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힝야 학살 4년, 끝나지 않은 비극

①“아이 둘 낳으면 징역형”···우리는 ‘벵갈리 칼라’로 불렸다읽음

김윤나영 기자

제도화된 차별의 증언

2017년 11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촌에서 만난 로힝야 어린이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다. 두 눈에 상처와 불안이 스며 있는 듯하다. 강윤중 기자

2017년 11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촌에서 만난 로힝야 어린이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다. 두 눈에 상처와 불안이 스며 있는 듯하다. 강윤중 기자

미얀마군 4년 전 새벽 마을 급습
2만5000여명 희생…74만명 탈출
생존자 심층 보고서 세계 첫 공개

로힝야족인 하산(36·가명)은 미얀마 라카인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학교에서 그는 ‘벵갈리 칼라’로 불렸다. 방글라데시계 불법 이민자란 뜻이다. 칼라(kala)는 ‘니그로’의 미얀마식 비하 표현으로 무슬림에게 두루 사용된다. 그의 동료 교사들은 물론 학교장까지 그에게 대놓고 혐오 표현을 했다.

하산은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도 없었다. 그가 카페에서 주문한 차를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다른 손님들이 “야, 벵갈리 칼라, 우리 자리 없으니까 나가”라고 말했고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하산은 23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로힝야족이라는 이유로 나와 내 지역사회에는 단 한순간도 평화가 없었다”고 말했다.

로힝야족에게 2017년 8월25일은 그 어느 날보다 끔찍했다. 미얀마 군부는 그날 대테러 작전이란 이름으로 라카인주에서 대대적인 로힝야족 학살을 시작했다. 로힝야족 무장단체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의 경찰초소 습격을 트집 잡은 군부는 새벽에 군사 작전하듯이 마을을 습격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날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 로힝야족들은 매년 8월25일을 ‘로힝야 추모의날’로 기린다.

로힝야족 2만5000여명이 그해 8월부터 2018년 1월까지 미얀마 군부에 무참히 살해됐다. 희생자 대부분은 어린이, 여성, 노인이었다. 불에 타 죽고, 강물에 산 채로 던져졌으며, 성폭행이 이어졌다. 74만명은 학살을 피해 목숨을 걸고 방글라데시 등으로 탈출했다.

아시아 분쟁 지역에서 피해생존자와 현지 활동가를 지원하는 인권과 국제개발 비영리단체인 ‘아디’는 2017년부터 4년간 방글라데시의 콕스바자르 난민촌에서 라카인주 30개 마을 출신의 로힝야족 피해생존자 845명을 심층 인터뷰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현지 난민인 기록활동가 7명을 통해 30건의 마을별 진상조사 보고서와 종합 보고서가 나온 것은 세계 최초다.

아디는 ‘로힝야 추모의날’ 4주년을 맞아 24일 보고서를 공개한다. 향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이 보고서를 학살 증거로 제출할 예정이다. 경향신문은 보고서를 단독 입수해 로힝야족 학살과 차별에 관한 생생한 증언을 소개한다.

지난해 6월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서 비영리단체인 ‘아디’가 진행한 심층 인터뷰에 응한 한 로힝야 여성이 미얀마 군부의 집단학살을 증언하던 중 괴로워하고 있다. 이 여성이 살던 미얀마 라카인주 북부의 쿠텐콱 마을에선 최소 148명의 로힝야 주민이 미얀마 군인들에 의해 숨졌다. 10세 미만 희생자도 33명으로 추산됐다.  ⓒ 조진섭 사진 크게보기

지난해 6월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서 비영리단체인 ‘아디’가 진행한 심층 인터뷰에 응한 한 로힝야 여성이 미얀마 군부의 집단학살을 증언하던 중 괴로워하고 있다. 이 여성이 살던 미얀마 라카인주 북부의 쿠텐콱 마을에선 최소 148명의 로힝야 주민이 미얀마 군인들에 의해 숨졌다. 10세 미만 희생자도 33명으로 추산됐다. ⓒ 조진섭

하산도 그해 8월27일 군부의 총격을 피해 호수로 헤엄쳤다. 호수로 총알이 쏟아졌고 시신이 떠다녔다. 집은 이미 불탔고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는 이튿날 배를 타고 바다에서 22일을 표류한 끝에 9월19일 방글라데시의 세계 최대 난민촌 콕스바자르에 도착했다. 영어에 능통한 하산은 이후 콕스바자르 현지에서 한국 시민단체인 사단법인 아디의 ‘로힝야 인권보고서’ 발간을 돕는 기록활동가로 일했다.

