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된 전쟁, 그럼에도 슬픔과 불안은 무뎌지지 않는다

박은하 기자

전쟁 2년, 우크라인들 인터뷰

“섣부른 휴전은 연기된 전쟁”

키이우 비영리 조직에서 일하는 자리나 스리브나가 지난해 8월25일 우크라이나에서 제일 높은 산인 호벨라산에서 국기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자리나 스리브나 제공

키이우 비영리 조직에서 일하는 자리나 스리브나가 지난해 8월25일 우크라이나에서 제일 높은 산인 호벨라산에서 국기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자리나 스리브나 제공

러시아와 2년째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죽음과 파괴는 일상이 됐다. 그러나 경향신문 인터뷰에 응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죽음과 파괴의 소식에 무덤덤해진 것은 아니라고 전했다. 특히 지난 1년은 전장에서 전해진 참혹한 소식에 더해 전쟁이 쉽게 끝날 수 없을 듯해 고통스러웠던 한 해였다. 자신의 미래도 계획할 수 없고 서방의 지원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국내외 우크라이나인들의 마음을 짓눌렀다. 우크라이나 안팎에서 제기하는 ‘휴전론’에 대한 심경도 복잡했다. 하지만 대체로 섣부른 휴전은 ‘연기된 전쟁’일 뿐이라는 의견에 동의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인은 평화를 원하고, 러시아군이 물러가는 것만이 평화의 길”이라고 말했다. 지난 24일 침공 2년째를 맞아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이 연 규탄 집회에서도 같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는 지난 21~23일 e메일과 24일 현장에서 진행했다.

록솔라나 흐로메이

일상이 된 전쟁, 그럼에도 슬픔과 불안은 무뎌지지 않는다

물가 상승에 살기 더 힘들어
러의 키이우 재침공도 걱정

키이우 시민 록솔라나 흐로메이(30)는 “(지난 2년간) 우리는 너무나 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 어린이들, 그리고 영웅들을 잃었다”고 말했다. 흐로메이의 시아버지도 징집됐다가 러시아의 전면 침공 약 한 달 만인 2022년 3월 남부에서 숨졌다.

자신도 일하고 있고 전쟁과 피란으로 6개월 동안 실직 상태였던 남편도 일자리를 구했지만 물가가 급등해 살기가 더 힘들어졌다는 흐로메이는 ‘전쟁’과 ‘협상’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어느 쪽이라고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사랑하는 남편, 가족, 친한 친구, 지인들이 혹시 다칠까봐 여러 마을과 도시가 미사일 공격을 받으면 밤낮으로 걱정되고, 러시아군의 키이우 재침공 가능성도 걱정된다”고 말했다.

엘리자베타 부다스

일상이 된 전쟁, 그럼에도 슬픔과 불안은 무뎌지지 않는다

테러 집단과 협상은 불가능
국제사회의 도움 절실하다

키이우 미디어업계에서 일하는 엘리자베타 부다스(27)도 “지난 2년간 고통의 연속이었다”며 “1년 반 전 아내와 딸을 두고 군에 입대했다가 전사한 TV 카메라맨 동료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부다스는 “테러집단인 러시아와의 협상은 있을 수 없고, 휴전을 맺으면 몇년 안에 러시아가 재침공할 것”이라며 “전쟁이냐 휴전이냐에 관해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가 우리의 전쟁에 지쳐가고 있다고 느낀다”며 “우크라이나가 현재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적을 극복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키이우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자리나 스리브나(27)는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 다음날인 지난해 8월25일 우크라이나에서 제일 높은 산인 호벨라산에 올라 우크라이나 국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스리브나는 조부모를 돌보기 위해 피란을 거부한 부모님을 보며 자신도 가족 곁에 남아 있기를 택했다. 스리브나는 “미사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의 눈, 러시아군에 아들이나 딸이 살해된 부모의 눈, 러시아로 납치된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눈을 보면 저희가 감히 포기를 생각할 수가 없다”며 “선이 악을 이긴다는 믿음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로만 야마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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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자국 규탄하는 러시아인일 것

지난 24일 서울 러시아대사관 인근에서 만난 로만 야마노프(한국명 노로만)는 지난 2년간 240여명의 재한 우크라이나인들과 함께 한국 내 반전집회를 이끌어왔다. 크름반도 출신인 그는 “살아생전 할머니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러시아 반체제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자국을 규탄하는 러시아인을 봤다며 “저들(러시아 반전평화운동가)이야말로 지금 세계에서 가장 힘든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나탈리아

일상이 된 전쟁, 그럼에도 슬픔과 불안은 무뎌지지 않는다

독재국가 우크라이나가 아닌
자유국가 우크라이나 되기를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소속 연주자인 나탈리아(50)는 한국에서 태어난 아들과 함께 이날 집회에 참석해 바이올린으로 우크라이나 군가를 연주했다. 그는 “러시아 출신 소련군이었던 아버지는 우크라이나로 자대 배치받았고,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를 선택했다”며 “우크라이나 역시 독재국가가 아닌 자유로운 나라로 계속 유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러시아대사관 앞에 모인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은 국기를 들고 “민간인 살상을 중단하라,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경제 제재를 강화하라, 푸틴의 선전을 믿지 마라, 대한민국 감사합니다, 우크라이나 국민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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