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시선 ‘빈곤 포르노’

박은하 기자

모금 위해 가난과 불행 이미지 팔아 존엄 침해…‘인종주의적 편견’ 비판

잘못된 시선 ‘빈곤 포르노’

흑인 어린이들이 소여물 통처럼 생긴 그릇에서 무언가를 긁어내고 있다. 앙상한 팔다리와 부풀어 오른 배, 갈비뼈가 드러나 있다.

영국의 자선단체인 ‘재난비상위원회’가 1980년대 초 에티오피아 대기근 구호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사용한 이미지다. 광고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이 단체는 1980~1984년 2300만달러를 모았다.

가엾은 아이들을 내세운 이미지는 논쟁도 불러일으켰다. 인종주의적 편견을 부추기고 동정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존엄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빈곤 포르노’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중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 심장병 어린이와 찍은 사진을 놓고 ‘빈곤 포르노’라는 비판이 나오자 이 표현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지만, 사실 ‘빈곤 포르노’는 이미 오래전 확립된 개념이다.

덴마크의 한 원조단체 대표인 외르겐 리스너는 1981년 잡지 뉴인터내셔널리스트에 기고한 ‘불행을 파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글에서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경건함 없이 굶어서 배가 부풀어 오른 아이들을 광고에 공개하는 것은 포르노”라며 ‘사회적 포르노’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는 이런 이미지가 당사자의 몸, 비참함 등을 무분별하게 전시한다고 봤다.

리스너는 불평등, 환경오염 등의 문제가 마치 비서구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이런 이미지로 모금을 하는 과정이 “서구 문명과 가치의 우월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형태가 돼 버린다고 봤다. 그는 이 같은 이유를 들어 “굶주린 아이의 이미지는 포르노에 가까울 정도로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리스너의 기고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모금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반론도 있었지만, 1990년대가 될 무렵에는 자성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유럽비정부기구(NGO)총회는 구호기관이 다수의 세계를 묘사할 때 ‘애처로운 이미지’나 ‘편견을 부추기는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콜린스 코빌드 영영사전은 현재 ‘포르노’의 뜻을 1. 포르노그래피 2. 특정한 주제에 대해 건강하지 않거나 관음증적 관심을 드러내는 출판 혹은 방송이라고 정의하며 2번의 예로 ‘빈곤 포르노’와 ‘푸드 포르노’를 들고 있다. 푸드 포르노는 음식이나 음식을 먹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담은 사진이나 영상을 말한다.

국제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도 2013년 모금 광고가 전형적인 ‘빈곤 포르노’라는 비판을 받은 후 해당 광고를 삭제하고 자체 광고 윤리강령을 만든 바 있다.

빈곤 포르노의 비판자들은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을 돕는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고 주문한다. 가엾은 이들을 내세운 모금보다 선진국이나 다국적기업, 자국 정부를 상대로 현지인들이 싸울 때 돕는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부 여성학협동과정 교수는 “빈곤 포르노는 제3 세계를 묘사하는 사진 저널리즘의 타자화된 시선을 비판하기 위한 용어”라며 “한국도 빈곤 국가를 타자화하지 않고 다른 문화와 인권을 존중하는 관점을 가질 수 있는지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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