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 임금·의료·교육…사회 불안 줄면 ‘희생물’도 줄어들 것”
201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주최한 청년여성 영상 제작 프로젝트에 대한민국의 20대 여성이 그들의 문제를 다룬 공동체영화 7편을 선보였다. 영화는 귀기울여주는 ‘안전한 관객’ 앞에서 가부장 사회에 대한 뜨거운 분노를 표현한다. 그들은 성적 불평등을 토로하는 데 있어 자신의 아버지라 해도 오빠라 해도 이 사회의 남성이 받아야 할 비난의 화살을 비켜갈 수 없다는 강한 분노를 드러냈다. 이렇듯 여성혐오 못지않게 남성혐오 또한 우리 사회 속에서 끓고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할 것 없이 대립의 날이 날카로워진 상태다. 여기에 지난 대선토론에서 불 지펴졌고, 군 동성애자 색출 논란으로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더 이상 없는 척 덮어버리지 못하는 단계가 되었다. 세계 정세 또한 혐오정치가 기승을 부린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프랑스의 마린 르펜이 이민자 혐오로 대중을 편갈랐고,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동성애자를 처형하며 권력 강화에 나섰다. 약자는 언제까지 ‘나중에, 다음에’라는 약속에 가만히 있어야 할까?
21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의 지성 중 한 명인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70)을 지난달 9일 만나 인터뷰했다. 누스바움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과 함께 국내총생산(GDP)이 아닌 인간의 행복에 주목하는 ‘역량이론’을 창시했다. 현대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다양한 혐오의 본질을 추적하며 사회구조가 삶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는 방향은 무엇인지 함께 짚어봤다.
안희경(이하 안): 왜 인간은 타인을 혐오할까요.
마사 누스바움(이하 누스바움): 두 가지 차원의 혐오가 있다고 생각해요. 첫째는 모든 사회에서 작동하며 몸에서 배출되는 분비물, 노폐물에 대해 느끼는 혐오죠. 대소변, 피, 콧물 등 우리의 동물적인 측면에 대한 거부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원시적인 두려움이 있는데, 인간이 갖는 동물적인 면을 정신적 차원에서 오염된 상태라고 보는 겁니다. 물론 시체는 확실히 혐오스럽죠.
안: 그런 자동반사적인 혐오 반응이 우리를 병균 등에 의한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기도 했습니다.
누스바움: 혐오의 대상이 꼭 위험요소로 한정되진 않습니다. 혐오와 두려움이 다르다는 것을 여러 실험연구가 보여줘요. 독버섯을 예로 들면 매우 위험하지만 혐오스럽지는 않죠. 반면에 바퀴벌레는 살균하면 먹을 수 있는 값싼 단백질원인데도 먹지 않습니다. 여기에 두 번째 혐오가 있는 겁니다. (심리가 반영된) 문화적 차원의 혐오로 저는 ‘투사된 혐오’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부패, 냄새, 분비물 같은 역겨운 물질을 특정 부류에 투사하고, 그들을 종속시키는 전략으로 사용하죠. 대체로 약한 무리를 향해 동물적이라고 말합니다. “오! 이건 저들한테만 있지 나한테는 없어.” 그러니까 동물적 성적 취향은 그들한테나 있지 나는 아니다, 고약한 냄새도 그들 무리한테 나지 나한테는 안 난다! 가당치 않은 거짓말이죠. 미국 백인들이 흑인한테 냄새도 고약하고 동물 같다고 말했지만 실제 모든 인간은 거개 비슷한 냄새를 풍겨요. 이는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한 전략입니다. 첫째 우리의 동물성을 부정하는 전략, 둘째 그들을 분리해서 종속시키려는 전략. 흑인, 여성, 게이, 레즈비언을 동물적인 존재로 만들면서 인간이 갖는 동물성을 피하려는 거죠. 투사혐오 방식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는데요. 흑인의 몸에 대한 혐오에는 육식동물 가운데 힘센 포식자 같은 이미지가 투영되기에 두려움이 섞여 있죠. 인도의 불가촉천민(최하위계층)에게는 다릅니다. 두려움 대신 일종의 처연하고 약한 동물의 이미지를 투사해요. 또 무슬림은 흥분한 동물로 이미지화되고요. 하층계급 사람 역시 혐오의 대상이죠. 여러 사회 속에서 더러운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왔습니다.
