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고 밝힌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이를 실현하기 위해 파격적인 정책패키지를 내놨다. 수입 제품에 탄소 배출에 따른 비용을 부과하는 탄소국경조정제도(탄소국경세)를 2026년부터 도입하고, 2035년에는 휘발유·디젤 차량 판매를 사실상 금지하는 강도 높은 대책이다.
EU 집행위는 14일(현지시간) 탄소국경세 도입 등의 내용을 담은 ‘피트 포 55(Fit for 55)’ 정책패키지를 발표했다. 이는 앞서 EU 집행위가 제시한 ‘유럽 그린딜’의 이행방안으로,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1990년 대비 55% 감축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가장 주목되는 정책은 탄소국경세로, 특정 수입품의 제조 과정에서 배출된 탄소량을 측정해 수입업자에게 그에 상승하는 비용을 부담케 하는 내용을 담았다. 원산지에서 이미 탄소 배출권 구입으로 일정 비용을 지불했다면 이같은 비용이 공제되지만, 배출권을 무상으로 할당받는 등 EU 기준에 부족한 돈을 지불했다면 추가 지출이 늘어날 수 있다. 탄소국경세는 철강과 시멘트, 비료, 알루미늄 등을 대상으로 2026년부터 단계적으로 적용될 방침이다.
EU 집행위는 탄소국경세를 추진하는 이유로 무상할당 배출권의 문제를 들었다. 기업들에 일정량의 탄소 배출권을 무상으로 할당하는 관행이 지속되면서 기업들의 친환경 생산시설 전환이 늦춰지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린피스 등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도 2015년부터 2019년까지 5년간 받은 무상 배출권이 실제 탄소 배출량의 약 96%에 달해 실질적인 탄소 배출 감축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전해졌다.
차량의 탄소 배출 기준도 강화된다. 2030년부터 신규 차량의 탄소 배출을 2021년 대비 55% 줄이고, 2035년부터는 100% 줄이도록 하는 내용이다. 2035년부터 EU 27개 회원국에서 휘발유와 디젤 등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신차의 판매를 사실상 금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U 집행위는 또 배출권거래제 시장 개편으로 교통·건설 부문에 탄소 배출 비용을 부과하고, 선박도 처음으로 거래제 대상에 포함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재생에너지 사용을 확대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도 내놨다. 화석연료와 관련된 면세나 할인 등의 조치를 철폐하고, 유럽에서 출발하는 항공기에는 기존의 연료와 함께 ‘탄소중립연료’(e연료) 사용을 의무화한다는 방침이다. 2025년까지 역내 주요 도로의 60㎞마다 전기차 충전소를 확충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전체의 40%까지 늘리겠다고 EU는 밝혔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화석 연료 경제는 한계에 도달했다”며 “유럽은 2050년 탄소 중립(실질적인 탄소 배출량을 0으로 감축)을 선언한 첫 번째 대륙이었고, 이제 구체적인 로드맵을 내놓는 첫 번째 대륙이 됐다”고 밝혔다.
이번 정책패키지는 EU 27개 회원국과 유럽의회의 협상, 승인을 거쳐 발효될 예정이다. 하지만 화석연료 사용에 크게 의존하는 동유럽 국가들의 반대 등 실제 발효까지는 난관도 적지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무역에 끼칠 악영향을 우려하는 EU 외 국가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탄소국경세는 세계무역을 뒤흔들고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외교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