의 할리마 베검 대표는 “왕실의 협조를 환영하지만, 노예제 및 식민주의의 역사와 유산을 조사하려면 왕실의 자체적인 위원회 구성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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