안: 왜 동물성을 거부하나요. 대부분의 사회에서 10년 이상 과학을 가르칩니다. 호모사피엔스는 동물이죠.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이 만드는 건가요. 아니면 종교적 신념체계인가요.
누스바움: 한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지 않아요. 인간은 신의 권능에 의해 창조되었다 생각하죠. 다양한 이론들이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했다고 설명하지만, 엄청난 논쟁거리입니다. 어떤 주들은 진화론 교육을 불법으로 봤고요.
안: 아직도 그런가요.
누스바움: 지금도 문화적으로는 격렬하게 거부하죠. 진화론을 가르칠 거면, 창조론도 같이 수업하도록 압박합니다. 저는 인간의 동물성을 거부하지 않고도 종교적 신념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주 많은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이지만 미국에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복음주의 종교가 진화에 저항합니다. 한국도 그렇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그래요.
안: 작년에 서울시청 앞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렸을 때, 복음주의 그룹이 내건 플래카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문성교를 반대한다.”
누스바움: 제 이야기에 딱 맞는 예로군요. 인간의 모든 섹스는 동물적이고, 동물적 몸을 사용합니다. 항문성교가 다른 형태보다 더 동물적일 것도 없어요. 이성 간 결합에서도 보편적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피임 때문에도 많이 했고, 그리스 화병 그림에도 나오잖아요.
안: 매우 사적인 성적 취향을 공론화하려는 관점은 무엇일까요. 동성애에 대한 차별을 만들려는 건가요. 방화나 폭력과 달리 누군가 항문섹스를 한다 해도 제게 위해가 미치는 일은 아닙니다. 더불어 우리에겐 원치 않는 상황이나 장면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이 있습니다. 거리에서 두 남성이 키스하는 모습이 불편하면 고개를 돌리면 되고요. 성인용품이 유통되는 것도 그런 조건입니다.
누스바움: 여타 혐오에 대한 관점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해요. 두려워하는 이유는 전통적인 가족구조를 위협하는 전면적인 사회적 변화가 올 것 같아서죠. 레즈비언의 경우, 여성들이 더 이상 남성의 조절 아래 있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고, 게이 남성들은 그보다 더욱 위협적 존재로 취급됩니다. 게이 남성을 향한 남성들의 직접적 반감이 더해요. 제 생각에 이성애자 남성들이 자신들에게도 삽입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고 보는데,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죠. 이는 여성화된다는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삽입의 대상, 약자가 되는 두려움요.
안: 가부장적 사고 속에 인간은 두 종류의 남성만 인정된다고 보입니다. 상남자와 계집애 같은 남자. 여기서 계집애 범주는 인간의 존엄을 갖지 못하고요.
누스바움: 왜냐하면 남성성은 어쨌든, 단단해지는 데 대한 엄청난 강박이 있는데, 지배적인 위치, 용기 넘치고, 자립적인 상태에 대한 강박이죠. 미국식 영어에도 드러납니다. ‘manning up’ 사나이답게. 여기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의 연약함 따위는 끼어들 수 없죠. 연약함은 남성에게도 있는 당연한 성질임에도 이성애자 남성들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안: 연약함은 사회를 위협할 수 없는 성질입니다.
누스바움: 당연하죠. 왜 우리는 타인을 종속시키려 할까요? 두려움을 포장하고자 반격하는 거예요. 분노와 같아요. 차라리 맞받아 가격하겠다, 결코 무서워 떨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하지만, 공론화할 때는 좀 더 이성적으로 말해야겠죠. 그래서 그들은 사회가 위협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콜로라도주에서 있었던 수정조항 2항 재판에 감정인으로 참석했는데, 그 재판에서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금지한다는 법안이 주민투표에 부쳐졌습니다. 법안을 발의한 남성이 증인석에서도 혐오를 조장하는 팸플릿을 돌리더군요. 게이는 대변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내용으로요. 그러면서 “파벌주의, 차별철폐 조치 등은 위험하기에 이에 대항해서 이 사회를 지키겠다. 아동 성추행이 늘어날 것이다”라고 발언했습니다. 제 동료이자 법철학자인 리처드 포스너 연방판사가 동성결혼반대법에 대해 이런 판결을 썼어요. ‘반대자들이 준 모든 이유들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결혼 허락은 위험요소가 아니다. 이는 모두 편견, 낙인에 의해 나왔다.’ 저라면 이렇게 말하겠어요. 혐오라고.
