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진실을 무대 위로…일본 어린이극단이 내민 화해의 손길

이수진 공연 칼럼니스트
입력2018.12.11 15:59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8.12.11 16:17

작은 날갯짓의 힘이 어디까지 미칠까? …
가고시마 고도모게기죠(어린이극장)와 인형극단 무수비좌

연극 <도깨비>의 한 장면. 말은 통하지 않지만 빨래 방망이 두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할머니와 개. |인형극단 무수비좌

2018년 12월 5일, 김순옥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위안부 피해자 생존자는 스물여섯 분이 남았다. 11월 29일에는 일본 미쓰비시사와 강제징용자들간의 소송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승소했다. 1, 2심의 패소 이후 대법원 상고에서의 승리였지만 이 모든 일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자세는 늘 ‘모르쇠’와 ‘유감’으로 점철돼 있다.

일본 정부의 외면은 교과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는 외국인 강제 동원이나 징용,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서는 강제성이 없었다고 왜곡하는 반면 일본에 투하된 핵폭탄의 고통은 크게 강조한다. 세계 유일의 핵폭탄 피해 국가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고통 하나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장난을 앞세워 전 아시아에 제국주의를 실현했던 일본의 악행이 사라질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런 과거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공연이 가고시마 일본 청소년들의 기획, 제작 참여로 올라왔다. 제목은 한국어인 <도깨비>, 부제는 ‘귀신 섬이라 불린 섬’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한 섬에 할머니와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 쪽을 찌고 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집 옆의 개울가에서 물을 떠와 빨래 방망이로 ‘똑딱 똑딱’ 빨래를 할 때면 도깨비가 놀러 오기도 한다. 섬의 주민들은 없는 것은 서로 바꾸고 남는 것은 나누는 평화로운 삶을 살지만 여기에 모모타로의 배가 들어오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모모타로의 전설은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오래된 설화로, 물에 떠내려 온 커다란 복숭아를 늙은 부부가 건져 반으로 쪼갰더니 아이가 나와 모모타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자 모험을 떠나 개와 원숭이 꿩을 부하로 삼고 귀신 섬의 귀신도 물리치고 영웅이 된다는 내용이다.

<도깨비>에는 바로 이 모모타로의 세 부하인 개, 원숭이, 꿩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모타로의 명령으로 귀신을 찾지만 그들이 찾은 건 도깨비가 보인다는 할머니 뿐이다. 개와 원숭이가 ‘귀신’을 찾는 동안 꿩은 한 개만 먹어도 하루 종일 힘이 나는 수수경단을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 주어 홀린 뒤 읽지 못할 말로 쓰인 계약서에 사인을 받는다. ‘사인, 모은다, 만든다, 먹는다’는 간단한 단어에 속아 사인한 계약서에는 수수를 키워 만든 경단의 9할은 모모타로국에게 돌아가며 어길시 밭을 뺏긴다는 조항이 있지만 다른 나라 말로, 빠르게 말하는 이 설명을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수경단이 필요 없는 할머니는 사인을 거부하고, 개는 할머니와 친구가 돼 빨래 방망이로 함께 리듬을 타며 도깨비도 보게 된다.

모모타로를 상징하는 복숭아 깃발 앞에서 훈장을 잔뜩 달고 신이 난 꿩. |인형극단 무수비좌

하지만 이들의 평화는 아주 빨리 끝난다. 수수경단 덕에 금은보화를 모은 공로로 서열 1위가 된 꿩이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는 할머니가 바로 귀신이라며 잡아가 고문하기 때문이다. 귀신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꿩의 잔혹함에 도깨비는 참지 않고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꿩과 원숭이의 목을 조르는데 고문을 당했던 할머니가 도깨비를 만류한다. 너는 이 섬의 바람, 땅의 내음, 조상의 마음인데 진짜 귀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모모타로, 꿩과 원숭이는 도망치고, 개는 군복을 벗고 돌아와 할머니, 도깨비와 친구가 돼 함께 빨래를 한다.

제목은 <도깨비>지만 도깨비는 한 번도 실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청아한 종소리가 울린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여겨지는 모모타로도 실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인 니시가미 히로키는 천황을 모모타로, 조선 총독부를 꿩이라고 생각하며 작품을 썼다. 작품 속에서 꿩과 원숭이가 도깨비에게 응징 당하자 둘은 목이 터져라 모모타로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모모타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도망치는 인물로 묘사된다. 꿩은 ‘이게 끝이 아니다’라는 흔한 악당의 대사를 던지고 사라지지만 조선 총독부를 상징하는 인물이 던지는 말이라 더욱 의미심장하다.

대본 작가와 작곡가를 섭외하고 인형을 만드는 등 제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나고야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인형극단 무수비좌가 맡았다. 이들은 2001년 춘천 인형극제를 시작으로 꾸준히 한국에서 공연을 하고 있으며 2018년 여름에는 인형극 <피노키오>를 토월극장에서 올려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인형극단 무수비좌를 파트너로 선정해 <도깨비>를 제작한 곳은 정확하게는 1972년에 창단된 ‘가고시마 고도모게기죠’의 ‘고학년 고도모 예술축전 실행위원회’다. 초등학생 뿐 아니라, 중,고등학생에게도 그 연령에 맞는 무대 공연을 감상하고 스스로 무대에 서거나 제작하는 것을 목표로 18년 전부터 시작됐다.

