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온 ‘메이드 인 북한’…푸른 눈의 북한문화기획자

이무경 칼럼니스트
입력2019.01.10 18:28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01.10 18:29

■ <영국에서 온 Made In 조선, 북한그래픽전> (2018. 12. 22~2019. 4. 7)

선전포스터 뽕밭. ⓒ Justin Piperger

영국에서 온 북한 그래픽 전이라니? 이런 호기심 끄는 제목의 전시가 지금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왔다는 전시의 제목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말 그대로 지난해 초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전(2018. 2.23~5.13, 이하 ‘메이드 인 노스코리아’)의 첫 세계 순회 전시회라는 의미, 그리고 또 한 가지 의미는 전시품이 모두 한 영국인의 수집품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국인은 베이징에서 북한 전문 여행사를 운영하는 고려투어(Koryo Tours)의 대표 니콜라스 보너(Nicholas Bonner, 57)입니다.

필자는 지난해 봄 이 전시의 원조 격인 ‘메이드 인 노스코리아’ 전시를 런던에서 관람했습니다. 런던의 킹스크로스 세인트 판크라스역(King’s Cross St. Pancras) 근처의 하우스 오브 일러스트레이션(House of Illustration)에서 열렸던 이 전시는 최초의 북한 일상 그래픽 전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 북한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프로파간다 선전화 정도일 텐데, 북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용품의 그래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왼쪽) 영국 전시 정문. (오른쪽) 서울 전시 포스터.

런던 특유의 고풍스러운 갈색 벽돌. 그 전시장 입구에 걸린 전시회 메인 포스터는 북한의 경제선전화 작품을 그대로 포스터로 만든 반면, 서울전의 포스터는 전시를 알리는 텍스트에 더 집중한 것으로 보입니다.

런던 전시회가 열렸던 지난해 초만 해도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개혁개방 노선에 대해 전 세계가 확신하지 못했던 시기입니다. 핵무기 개발로 온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북한 관련 전시회에서 경제선전화를 메인 포스터로 쓴 점부터가 비상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시 전경.

전시품은 주로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북한에서 대량 기아사태가 발생했던 ‘고난의 행군’을 전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시기에 해당합니다. 런던 전시에서처럼 전시장 벽은 모두 전시품 이미지를 합성한 벽지로 장식해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주었습니다.

선전포스터7 염소. ⓒ Justin Piperger

전시장을 4개로 구분한 것도 런던 전시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첫 번째 방은 포스터(북한에서는 ‘선전화’로 불림), 특히 경제포스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수많은 북한 주민이 기아로 사망한 ‘고난의 행군’을 연상시키듯, 포스터는 식량과 기초 물품의 생산을 독려하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모두 다 염소를 길러 더 많은 고기와 젖을 생산하자!’는 포스터에는 푸른 목장을 배경으로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인이 염소 새끼를 안고 등장합니다. 모든 포스터는 수작업임을 증명하듯 연필 스케치 자국이 보이고, 물감을 칠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그린 포스터 같은 ‘추억 돋는’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선전 포스터.

뽕밭을 더 많이 조성하고, 1차 소비품과 기초식품을 인민들에게 더 많이 제공하자는 기초적 의식주와 관련된 내용, 그리고 고려의학을 발전시키자든가, 살림집과 거리의 위생수준을 높이자는 등의 내용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언급한 “석탄이 꽝꽝 나와야” 화력발전을 할 수 있다는 표현과 포스터의 ‘석탄을 꽝꽝 생산하여~’라는 표현을 보면, 북한에선 쓰이는 특정한 낱말엔 어우러지는 꾸밈말이 정해져 있는 듯합니다.

(왼쪽) 백화점 포장지. (오른쪽) 강철 성냥 그래픽.