안: 모든 부모들은 자녀를 보호하려고 긴장합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이 생각나는데요. 발달장애직업센터가 들어오는 것을 인근 중학교 학부모들이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정신지체이기에 자신의 아이들이 더 위험하다고요.
누스바움: 이곳의 경우는 텍사스의 한 도시에서 정신지체인을 위한 주거센터를 세울 때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반대자들이 ‘구역법(zoning law)’을 통과시켰어요. 시에 있는 홍수대책 시행령을 확대해서 건축을 막은 건데, 정신지체이기에 홍수가 나면 대피하기 어렵다고 금지시켰죠. 진짜 이유는 혐오였습니다. 합리적 기본조차 갖추지 못하고 내린 판결로 아직도 논쟁거리입니다. 그래도 미국은 ‘장애인교육법(Individuals with Disabilities Education Act)’을 법제화해냈습니다. 지적장애아들이 일반학교 교실에서 모두와 어울려 지낼 수 있는 법으로 역사적 진전이자 많은 성과를 내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이 아이들을 보게 되면서 혐오가 사라지는 결과를 만들었죠.
안: 하지만 장애아동과 안전하게 함께하려면 교육환경을 정비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듭니다.
누스바움: 우리는 대체 왜 더 많은 돈이 필요한 걸까요? 실제 일반인이 장애인과 함께 지내려면 돈이 더 필요해요. 왜냐하면 이 사회는 장애가 없는 사람들만을 위해 디자인됐으니까요. 휠체어 진입램프가 없으니 장애인이 접근하려면 리모델링을 해야겠죠. 하지만 애초부터 이런 설비를 해놓았다면요? 이는 장애가 있건 없건 모두 함께 이용할 거고 거기에 장애설비 비용이라는 질문이 나올 이유도 없을 겁니다. 유모차도 그렇고, 뭐든 운반하는 데 편리하죠. 지적장애인들과 함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이들을 집중하게 하려면 수업이 보다 사려 깊어져야 해요. 교사가 세심하게 마음 쓰는 거죠. 애초에 교사들이 잘 수련받았다면 그들은 지적장애 제자가 들어왔다고 해도 다시 교육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노인을 위한 시설도 마찬가지예요. 단순합니다. 바로 이 사람들을 애초부터 제외시켰다는 겁니다. 나중에 함께하려니 비싼 거죠.
안: 최근 혐오가 정치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극우세력에 의해서 인종적,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확대되고 있죠. 한국에서 동성애가 이슈가 된 배경 역시 대선토론에서 보수 후보가 이를 정치적으로 부각시켰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한 편가르기 정치라고 보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누스바움: 불확실의 시대, 더 심한 경제적 불평등의 시대라서 그래요. 사람들이 누군가 탓할 상대를 찾고 있죠. 마치 아이들이 읽는 동화처럼요. 이야기는 늘 가난하고 배고픈 실제 문제에서 시작되지만 곧 마녀가 나옵니다. 동네 사람들은 깊은 숲에서 어렵사리 마녀를 찾아내고 외칩니다. ‘여기 역겨운 마녀가 있다. 마녀를 죽여 우리의 고통을 끝내자!’ 저는 현대인들 역시 마녀사냥을 원한다고 생각해요. 이 혐오스러운 사람들이 내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죠. 대상으로 여성이 등장합니다. 미국 대선이 그랬어요. 여성의 몸에 대한 역겨운 이미지가 엄청나게 많이 떠돌았고 종착지는 여지없이 힐러리 클린턴이었습니다.
