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은 푸틴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러시아에서도 불붙는 반전여론읽음

박은하 기자
24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열린 반전시위 참가자를 경찰이 연행하고 있다./TASS연합뉴스

24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열린 반전시위 참가자를 경찰이 연행하고 있다./TASS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반대 여론이 러시아 내에서도 뜨겁게 불붙고 있다. 전국에서 반전시위가 일어나 수천명이 체포됐다. 처벌을 받고 활동을 중단할 수 있다는 당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스포츠스타, 가수, 언론인, 과학자 등 각계 저명인사들이 연달아 전쟁을 비판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한 24일(현지시간)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주요 도시에서는 잇달아 반전시위가 일어났다. 당국은 시위를 불법이라 규정하고 수백명을 체포했지만 시위의 열기는 확산되고 있다. 러시아 인권단체 OVD-info에 따르면 26일까지 시위는 최소 27개 도시에서 진행 중이며 총 2692명이 체포됐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반전시위에선 1370명이 연행됐다.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연설에서 전쟁의 목적을 “우크라이나의 신나치주의자들로부터 러시아인들을 보호하는 것”이라며 “국민들이 전쟁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 시민들이 모두 그의 말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가디언에 따르면 모스크바 거리는 푸틴 대통령의 발표 몇 시간만에 침울해졌다. 지난 24일 오후 모스크바 푸쉬킨스야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알렉산더 벨로프는 “푸틴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중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교사라고 밝힌 니키타 골루베프는 “나는 조국이 부끄럽다. 침공 소식을 듣고 그저 말문이 막혔다.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전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르갈 린치노프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글귀가 적힌 재킷을 입고 부리야티야의 반전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손팻말을 들고 나왔다가는 체포될 것이라 옷에 새겨진 문구로 대신했다”며 “불온한 말을 했다가는 감옥에 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들 무서워한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시위대는 “전쟁반대”를 외치며 행진했고, 불과 몇초 만에 경찰이 몇몇 참여자를 체포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며 인원을 메웠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24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열린 반전시위/TASS연합뉴스

24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열린 반전시위/TASS연합뉴스

유명인들의 공개 반전 메시지도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국민가수로 불리는 발레리 멜라제는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 이번 사건은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나 전쟁은 제발 오늘 당장 멈춰달라”는 영상을 올렸다. 지난 24일 US오픈에서 우승한 테니스선수 다니엘 메드베데프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테니스선수로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봤고 모든 곳의 평화를 원하게 됐다”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소식은 듣기 괴롭다”고 말했다. 세계랭킹 7위 테니스선수 안드레이 류블레프도 경기 후 인터뷰에서 “오늘 내 경기는 중요하지 않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봐 달라”고 말했다.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인 표도르 스모로프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전쟁은 안 된다”라고 올렸다. 래퍼 옥시미론은 “러시아 미사일이 우크라이나에 떨어지고 있을 때 나는 당신을 즐겁게 할 수 없다”며 매진된 자신의 공연을 전부 취소했다. 모스크바의 국립극장 소장인 엘레나 코발스카야는 “살인자를 위해 일하고 월급을 받을 수 없다”며 사표를 냈다. 모스크바의 유명한 현대 미술관 차라지(Garage)는 토요일 전시 작업을 중단하고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적, 정치적 비극이 멈출 때까지” 전시를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과학자들과 과학 저널리스트들은 전쟁을 비판하는 공개성명을 냈다. 이들은 “돈바스 문제를 빌미로 한 우크라이나 침공은 어떠한 정당성도 없다. 러시아는 전쟁을 일으키며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다”며 “(2차세계대전에서)나치를 상대로 한 결정적 승리에 기여한 러시아가 이제 유럽의 새로운 전쟁의 선동자가 됐다”고 비판했다. 성명 발표 하루 만에 러시아과학아카데미 회원 65명을 포함한 380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서명에 동참했다고 독일신문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차이퉁이 보도했다.

의료인, 건축가, 엔지니어, 교사 등 각종 직능단체들의 연대서명도 잇달아 나오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기 위한 온라인 청원에도 78만명이 서명했다.

일부 언론인들도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러시아 경제지 코메르산트의 외교담당 기자로 평소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정책을 비판해왔던 엘레나 체르네코는 “전쟁은 분쟁해결의 방식이 될 수 없다”며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연명서를 발표했다. 국영언론사 대표를 포함해 러시아 언론인 300명이 이 성명에 참여했다고 가디언이 전했다. 러시아 언론에서도 전쟁을 적극 찬성하는 목소리는 찾기 어렵다. 대다수는 최소한 중립을 지키거나 조심스럽게 전쟁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 네자비시마야 가제타는 국제사회의 경제제재 효과를 언급하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탈나치화’(전쟁의 푸틴식 표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노바야 가제타의 드미트리 무라토프 편집장은 “전쟁 관련 소식은 정부 공식발표대로만 전하라는 언론감시기관의 준칙을 무시할 것”이라며 신문을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두 가지 언어로 발행했다. 노바야 가제타를 비롯한 10개 언론사가 전쟁보도준칙 위반으로 당국의 경고를 받았다고 CNN이 전했다.

24일(현지시간) 칼리닌그라드에서 열린 반전시위/TASS연합뉴스

24일(현지시간) 칼리닌그라드에서 열린 반전시위/TASS연합뉴스

러시아 재벌이자 영국 프로축구 첼시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딸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대부분의 러시아인이 푸틴을 지지한다는 건 크렘린궁의 가장 크고 성공적인 거짓말”이라고 올렸다. 세계 최대 알루미늄 제조사 대표로 러시아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올레 데리파스카는 “이 전쟁은 막을 수 있었다”는 글을 텔레그램 채널에 올렸다 삭제했다. 러시아 최고 부유층의 이 같은 행보는 서방의 금융제재로 피해를 입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러시아 시민들의 반전 움직임은 지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진이나 우크라이나의 반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느껴온 시민들도 일방적 침공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과거 소련 시절 역사를 공유한다거나 러시아계 주민이 많다는 정권의 전쟁 명분은 오히려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에 유대감을 느끼고 전쟁에 반대하는 근거도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언론인 나탈리아 구메뉴크는 워싱턴포스트에 보낸 기고에서 “푸틴 대통령이 국가로서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오스러운 연설을 하는 것을 봤으며 동시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러시아어로) 러시아인들에게 평화를 호소하는 담화도 봤다”면서 “왜곡되고 불필요한 전쟁의 슬픈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앞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러시아인들은 전쟁을 원하느냐”며 러시아 내에서 반전운동을 벌여줄 것을 촉구했다.

물론 반전 여론이 러시아 전체 사회에서 다수가 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CNN이 전쟁 발발 전날인 지난 23일 공개한 러시아 성인 1021명 상대 여론조사를 보면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막기 위해 러시아가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은 50%나 됐다. ‘그렇지 않다’는 답변은 절반 수준인 25였으며, 나머지 25%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24일(현지시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반전시위에 참여한 시민이 마스크에 메시지를 적어 들어보이고 있다./Tass연합뉴스

24일(현지시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반전시위에 참여한 시민이 마스크에 메시지를 적어 들어보이고 있다./Tass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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