법적으로 미성년자는 모두 어린이인 셈이다. 실행위원회는 프로 예술가(연출가, 각본가, 배우)를 섭외해 작품을 제작한다. ‘고도모게기죠’를 한국말로 옮기면 ‘어린이 극장’ 이지만 사실 이 시민단체는 성인들의 참가비와 활동으로 굴러간다. 1966년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처음 시작해 순식간에 전국적인 단체로 성장했고 1990년대에는 400개 이상 지역에 회원 수 오십만이 넘었던 때도 있었다. 문화 혜택이 동경 등의 대도시에 몰려 있기에 갈 수 없다면 가져오겠다는 마인드로 시작됐는데, 그 중 가고시마 고도모게기죠의 활동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뛰어난 무대예술 감상’과 캠프 등의 ‘자연체험 활동’이다.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좋은 무대 공연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예술 감상 및 체험, 평화와 인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지역 사회 문화를 이어가는 활동에 중점을 둔다.

공연이 열리는 지역마다 그곳의 고도모게키좌 청소년들이 위원회를 꾸려 운영을 맡는다. |인형극단 무수비좌

학교 체육관이나 도서관 등에서 3시간만에 셋팅할 수 있도록 간소화 한 무대. 인형 디자인은 가고시마 고도모게기죠 학생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반영했다.|인형극단 무수비좌

가고시마 고도모게기죠는 공연을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제작에까지 나섰다. 여기에 가제노꼬 큐슈, 극단 산보, 인형극단 무수비좌 등 네 개의 유명 프로극단이 돌아가며 참여한다. <도깨비>는 자체 제작 세 번째 작품이다. 이들은 어떤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보다 일본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한국의 역사를 먼저 배우자는데 의미를 뒀다.

그 일환으로 2018년 1월 5일부터 7일까지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로 구성된 고학년축전 프로젝트팀 희망자 ‘어린이’ 23명과 PD, 인형극단 무수비좌의 연출, 배우, 대본 작가 등 다양한 구성원이 서울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국제평화인권센터(나눔의 집), 민속촌 등을 찾아가 공부하고 한국의 청소년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이들이 방문했던 2018년 1월은 남북 화해 모드 전이라 전쟁 걱정을 하는 아이들도 있을 정도였지만 짧고 굵었던 방문은 아이들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특히 마지막 프로그램이었던 한국측 청소년들과의 만남이 가고시마 아이들에게는 경이로운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를 미워하지 않아서 고마웠어요.”

극중에 나오는 노래 ‘네가 웃어서’를 불렀던 아타리 요시노(20, 가고시마대)는 이렇게 말했다. 사과도 없이 지난하게 남겨진 과거에 미움을 받을 만 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는 TV를 볼 때도 사실일까, 그 뒤에 뭐가 있을까를 생각하게 됐다며 한국 방문 전과 후의 삶이 달라졌다고 했다.

이 단체는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모든 예산은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내는 회비로 집행된다. 고집스러운 자립 덕분에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소재를 선택하고 평화와 인권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일본 언론은 이 단체의 활동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있는 이 단체 자체가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극중의 도깨비처럼 존재하며 오십년 넘게 전국적인 규모로 명맥을 유한다는 사실은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정도다.

<도깨비>를 본 어른들은 할머니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청소년들은 자신들도 학교에 가면 개, 원숭이, 꿩처럼 레벨이 나눠진다며 반성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감정적으로 이입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주인공 할머니의 용기다. 모두가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민폐가 되는 사회에서 자신의 주관을 지키는 할머니같은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보는 어른 회원들은 흐뭇해하면서도 자신들 역시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고개를 저었다.

제국주의가 끔찍한 것은 다른 나라의 주권만이 아니라 가장 작은 단위의 가장 약한 인간의 거절할 권리까지 치밀하게 짓밟기 때문이다. 현재의 일본정부가 그 사실을 깨닫는 날이 올지는 알 수 없지만, ‘고도모게기죠’ 같은 시민단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촛불 같은 희망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이들의 가냘픈 날갯짓이 어디까지 불어갈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들은 용서의 시작이 사과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만났던 학생들과의 만남이 <도깨비>를 완성해준 만큼 그들과 함께 이 공연을 보고 싶다는 인형극단 무수비좌의 연출가 오노의 꿈이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날이 오기를.

극작가 겸 공연평론가 이수진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 슈퍼스타’를 본 이후 뮤지컬에 대한 호기심과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동시에 획득했다. 이후 한국 뮤지컬계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 ‘뮤지컬 스토리’를 썼고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와 ‘그리스’ 등을 번역했다. ‘콩칠팔새삼륙’ ‘신과 함께 가라’ 등의 뮤지컬을 쓰며 여전히 무대 언저리를 헤매는 중.

<이수진 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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