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 게릴라 출신 구스타보 페트로, ‘친미’ 콜롬비아 첫 좌파 대통령 되나

정원식 기자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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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콜롬비아는 역사상 좌파 대통령이 집권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미국과 소련이 각축을 벌이던 냉전 시기 콜롬비아는 미국의 가장 충실한 우방이었으며, 1990년대와 2000년대 중남미에 ‘핑크 타이드’(좌파 바람)가 밀려올 때도 콜롬비아는 예외였다. 이처럼 중남미 ‘우파의 보루’로 불리는 콜롬비아가 사상 첫 좌파 대통령의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다. 1980년대 좌파 무장 게릴라 출신으로 대선에 세 번째 도전하는 구스타보 페트로(62)가 그 주인공이다.

콜롬비아는 오는 29일(현지시간) 대선 1차 투표를 치른다. 좌파 연합 ‘역사적조약’의 후보인 페트로는 올해 들어 실시된 각종 여론 조사에서 2위와 두 배 가까운 격차를 벌이며 우위를 지켜왔다. 지난 20일 여론조사 기관 인바메르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도 40.6%의 지지를 받아 중도우파 연합 ‘콜롬비아팀’의 페데리코 구티에레스(47) 후보를 13.5%포인트 차이로 앞섰다. 1차 투표에서 50%를 얻은 후보가 없을 경우 6월19일 결선에서 최종 당선자가 가려진다.

정치 컨설팅 업체 콜롬비아 리스크 어낼리시스의 세르지오 구스만 국장은 파이낸셜타임스에 “콜롬비아인들이 극좌파에게 이 정도로까지 통치할 기회를 준 적은 없었다”면서 “좌파는 이 순간을 위해 수십년을 기다려왔으며,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기회”라고 말했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페트로 후보는 수도 보고타 북쪽의 광산촌 시파키라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18살이 되던 1978년 좌파 무장조직 M-19에 가입해 빈곤 지역에서 활동했다. 1985년에는 군부에 체포돼 고문을 받고 수감된 적도 있다. M-19가 1989년 정부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제도권 정당으로 변신하면서 페트로 후보도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모했다. 그는 1991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돼 두 차례 하원의원을 지냈고 2018년부터는 두 번째 상원의원 임기를 보내고 있다. 2012~2015년에는 보고타 시장을 지냈다.

2010년 첫 번째 대선 도전에서 9% 득표에 그쳤던 페트로가 지지율 1위 후보가 된 배경에는 콜롬비아의 고질적 불평등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 콜롬비아는 중남미에서 브라질에 이어 두 번째로 소득 불평등이 심한 국가다. 2022년 기준 빈곤선 이하 인구 비율은 42.5%에 이른다. 2020년 코로나 사태로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마약 관련 폭력도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도우파인 이반 두케 현 대통령이 지난해 서민층의 부담을 늘리는 세제개편을 내놓으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4월말 시작된 세제개편안 철회 촉구 시위는 빈곤·불평등에 대한 항의로 번졌다. 시위는 정부가 세제 개편안을 철회한 뒤에도 두 달 가까이 이어졌다. 구스만 국장은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이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고, 페트로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밖에 콜롬비아 최대 좌파 무장단체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 2016년 정부와 평화협정을 맺고 해체한 것도 ‘좌파 게릴라 출신 후보’에 대한 불안감을 희석하는 데 도움이 됐다.

페트로 후보가 당선되면 콜롬비아는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변화에 직면할 것으로 관측된다. 페트로 후보는 부유층과 기업에 대한 과세 확대, 재정 적자 감축 등을 통해 확보한 재원으로 대학 무상교육, 국민연금 강화, 싱글맘에 대한 최저임금 지급 등 친서민 복지 정책을 펼치겠다고 공약했다. 석유 시추를 중단하고 석탄 생산도 줄이는 등 산업 기반도 친환경으로 개편할 계획이다. 이 때문에 콜롬비아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페트로가 당선될 경우 계약조항 변경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페트로 조항’을 삽입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전했다.

미국과의 관계는 껄끄러워질 전망이다. 페트로 후보는 2012년 발효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으로 농업이 피폐해졌다며 당선되면 재협상에 나설 방침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과도 관계회복에 나설 계획이다.

페트로 후보가 집권하더라도 급진적인 변화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가 속한 좌파연합 의석은 콜롬비아 상원의 18%, 하원의 15%에 불과하다. 싱크탱크 페데사롤로의 루이스 페르난도 메지아 국장은 파이낸셜타임스에 “페트로 후보가 여러 정책을 내놓을 수 있지만 실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면서 “콜롬비아의 기성 제도를 해체하는 정부가 아니라 그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정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페트로 자신도 최근 집권 후 사유재산 몰수나 연임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등 수위 조절에 나서고 있다.

페트로 후보가 승리하면 최근 확산 중인 중남미의 핑크 타이드는 더욱 짙어질 전망이다. 이미 멕시코,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 중남미 주요 국가에서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게다가 오는 10월 브라질 대선에서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의 승리가 유력한 상황이다. 룰라 전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 중남미 경제 규모 상위 6개국 모두 좌파가 집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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