가족들의 피살 현장을 목격하고 폭력, 성폭행 트라우마를 겪은 난민들의 마음을 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난민 중에는 군부의 방화로 화상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다. 4년간 기록해온 하산의 마음도 힘들었다. “미얀마에 살던 끔찍한 상황을 기억할 때마다 늘 마음이 미어집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차별을 받았어요.”

■ 뿌리 깊은 차별

군부 집권 이래 수십년 차별
한 명 출산 전제로 결혼 허락
이웃 마을 갈 때도 허가 필요
“죄수처럼 마을에 갇혀 있었다”

로힝야족 학살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다. 1970년대에도, 1990년대에도 있었다. 1962년 군부 집권 이래 수십년에 걸친 차별이 쌓여 학살이 되풀이됐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아디의 인권보고서는 “로힝야족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체계적이고 제도화된 억압을 경험한다”고 분석했다. 로힝야족에게는 이동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거주의 자유, 결혼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하산은 2007년 결혼허가증을 받기 위해 국경경찰부대에 50만짯(약 36만원)을 내야 했다. 난민 A는 “부부가 아이 한 명만 낳는 조건으로 결혼허가증을 발급받았다”면서 “둘 이상 낳은 부부나 비혼 여성에겐 최대 징역 10년형이 선고됐다”고 말했다. 결혼허가증을 신청할 때도 종교적 관습은 존중받지 못했다. 여성은 히잡을 벗고, 남성은 수염을 강제로 밀어야 했다.

둘째나 셋째를 낳으면 투옥될 수도 있었다. 난민 B는 “국경경찰부대가 임신 중인 여성들을 불러모아 자궁을 막대기로 때리면서 임신 여부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다른 소수민족들이 누리는 이동의 자유가 로힝야족에겐 없었다. 하산은 매일 출퇴근을 위해 곳곳에 세워진 검문소마다 통행료 500~1000짯(360~720원)씩을 냈다. 이웃 마을을 가려 해도 여행허가를 받아야 했다. 오후 6시 이후에는 통금이 부과됐다.

로힝야 마을은 게토화됐다. 난민 C는 “우리는 죄수들처럼 마을에 갇혀 있었다”고 회상했다. 난민 D는 “어떤 때는 이동허가증이 있어도 구타당했다”면서 “군경은 누가 허가증을 내줬냐고 캐물은 뒤 허가증이 만료되지 않았는데도 만료됐다면서 벌금을 부과했다”고 말했다.

학생들도 일상적으로 차별받았다. 로힝야 학생들은 라카인 학생들과 분리돼 뒤쪽 자리에 앉아야 했다. 이동제한 때문에 학업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라카인주 마웅도우 지역의 한 고등학교에 다녔던 학생은 “학교 가는 길에도 군인이나 국경경찰대가 지키는 수많은 검문소를 거쳐야 했고, 여행허가증이 있더라도 군경이 돈을 갈취하거나 우리를 조롱했다”고 말했다. 이 학생은 결국 학업을 포기했다. 로힝야족 상당수가 학교 문턱을 넘어보지 못했고, 글도 읽을 줄 모른다.

로힝야 주민들은 아파도 국립병원에 갈 수 없었고, 민간병원에 가더라도 진료를 거부당하거나 뇌물을 요구했다. 난민 E는 “라카인 사람들은 금방 진료받지만, 나는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4번이나 진료를 거부당했다”고 했다.

응급 상황에서 병원에 가려 해도 여행허가증이 없어 환자가 집에서 죽었다. 가족을 잃은 난민 F는 “의사를 만나러 부티다웅 마을에 가야 했다면 도착하기 전에 환자가 죽었을 것”이라며 “갖춰야 할 요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 투표권도 없는 무국적자

병원선 진료 거부당하기 일쑤
구직하려면 군부 허락 받아야

1982년 시민권 박탈 ‘무국적자’
2012년 이후 투표권도 빼앗겨
“체계적 로힝야 파괴 정책 존재”

로힝야족에게는 국적이 없다. 1982년 로힝야족의 시민권을 박탈한 시민권법이 적용되면서 로힝야족은 무국적자로 분류됐다. 대신 ‘외국인 등록증’ 발급을 강요받았다. 임시 확인증에는 ‘벵갈인, 무슬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로힝야족은 2012년을 마지막으로 투표권을 빼앗겼다.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의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이끄는 첫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2015년 총선에도 로힝야족은 투표할 수 없었다. 전에 주어졌던 투표권조차 온전하지 못했다. 난민 G는 “2010년 군부가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금 22만짯(16만원)을 내야 했다”고 말했다.

