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간 92차례 아내 강간 사주한 남성
71세 피해자, 공개 재판서 직접 증언
“나만의 싸움 아닌 모두의 투쟁”
프랑스서 ‘비동의 강간죄 도입’ 전망도
아내를 약물에 취하게 만든 뒤 다른 남성들을 불러 강간을 저지르게 한 남성이 재판에 넘겨져 프랑스 사회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오랜 시간 성범죄 피해에 시달려 온 아내는 직접 법정으로 나서 이번 재판이 다른 여성들에게 용기를 주어 사회 변화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프랑스 매체 르몽드 등에 따르면 71세인 피해자 지젤 플리코는 23일(현지시간) 프랑스 아비뇽 법원에서 열린 공개 재판에 나와 “내 인생은 완전히 무너졌다. 곧 72세가 되는데, 모든 걸 극복할 시간이 충분할지 모르겠다”면서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수치심은 가해자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지젤의 전 남편인 도미니크 플리코는 아내의 술잔에 몰래 약물을 타서 의식을 잃게 한 다음 인터넷 채팅으로 익명의 남성들을 집에 초대하고, 이들에게 아내를 강간하도록 사주해 불법 영상을 촬영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런 범행을 92차례에 걸쳐 반복했다.
프랑스에서 성범죄 피해자의 이름은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성범죄를 다루는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지젤은 이를 거부하고 실명 보도와 공개 재판을 요구했다. 다른 피해자에게 ‘정면으로 맞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사건의 실체가 정확하게 알려지기 바란다는 이유에서다.
지젤은 ‘성폭력 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프랑스 전역에서 그를 지지하는 각종 집회가 잇따랐다. 지젤은 이날 법정에서 “모두가 나에게 용기 있다고 말하지만, 이건 용기가 아니라 사회를 바꾸겠다는 결의”라며 “나만의 싸움이 아니라 모든 강간 피해자들의 투쟁”이라고 말했다.
주범인 도미니크는 2011년부터 경찰에 발각된 2020년까지 70명이 넘는 남성을 끌어들여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51명은 모두 재판에 넘겨졌지만, 도미니크를 비롯한 일부만 혐의를 인정했다. 나머지는 약에 취한지 몰랐다거나 부부의 ‘성적 판타지’를 위한 놀이인 줄 알았다며 발뺌하고 있다.
지젤은 이날 법정에서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강간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완벽한 남자였던 남편이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강간범은 늦은 밤 주차장에서만 등장하는 게 아니며,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 중에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 가해자는 26~74세의 남성들로, 소방관, 언론인, 배달원, 교도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된 이번 재판이 ‘비동의 강간죄’ 법안 도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현재 프랑스 형법상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가해자의 폭행과 협박’ 등이 있어야 하며, 동의 여부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커지면서 30명이 넘는 의원들이 개정안 발의를 준비 중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스웨덴, 독일, 영국 등 여러 유럽의 여러 나라는 ‘미투(나도 고발한다) 운동’을 계기로 동의가 없는 성관계를 강간으로 간주하는 법안을 도입한 바 있다.
▼ 최혜린 기자 cherin@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