안: 1968년 백인 노동자가 민주당을 지지하던 기존 성향을 버리고 공화당 닉슨을 당선시켰던 이유가 민권운동으로 거세어진 흑인들이 직장을 빼앗고, 여권 신장을 부르짖는 여성들이 남성의 말을 안 들을 거라는 선거전략에 휘둘렸기 때문이라고 평가됩니다. 지금은 흑인 대신 이민자들이 일자리 뺏는 주범으로 몰리죠. 한국의 청년들도 외국인 노동자나 이민자를 향해 전체적으로 낮은 임금 조건을 만든다며 일부 비난하기도 합니다.
누스바움: 이러한 심리는 항시 혐오로 발전해 가죠. 이민자들은 ‘더럽다’ ‘악마다’라는 시각 속에 인종차별도 있습니다. 제 사위는 독일에서 온 이민자인데 단 한 번도 어떤 저항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금발에 파란 눈이고 좋은 종류의 이민자니까 혐오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안: 한국에도 일종의 환상적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민족, 순수혈통이라는 거요. 왜 인간은 순수한 혈통, 정상인이라는 개념에 휘둘릴까요.
누스바움: 동물과는 다르다는 사고의 연장선이라고 봅니다. 얼마 전까지 백인이 흑인과 결혼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백인 남성들이 그들의 흑인 노예를 강간해온 시간이 수백년인데도요. 미국인 거의 모두가 인종적으로 섞였어요. 그럼에도 순수백인이라는 개념이 통용되는 것은 흑인의 피는 오염됐다는 사고 때문입니다. 인종장벽은 성적 지향보다 훨씬 더 높고 두껍습니다. 시카고 교외에 사는 레즈비언 커플이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졌는데, 낳고 보니 흑인 아기였어요. 병원의 실수였죠. 그 엄마들이 병원을 고소했습니다. 이제 당장 아이들과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요. 왜냐하면 그들이 사는 동네는 레즈비언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감이 없지만, 흑인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백인 동네였으니까요.
안: 한국서도 인종주의가 작동합니다.
누스바움: 미국의 인종주의는 어느 곳보다 문제적입니다. 거주지가 구분되고, 아직도 분리주의가 작동되어 흑인은 범죄자, 마약 중개인이라는 두려움이 작동합니다.
안: 그렇다면, 법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누스바움: 네. 법은 꽤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법학학위가 없음에도 법학대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이유죠. 철학적 가치가 법제화되면 엄청난 차이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제 종강한 수업이 페미니스트 철학이에요. 강간, 성폭력, 성추행 등에서 페미니스트 철학이 어떻게 법제화됐고, 어떤 차이를 만들었는지 논했어요. 제가 대학원 다닐 때는 여학생 모두가 성희롱, 성추행 경험이 있음에도 법도 없었고 불평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다르죠. 물론 법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문화적 변화를 시작해야 해요. 목소리를 내 말해야만 하죠. 게이, 레즈비언 경우는 법은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인식이 변하면서 차별은 비합리적이라는 사회적 시선이 생겼습니다. 젊은이들이 부모에게 말하기 시작했거든요. 부모들은 게이는 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 아이가 게이라는 걸 마주해야 했죠. 미국 성소수자 가족모임(PFLAG)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게이, 레즈비언 부모들이 차별을 없애는 법을 만드는 단체예요. 부모들은 보통 절연하기보다는 자식을 위해 뭐든 하고 싶어 하거든요. 그리고 학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오픈한 아이들 곁에는 역시 또래 친구들의 응원이 있죠.
안: 선생은 1인당 GDP가 증가할수록 국민의 삶의 질이 향상된다는 세계 경제주체들의 시각을 바꿔냈는데요. 불평등이 심한 국가에서는 경제성장이 전체 국민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는 데 별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냈습니다. 대안으로 ‘인간개발 접근법’을 제시했고, 지금은 유엔과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매년 인간개발지수를 발표합니다. 경제, 환경, 자원, 노동여건 등 위기가 만연한 시대, 어떻게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누스바움: 경제적 정의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누구는 질 낮은 교육을 받아도 되고, 일할 기회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 평등을 추구하는 일은 어떤 분야에서건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의 이슈를 나누어서 수행해야만 합니다. 미국의 경우 흑인 문제는 투표권과 주거에 대해서 싸워야 하고, 교묘해진 범죄자 정책에 대해서도 맞서야 해요. 구금률만 높이고, 실제 범죄율을 낮추는 데 실패한 정책으로 이는 인종차별주의자의 전략이죠. 반면에 장애인과 일을 한다면 그들의 교육, 직장에서의 통합 같은 사안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여기에 단순한 사회적 통합은 필요하지 않죠. 왜냐하면 대부분 집집마다 장애인 식구가 있거든요. 우리는 각각의 이슈에서 활동가들을 용감하게 지지하는 옹호자가 필요합니다. 인간 아닌 동물의 권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의 역량을 개발하는 접근은 참 복잡합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한 면으로는 매우 품위 있을 수 있지만 다른 면들에서는 꽤나 끔찍할 수도 있거든요. 저는 노동계급의 삶은 반드시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틈에서 자랐어요. 하지만 그들은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매우 성차별적이고 심하게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증)적이었답니다.
