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피임약 합법화 놓고 진보 보수 대립에 끼인 온두라스 대통령

정원식 기자
온두라스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지난해 11월28일(현지시간) 당시 야당 자유재건당 대선 후보 시오마라 카스트로가 투표 종료 후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온두라스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지난해 11월28일(현지시간) 당시 야당 자유재건당 대선 후보 시오마라 카스트로가 투표 종료 후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올해 1월 출범한 중미 온두라스의 시오마라 카스트로 정부가 여성 인권 문제를 놓고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고 뉴욕타임스가 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발단은 지난 3월 수도 테구시갈파 인근 자모라노 대학 캠퍼스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이다. 사건 자체는 범인이 빨리 잡히면서 신속하게 종결됐으나 사후피임약을 합법화해야 한다는 인권단체들의 요구가 거세게 분출하면서 카스트로 대통령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섰다.

온두라스는 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규제가 가장 심한 국가 중 하나다. 온두라스는 전 세계에서 사후피임약을 전면 금지하는 유일한 국가다. 최근 아르헨티나, 멕시코, 콜롬비아 등 이웃 중남미 국가들에서 잇따라 임신중단 합법화가 이뤄지고 있으나 온두라스에선 성폭행에 의한 임신중단(낙태)도 불법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자퇴 비율이 높아 성교육 수준도 낮다. 이 때문에 온두라스는 여성 4명 중 1명이 19세 이전에 임신할 정도로 10대 임신율이 높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카스트로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진보성향 자유재건당 후보로 나서 12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하면서 이 같은 후진적 여성 인권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기대가 높아졌다. 온두라스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인 그는 선거 과정에서 “나의 최우선 사항은 여성과 페미니스트의 정치적 어젠다가 될 것”이라면서 성교육, 젠더 폭력 근절, 여성의 사회적 진출 확대, 제한적 임신중단과 사후피임약 합법화 등을 약속했다.

문제는 카스트로 정부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정권교체를 위해 도시 중산층, 소상공인, 소작농, 원주민, 성소수자, 여성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지지층을 규합했다는 것이다. 정당 차원에서는 카스트로 대통령의 좌파 정당 자유재건당이 중도파 정당 온두라스구원자당과 선거연대를 맺었다. 카스트로 내각에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과 온건보수 성향 정치인들이 섞여 있다.

이 때문에 집권 세력 내부에서도 사후피임약 합법화에 대한 온도차가 크다. 카스트로를 지지했던 활동가들은 지금이야말로 사후피임약을 합법화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온두라스구원자당 출신 호세 마누엘 마테우 보건장관은 사후피임약 합법화는 자신의 최우선 순위가 아니고 가톨릭 교회의 자문을 받아야 한다고 말해 진보 성향 지지자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가톨릭은 태아를 죽일 수 있다는 이유로 사후피임약 사용에 반대한다. 온두라스 인권 변호사 호아킨 메지아는 “카스트로 대통령이 더 많은 재생산권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와 페미니스트 조직의 요구와 교회의 강력한 힘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사안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카스트로 대통령실과 온두라스 가톨릭 교회 대변인, 마테우 보건장관 등에 연락을 취했으나 이들이 언급을 거부했다고 전했다.

온두라스에서 사후피임약 합법화 등 여성 재생산권 관련 정책은 민감한 이슈다. 앞서 2008년 마누엘 셀라야 전 대통령은 보수파가 장악한 의회가 제출한 사후피임약 불법화 법안에 비토권을 행사하는 등 진보적 사회개혁 정책을 추구하다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바 있다. 카스트로 대통령은 셀라야 전 대통령의 아내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도 신중론이 나온다. 해결해야 할 사회경제적 이슈들이 많은데 자칫 사후피임약 합법화 문제로 사회적 갈등만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탈리 로케 인권부 장관은 “지금은 정부가 교회 같은 강력한 적과 싸움을 벌일 상황이 아니다”라면서 “사후피임약 합법화는 불 난 데 부채질을 하는 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허리케인, 최근의 식품 및 연료 가격 상승으로 어려움에 처한 경제를 되살려야 하는 등 집권 이후 여러 영역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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