로힝야족은 직업을 구하려면 군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난민 H는 “강에서 낚시하려 해도 정부의 허가를 받기 위해 돈을 내야 했다”면서 “정부는 돈을 갈취했고, 국경경찰부대에 우리가 잡은 생선들을 가져다줘야 했다”고 말했다. 난민 I는 “생계를 위해 오토바이로 승객을 실어나르는 일로 하루에 1만~1만5000짯(7000~1만원) 정도 벌었지만, 그중 5000짯(3600원)만 집에 가져갈 수 있었다. 1만짯은 경찰에게 ‘세금’으로 내야 했다”고 말했다.

직업 선택의 제한 때문에 로힝야족 다수가 농사로 생계를 유지했으나, 대대로 살아온 땅마저 군부에 빼앗겼다. 난민 J는 “정부가 땅을 모두 가져가버려 예전 우리 땅을 이용하는 데 돈을 내야 했다”면서 “소작료로 수확한 작물의 절반을 내야 했다”고 말했다. 로힝야 주민들은 점점 더 가난해졌다.

군부는 로힝야족을 한 달에 최대 7번, 일주일에 1~3번까지 강제 무급노동에 동원했다. 주로 도로·울타리 건설, 물자 운반 등에 투입했다. 난민 K는 “그들은 나를 데려가 짐 운반을 시켰다. 12일 동안 음식을 주지 않고 굶겼다. 배고프다고 하면 무자비하게 폭행했다”고 말했다. 강제노동을 거부하면 벌금을 내야 하거나 체포될 수 있었다.

아디는 “지난 2017년 군부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로힝야 집단학살 뒤에는 체계적인 로힝야 파괴 정책이 있었다”면서 “피해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요구하는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로힝야 학살 4년, 끝나지 않은 비극]①“아이 둘 낳으면 징역형”···우리는 ‘벵갈리 칼라’로 불렸다
로힝야족은 누구
벵골만 살던 무슬림들
19세기 미얀마로 대거 강제이주


미얀마 라카인주에 로힝야족의 숫자가 본격적으로 늘어난 건 영국이 미얀마를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편입시킨 1885년 이후다. 영국은 벵골만에 살던 무슬림들을 대거 라카인주로 강제이주시키고 이들에게 쌀 농장에서 계약직 노동을 시켰다. 미얀마의 쌀을 인도 본토로 빼가기 위해서였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1942~1945년 미얀마를 침공하면서 소수민족 간 갈등이 빚어졌다. 로힝야족은 영국군 편에, 라카인주의 소수민족 라카인족은 일본군 편에 섰다. 이 시기 전투로 양측에서 수만명이 희생됐다. 로힝야족은 소수민족 자치권을 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받았지만, 영국은 전쟁이 끝난 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48년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미얀마는 처음에는 로힝야족에게 시민권을 줬다. 1951~1960년 치러진 총선에서 로힝야족 국회의원들이 나왔다. 그러나 1962년 군부 쿠데타 이후 탄압이 시작됐다. ‘불교 사회주의’를 내세운 네 윈 정권은 1982년 로힝야족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군부는 1978년과 1991~1992년에도 학살 작전을 자행했다. 당시에도 로힝야족 난민 수십만명이 방글라데시로 넘어갔다.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도 로힝야족의 비극을 방관했다. 그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총선 승리로 2016년 미얀마에는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인종청소는 계속됐다. 2017년 로힝야 학살 총책임자가 지난 2월 쿠데타로 집권한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이다.

로힝야족 인권보고서를 발표한 사단법인 아디의 김기남 변호사는 “군부는 시민들의 분노를 로힝야족에게 돌리면서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면서 “석유 등 자원이 풍부한 라카인주에 살던 로힝야족을 쫓아내는 것도 군부에 이득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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