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우크라이나 침공은 주권적 결정" ... '침략자' 되어 맞은 2차대전 승전 기념일

박용하 기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제77회 종전기념일(러시아의 전승절) 행사가 열리는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도착하고 있다. 모스크바 | 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제77회 종전기념일(러시아의 전승절) 행사가 열리는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도착하고 있다. 모스크바 | 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수도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서 열린 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식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확장을 비난하며 우크라이나 침공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선제적이고 주권적인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국가총동원령 선포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우크라이나에서 전개하고 있는 ‘특수군사작전’은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로시스카야가제타 등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전승기념식 연설에서 “우리는 군사 인프라가 전개되고 수백 명의 외국 고문들이 일하기 시작하고 나토 국가들의 최신 무기들이 정기적으로 공급되는 것을 봤다”면서 “러시아는 공세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이는 불가피하고 시의적절하며 유일하게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서방의 위협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었다는 논리다. 그는 “모든 이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서방 국가들에 안전보장조약을 제안하고 합리적 타협안 모색을 촉구했지만 나토 국가들은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며 전쟁의 책임을 서방에 돌렸다.

그는 “우리의 의무는 나치즘을 붕괴시키고 우리에게 세계적 전쟁의 공포가 반복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라고 유언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전선에서 러시아의 안보를 위해 싸우고 있다며 “모든 군인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슬픔이며,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사한 군인의 가족과 아이들을 돕기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연설에 이어 대대적인 사열식이 진행됐다. 1만1000명의 병력과 131대의 군사장비가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러시아군은 앞서 70여대의 항공전력을 선보일 예정이라고도 밝혔으나 기상 문제로 비행은 취소됐다.

사열식에서는 각종 핵전력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RS-24 ‘야르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이스칸데르’ 단거리탄도미사일 등이다. 앞서 서방 국가들은 이번 사열식을 통해 러시아가 핵위협을 다시 강화할 것이란 예상을 내놓은 바 있다.

다만 일각에선 지난해 기념일에 비해 러시아가 적은 병력과 장비를 선보인 점을 거론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피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21년 기념식에선 병력 1만2000여명과 차량 등 군용장비 190여대가 동원됐으나, 올해는 이보다 다소 규모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러시아 외교 정책 전문가인 아글라야 스네코프는 모스크바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열식의 축소는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에서의 손실을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관리하려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사열식을 참관한 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 전투에서 전사한 러시아 ‘스파르트’ 대대 대대장 블라디미르 죠가의 부친과 면담하면서 “우리 군인들은 용감하고 영웅적이며 전문가답게 싸우고 있다”면서 “모든 설정한 계획은 이행되고 있다. 전과(목표)가 달성될 것이며 이에 대해선 추호의 의심도 없다”고 말했다.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특별 군사작전’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러시아 전역에서는 이날 시민들이 전쟁에 희생된 가족의 영정 사진을 들고 참가하는 ‘불멸의 연대’ 행진도 진행됐다. 러시아 매체들은 특히 러시아군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영토 헤르손에서 처음으로 불멸의 연대 행진이 진행됐다며 전쟁의 성과를 강조하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의 전승기념일 행사를 보는 러시아 시민들의 표정은 엇갈리고 있다. 일단 여론조사에서는 대부분의 러시아인이 전쟁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이 전쟁 전에 비해 14%포인트 이상 오른 81.5%를 기록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로이터통신이 모스크바에서 만난 일부 러시아인들은 자국이 서방의 제재도 견뎌낼 것이며, 심지어 이번 위기를 장기적인 번영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가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미칠 영향을 우려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특히 이번 행사를 앞두고는 정부의 동원령 선포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AP통신은 러시아 인권단체들의 말을 인용해 “동원령에 관한 법률과 입대명령을 받을 경우 대응방안에 대한 문의 전화가 최근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정치 분석가인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는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이 전쟁으로 겁에 질려있고 전쟁을 지지하는 이들조차 전쟁에 따른 악몽에 빠져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는 이날 2차 대전 전승기념일을 이용하는 러시아의 행태를 비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성명에서 “우리는 반히틀러 연합에서 다른 나라들과 함께 나치를 물리친 우리의 조상들이 자랑스럽다”며 “우리는 누구도 이 승리를 도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는 그때(2차 대전)도 이겼으며 지금도 이기고 있다”고 강조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날에도 성명을 통해 “러시아는 2차 대전의 승자들이 중시해야 할 모든 것들을 잊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일반 사람들이 전승절을 평화 그리고 ‘전쟁은 다시 안돼’라는 슬로건과 함께 떠올리고 있는 동안 러시아는 공격을 지속하고 있었다”면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 지역의 빌로호리우카 마을에 있는 학교를 폭격해 민간인 60여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의 서방 책임론에도 불구하고 올해 승전 기념일을 맞는 러시아는 이제 2차 대전 승전국이 아니라 침략국이 됐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의 전승절이 세계대전의 승리와 종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현대적 군사력을 자축하는 날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에서 전승절의 의미가 더욱 변색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를 독일 나치의 계승자로 깎아내림으로써 전쟁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려 한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언론인 막심 트루돌뤼보프는 “그들은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실제 전쟁에 대한 정당성으로 바꿔 놨다”라며 “승리의 숭배에서 전쟁 숭배로 미묘하게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고 비판했다. 또 푸틴 정부가 러시아 사회를 점차 군국화하기 위해 전승절을 사용했으며 “정치적 구호를 넘어 상상적인 재연을 물리적 탱크와 총, 군대를 가진 실제 공격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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