안: 곳곳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누스바움: 그것이 인간의 나약한 지점이니까요.
안: 어떻게 우리의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을까요. 인간다움을 누릴 조건을 강화하는 법요.
누스바움: 모든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품격을 누리는 삶의 기본을 보장받는다면, 세상의 두려움은 줄어들 거예요. 두려움이 줄면 서로의 유대가 강화되니 혐오도 줄죠. 제게 조언을 하나 하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보다 더 안전하도록 우리의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하라고 하겠어요. 의료보호 시스템을 강화하고, 삶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교육의 기회를 모두가 누리게 하는 안전망입니다. 불안은 훨씬 줄어들 겁니다. 사람들이 탓할 희생물을 훨씬 덜 찾을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는 또한 인간의 성과 장애, 동물에 대한 시선 등 나누어진 불안을 각각 분리해서 제기해야 합니다.
안: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에게 정의란 무엇인가요.
누스바움: 저의 최소한의 정의에 대한 개념은 제가 주장하는 역량이론 안에 있어요. 인간의 역량을 창조하는 조건에 대한 10대 핵심 역량입니다. 평균수명을 누릴 수 있는 조건, 건강을 보호할 권리,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신체보전, 자존감을 지키며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조건 등입니다. 모든 항목에서 최저 한계기준을 채운다면, 그 사회는 정의롭다고 불릴 수 있어요. 북유럽의 몇몇 나라들은 이 기준에 근접한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곳에도 많은 인종차별주의가 있죠. 그들은 평등역량을 완비하는 방향으로 싸워나가야 합니다.
안: 스리랑카의 민중지도자인 아리야라트네 박사를 인터뷰할 때, 제게 네 단어로 된 문장을 일러주며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the last, the first(가장 약한 자가 제일 우선이다).’ 가장 약자가 편안하다면 그보다 나은 모두는 안녕할 테니까요.
누스바움: 맞아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계속해서 나가야 하는 방향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엔이 권고하는 차별금지법 또한 논란의 소용돌이에 있다. 지역, 나이, 성별, 정치관, 학력, 장애 여부, 종교, 성적 지향 등이 다르다고 해도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삶의 조건은 아직 위태롭다. 그렇지만, 50여년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의 교육은 왜 초등학교를 무료로 개방해야 하는가를 놓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지금은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일도, 한때 모두 저항의 중심에 있었기에, 인간은 사고하는 힘을 사용하는 데 있어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법철학자, 정치철학자, 윤리학자, 고전학자이자 여성학자이다. 인간의 행복에 주목하는 ‘역량이론’을 제시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발전과 사회정의란 사람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자유를 부여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유엔이 매년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의 바탕이 됐다. 1947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뉴욕대에서 연극학과 서양고전학으로 학사학위를, 하버드대에서 고전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철학과와 고전학과 석좌교수, 브라운대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시카고대 철학과, 로스쿨, 신학교에서 법학/윤리학 석좌교수로 있다. 학문적 탁월성을 인정받아 미국철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시적 정의> <혐오와 수치심> 등 다수가 있다.
재미 저널리스트. 불교방송 PD 출신으로 2002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서구의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 모색을 소개하는 글을 써왔다. 윌리엄 켄트리지 등을 인터뷰한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2014), 노엄 촘스키 등 세계 석학 7인과의 대담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2013), 재레드 다이아몬드 등 세계 지성 11명과의 대담을 엮은 <문명, 그 길을 묻다>(2015)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