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도 못 가린 ‘히잡 시위’ 상흔…국가 제창 거부한 이란 대표팀 ‘사형’ 우려까지읽음

박용하 기자
지난 25일(현지시간)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B조 웨일스 대 이란 경기가 열리는 카타르 알라얀의 아흐마드 빈 알리 스타디움에 이란 축구 팬들이 가운데에 X표가 표시된 이란 국기를 들고 있다. 카타르 |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5일(현지시간)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B조 웨일스 대 이란 경기가 열리는 카타르 알라얀의 아흐마드 빈 알리 스타디움에 이란 축구 팬들이 가운데에 X표가 표시된 이란 국기를 들고 있다. 카타르 | 로이터연합뉴스

이슬람 율법의 모순과 함께 이란 정부의 권위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히잡 시위’의 여파가 월드컵까지 이어지고 있다. 축구대표팀 선수들은 시위에 대한 연대 표시로 그라운드에서 국가제창을 거부하고, 시위에 연대하는 팬들은 관중석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현수막을 흔들고 있다. 축구대표팀의 선전이 이란 정부의 시위대 탄압을 가리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시위 연대’ 현수막 든 팬들

지난 25일(현지시간) 카타르에서 열린 이란과 웨일스의 조별리그 2차전 경기에서는 이란 반정부 시위에 연대하는 일부 축구팬들의 모습이 눈길을 모았다. 이들은 반정부 시위 구호인 ‘여성, 생명, 자유’가 적힌 현수막을 들거나, 마흐사 아미니의 이름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을 찾았다. 아미니는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뒤 의문사한 여성으로, 이번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반정부 시위에 연대하는 팬들은 이날 친정부 성향으로 추정되는 또다른 관중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들 관중들은 연대 티셔츠를 입은 팬들을 향해 모욕적인 말을 던지는가 하면, 이란의 정식 명칭인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소리높여 외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 팬들 중에는 알리 호세인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와 2020년 미국의 드론 공습으로 사망한 카셈 솔레이마니 장군의 사진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이들도 있었다.

경기장 입장 과정에선 정치적인 표현 문제를 둔 마찰이 있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현수막 등을 반입하는 것을 금지하는데, 경기장 운영진은 이를 엄격히 적용해 이란 국기를 제외한 모든 것을 압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시위에 연대하려는 팬들은 티셔츠를 벗거나 소지품들을 빼앗겼다. 로이터통신 등은 어떤 소지품들이 규정에 어긋났는지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했으나, FIFA 측은 즉답을 피한 것으로 전해졌다.

월드컵에서 표출된 이란 팬들의 연대 물결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것이다. 시위를 지지하는 이들이 이란의 최고 인기 스포츠인 축구를 통해 연대를 표현해왔기 때문이다. 시위 발생 뒤 이란 국내 축구 리그에선 몇달째 선수들이 골 세리머니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란의 전 국가대표이자 세계적인 축구 선수였던 알리 카리미는 반정부 시위의 상징이 됐으며, 현 대표팀의 공격수 사르다르 아즈문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시위를 지지하는 글을 올렸다.

일각에선 선수들 ‘사형’ 걱정도

긴장이 커지자 이란 정부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반정부 성향 독립매체 이란 인터내셔널은 26일 해킹단체 ‘블랙리워드’로부터 입수한 문서를 통해 이란 정부가 이번 월드컵을 반정부 시위 국면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계획들을 세웠다고 보도했다. 여기에는 대표팀 선수들에 대한 협박이나 금전적 보상을 통한 회유, 시위에 연대하는 팬들을 관리하기 위한 카타르 당국과의 협력, 이란에서 파견한 관중을 통해 현지 분위기를 관리하는 방안 등이 포함됐다.

하지만 이란 정부의 계획에도 축구대표팀은 지난 21일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고 시위에 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더선 등 일부 매체는 “이란 선수들은 (귀국 뒤) 구금이나 처벌, 혹은 죽음에 직면할 수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 뒤 2차전에선 일부 선수들이 국가를 부르는 등 비교적 온건해진 모습을 보였다.

이번 2차전 승리 이후 이란 정부군은 다수 도시들에서 조직적인 축하 행사를 열었으며,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국민에게 승리의 달콤함을 가져다줬다”며 대표팀을 칭찬했다. 반면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는 “오만한 자들이 월드컵 기회를 활용하려는 행태”를 지적하며 “(월드컵 경기에 대한) 시선 집중으로 방치되는 문제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표팀의 승리를 자축하면서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번 월드컵을 바라보는 이란 국민들의 시선은 복잡하다. 월드컵에서 이란 대표팀의 선전이 이란 국내 문제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정부가 국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는 30일 열리는 미국과의 경기는 이란 국민들의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 전망이다. 적대 관계인 미국을 이길 경우 이란 정권에는 강력한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에도 이란이 미국을 꺾자 국민들의 자부심이 현격히 커진 바 있다. BBC는 “이란의 많은 축구 팬들은 막막함을 느끼고 있다”며 “대표팀의 선전을 기뻐하는 것이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시위대를 배신하는 것은 아닌지 아직도 확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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