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한사람이 있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52)가 도널드 트럼프(70)의 미국 대선 승리 이후 서방의 마지막 보루로 떠올랐다고 뉴욕타임스가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경기침체와 일자리 감소, 난민 위기가 맞물리며 세계 각지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가운데 메르켈만이 서방 세계에서 신뢰할 만한 마지막 정치 지도자로 남았다는 이야기다. 뉴욕타임스는 유럽개혁센터 수석이코노미스트 사이먼 틸포드의 말을 인용해 “지금 독일의 역할은 그 어느때보다 중요하다”면서 “메르켈이 독일을 이끌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전했다.
메르켈은 지난 9일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자 “독일과 미국 양국은 민주주의와 자유, 법치와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긴밀한 협력 관계를 이뤄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서 이러한 양국 공통의 가치는 “개개인의 출신이나 피부색, 종교, 성별, 성적 취향과 정치적 성향과는 관계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거 기간 내내 막말을 일삼으며 인종주의와 혐오정서를 자극했던 트럼프에게 일침을 날린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다. 메르켈을 향해 전방위 압박이 밀려오고 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트럼프의 승리를 통해 광범위한 반이민 정서와 분노가 극적으로 드러났다. 유럽 각지의 극우 정치인들은 트럼프 승리 이후 한껏 기세등등해졌다. 다음달 있을 오스트리아 대선에서 극우 자유당 후보 노베르토 호퍼의 승리가 점쳐지고 있고, 프랑스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도 내년 4월 예정인 대선 승리를 자신한다. 독일내에서는 메르켈에 맞서 ‘난민 반대’를 내세운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돌풍이 거세다. 동유럽 각국도 난민 수용 문제로 메르켈과 갈등을 빚었다.
사실상 고립무원에 가까운 상황에서, 메르켈은 수많은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2011년 시리아 내전과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줄기차게 유럽을 위협하고 있는 푸틴의 러시아를 억제해야 한다. “공짜안보는 없다”며 ‘나토 무용론’을 주장해온 트럼프를 어떻게 달랠지도 문제다. 저성장과 난민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 유럽 각국은 독일만 바라보고 있고, 영국과의 EU 탈퇴 협상도 메르켈이 주도해야 하는 상황이다.
메르켈은 위기관리 능력이 돋보이는 노련한 정치가다. 뉴욕타임스는 메르켈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나 푸틴과의 협상에서 빼어난 능력을 보여줬다면서, 트럼프의 승리까지도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활용할 역량이 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의 안보 위협을 발판 삼아 분열된 유럽을 다시 단합시키고, 유로존 강화와 확대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메르켈 본인이 지쳤다는게 문제다. 3선 연임으로 11년간 총리 자리에 있으면서 메르켈의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메르켈이 유럽의 온갖 트러블을 처리하는데 싫증을 느끼고 있다는 측근의 이야기도 나왔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메르켈이 4선에 도전해야 한다는 압력이 벌써부터 들어오고 있지만, 그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다음달이 되어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