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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군 점령 지역에서 전시 강간 피해 사례들이 보고되는 등 광범위한 성폭력의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러시아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우크라이나 피해자의 첫 증언을 공개했다. 피해자는 키이우(키예프) 외곽 브로바리의 작은 마을에서 남편 안드레이(35), 아들 올렉시(4)와 살던 나탈리아(33·가명)였다. 그는 지난달 9일 집을 찾아온 러시아군 두 명이 남편을 “나치”라고 욕하며 총살했고, 자신의 머리에도 총을 들이대며 “조용히 하지 않으면 아들을 데려와 집안 곳곳에 흩어진 엄마의 뇌를 보여주겠다”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그 후 둘은 돌아가며 나탈리아를 강간했다.

나탈리아는 “러시아 측이 사건의 책임을 회피하고 러시아 병사들이 성폭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것을 보며 인터뷰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3월 30일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국경교차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3월 30일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국경교차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가디언은 3일 최근 러시아군이 퇴각한 키이우 인근 지역에서 전시 강간의 증언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집단 성폭행을 포함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을 저질렀다는 증언까지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도 이날 성명에서 지난 2월27일부터 지난달 14일까지 러시아군이 점령했던 체르니히우, 하르키우, 키이우 등 지역에서 성폭행을 포함한 전쟁범죄 사례들이 보고됐다고 밝혔다.

전시 강간은 지난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관한 로마규정’에 따라 전쟁범죄로 규정됐다. 이에 우크라이나 당국과 ICC는 보고된 성폭력에 대해 수사를 개시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 전시 강간을 저지른 러시아군에 대한 사법정의 실현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ICC는 설립된 이래로 전시 강간에 대해 유죄 판결을 한 건도 내린 적이 없다. 지난 2016년 내렸던 유일한 유죄 판결도 2년만에 항소로 뒤집혔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지난달 “ICC와 같은 국제기구가 러시아군에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확신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피해자 보호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가정폭력·성폭력 생존자를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라 스트라다 우크라이나’의 카테리나 체레파하 회장은 “많은 여성이 긴급 연락망을 통해 도움을 요청해 왔지만 대부분의 경우 교전으로 이들을 돕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그는 “강간은 평시에도 실제보다 적게 보고되며 피해자에게 낙인이 찍히는 범죄”라며 “우리가 알게 된 것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까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전쟁이 발발한 후 난민 여성과 소녀들을 도와온 단체 ‘페미니스트 워크숍’의 리비우 지부 담당자도 성폭행 피해자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며 “러시아가 강간을 군사 전술로 사용함으로써 앞으로 우크라이나 사회 전반에 깊은 고통을 초래할 것”이라 내다봤다.

보호망의 밑그림마저 부재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여성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다. 안토니나 메드베드추크(31)는 공습이 시작된 날 피란길에 오르기 전 콘돔과 가위를 가장 먼저 챙겼다. 신변보호를 위한 자구책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그는 모든 전쟁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며 “매일 폭격이 끝나고 통금이 발령되기 전에 기본 구급 용품 대신 응급 피임약을 찾아다녔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김혜리 기자 harry@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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