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만에서 관타나모까지, 미국과 쿠바 사이의 관계는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격렬하고 극적인 드라마였다.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이장이 25일(현지시간) 90세를 일기로 타계하면서, 국교 정상화로 한 차례 전기를 맞은 두 나라 관계는 또 다른 변화를 맞게 됐다.
국교 정상화를 이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성명에서 “한 인물이 그의 주변 사람들과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역사가 기록하고 판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던 카스트로의 혁명 전 법정진술을 연상케 하는 성명이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카스트로를 “야만적인 독재자”로 규정한 성명을 냈다. 70여년 이어져온 미국과 쿠바의 관계를 지배한 것은 오바마보다는 트럼프가 보여준 것 같은 시각이었다.
독립 이후 중남미의 스페인 세력과 대치해온 미국 입장에서 ‘스페인에 맞서온 쿠바’는 서반구의 거점으로 삼을만한 후보지였다. 1881년 당시 미 국무장관 제임스 블레인도 “멕시코만의 열쇠인 이 풍요로운 섬이 만일 스페인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쿠바는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미국(의 일부)가 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시각은 오랫동안 쿠바를 바라보는 미국의 인식을 대변해왔다. 1898년 스페인은 미국과 파리조약을 체결하면서 쿠바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고 미국은 1902년 쿠바가 공식 독립할 때까지 이 나라를 점령통치했다.
그러나 쿠바라는 사과는 쉽사리 미국의 품에 떨어지지 않았다. 1926년 당시 미국 기업들은 쿠바 사탕수수 산업의 60%를 장악하고 있었고, 쿠바 정부를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제라르도 마차도 정권은 1933년 쿠바 반군들에 전복됐다.
그러나 카스트로와 에르네스토 체게바라가 이끄는 반군은 혁명에 성공했고 1959년 아바나에 혁명정부가 들어섰다. 뒤통수를 맞은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는 쿠바 혁명정부를 어쩔 수 없이 승인했다. 하지만 혁명정부가 산업을 국유화하고 미국 기업들을 쫓아내자 미국은 카스트로 정권을 극도로 적대시하게 됐다. 미국은 쿠바산 설탕 수입을 중단하고 석유공급을 끊었다. 냉전이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쿠바는 석유를 얻기 위해 소련에 손을 벌렸고, 카리브해의 섬나라는 동서 양 진영의 첨예한 대결장이 됐다.
1961년 초 미국은 쿠바와 단교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카스트로를 축출하기 위해 수 차례 비밀작전을 벌였다. 그 해 4월 CIA로부터 훈련받은 쿠바 망명자들이 피그만을 침공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패착이었다. 1962년 미국 U2 정찰기는 쿠바에 건설되고 있던 소련 미사일기지를 촬영했다. 이로 인해 촉발된 미사일 위기는 미·소 양측간 핵전쟁 위기로까지 가면서 세계를 공포에 빠뜨렸다.
미 정보당국이 ‘몽구스 작전’ 혹은 통칭해 ‘쿠바 프로젝트’라 불렀던 카스트로 전복작전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은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를 단계적으로 높이고, 미국과 쿠바 간 이동을 금지시키고, 에너지·식량공급을 끊어 고사시키려 애썼으나 쿠바를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뉴욕타임스 기자 팀 와이너는 CIA 비사를 다룬 책 <잿더미의 유산>에서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던 작전들이 결국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이라는 역풍으로 나타났으나, 미 당국은 이를 숨기기 위해 급급했다고 쓰고 있다.
1만명 넘는 쿠바인들이 페루의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카스트로는 “쿠바를 떠날 사람은 모두 떠나도 좋다”고 선언했고, 그 해에만 12만5000명 정도의 쿠바인이 보트를 타고 미국으로 향했다(1980년 쿠바 엑소더스).
1981년 집권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전임 카터행정부와 달리 쿠바를 더욱 옥죄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소련이 무너지자 쿠바는 정치·경제적으로 더욱 외딴 섬이 됐다. 미국은 1992년 10월의 쿠바민주주의법(‘토리셀리법’), 1996년의 쿠바 자유와 민주주의 연대법(‘헬름스-버튼법’) 등으로 쿠바에 전방위 제재를 가했다. 다국적기업들은 ‘쿠바냐 미국이냐’의 선택을 강요받았고, 쿠바는 북한과 함께 지구상 가장 고립된 나라가 됐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조차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기 시작했다. 빌 클린턴 정부는 쿠바를 경제적으로 봉쇄하면서도 1999년 양국 간 여행제한을 완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2000년 9월 유엔 밀레니엄정상회의에서 클린턴과 카스트로는 기념사진 촬영 때 만나 악수를 했다. 두 나라 정상 간 40여년 만의 악수였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집권 초부터 “쿠바와의 대화에 열려 있다”며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취임 첫해인 2009년 3월 오바마는 쿠바계 미국인들의 쿠바 여행 제한을 완화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미국과 쿠바 간 통신도 쉬워졌다. 그 해 오바마는 미주정상회의에서 쿠바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2008년 카스트로가 동생 라울에게 권력을 공식 이양하면서 쿠바 내 분위기도 좀더 누그러져 있던 상황이었다.
2012년 라울은 미국과 “어떤 것이라도 논의할 수 있다”며 오바마 정부의 잇단 신호에 화답했다. 지난해 12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추모행사에서 만난 오바마와 라울은 어색한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1년만에 두 나라는 관계 정상화를 발표했다.
■미-쿠바 관계 연표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혁명으로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 전복
1960년 미국, 쿠바 경제제재 시작
1961년 1월 미국, 쿠바와 단교. 4월 피그만 침공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1977년 미-쿠바, 이익대표부 교차 설치
1980년 ‘쿠바 엑소더스’, 보트피플 12만5000명 미국으로 이동
1993년 쿠바, 경제난으로 달러 유통 일부 허용
1994년 미-쿠바 이민협정, 연간 2만명의 쿠바인 미국 이주 허용
1996년 미국 민항기 2대 쿠바 공군에 격추, 미 의회 쿠바 제재 강화
2001년 허리케인 미셀 쿠바 강타. 미국, 40년만에 쿠바에 식료품 수출 허용
2008년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취임
2009년 4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쿠바 여행제한 완화
2011년 10월 미국, 플로리다에 수감돼 있던 르네 곤살레스 석방
2013년 12월 오바마-라울, 넬슨 만델라 추모식에서 악수
2014년 12월 16일 쿠바에서 구금됐던 미국인 앨런 그로스 석방
17일 오바마·라울, 양국간 관계 정상화 발표
201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