두 번째 방에는 조선 스타일 디자인, 즉 북한 그래픽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상표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북한의 여덟 가지 미술 분야(회화, 조각, 출판미술, 공예, 건축장식미술, 영화 및 무대미술, 산업미술, 서예) 중에서 당당히 한 분야를 차지하는 산업미술. 그 안에 속하는 것이 바로 그래픽입니다. 북한식 용어로는 도안에 해당합니다.

김정일은 미술론에서 ‘산업미술가는 자본주의사회에서처럼 겉치레만 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미술도안을 배격하고’라고 명시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처럼 물건을 사고 싶게 현혹하는 디자인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통조림 라벨. ⓒ Justin Piperger

그런데 위의 통조림 라벨 디자인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상품의 내용이 무엇인지 글씨를 보지 않아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사실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현 방법은 북한미술의 기본이 되는 조선화의 몰골기법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몰골기법이란 수묵화에서 윤곽선 없이 형체만으로 표현하는 묘사법을 말합니다. 조선화는 조선 수묵화의 맥을 이은 몰골기법에 채색을 더한 것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의 사실적 묘사를 중시하는 것입니다. 그래픽에서도 조선화의 몰골기법 위주의 수작업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컴퓨터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낙지 통조림.

이런 상표들은 마치 70년대 구멍가게에 진열된 물건들을 보는 것 같은 레트로적 감성, 혹은 B급 감성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북한에서 팔리는 낙지 통조림에 그려진 오징어를 보면, 남북한이 낙지와 오징어를 서로 반대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라 사실적으로 그려진 상표 그래픽 덕분입니다.

맥주와 샘물 상표.

또한 사기업이 거의 없는 북한에서는 인기 있는 상표가 정해져있습니다. 평양, 백두산, 천리마와 같이 이데올로기적인 지명이나 명칭은 여러 상품에 중복되어 쓰입니다. 예를 들어 백두산 담배, 백두산 샘물, 백두산 사이다가 있고, ‘평양’도 담배 상표나 맥주 상표에 다 같이 인기리에 쓰입니다. 백두산은 북한에서 혁명의 발상지이자 김정일의 탄생지로 신성시되며, 평양은 북한 주민 누구나 꿈꾸는 유토피아이기 때문입니다.

북한 ‘대동강 맥주’ 광고 화면. ㅣ SBS 뉴스 동영상 갈무리.

북한 상품 중에서 경쟁력이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음료일 것입니다. 맥주와 생수는 상표가 비교적 다양하고 품질이 외국의 것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남한에서도 유명한 대동강맥주를 비롯해, 룡성맥주, 평양맥주, 연한맥주(라거), 봉학맥주 등의 상표가 보입니다.

향산샘물, 박연샘물, 강서약수, 백두산샘물 등의 생수, 룡성 배사이다, 백두산 들쭉 사이다와 같은 탄산음료의 상표는 투박하지만 한편으로는 과거 회귀적인 레트로 감성을 일으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수질을 역설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담배 패키지.

담배 브랜드로는 천지, 건설, 평양, 천리마, 하나, 백두산, 락원, 영광, 붉은별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붉은별’ 담배의 주 소비층은 군인이고, ‘하나’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을 기념해 출시되어 큰 인기를 끌다가 남북 관계가 경색되자 판매가 중지되었다고 합니다.

북한의 흡연율은 50~60%로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입니다. 김정일은 금연 정책을 펼치기 위해 “담배를 못 끊는 사람을 3대 바보 중 하나”로 꼽아, 엘리트층에서 담배를 끊는 소동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흡연율 저하에 큰 영향을 미치진 못한 듯합니다. 나머지 두 바보는 컴맹, 그리고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전시의 세 번째 파트는 ‘평양의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일종의 북한판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는 5대 혁명가극 <피바다>, <꽃 파는 처녀>, <당의 참된 딸>,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가 매우 인기를 끕니다. 혁명가극의 장면을 확대 인쇄해 벽지로 만들어 전시하고, 교예(서커스)를 비롯한 각종 공연 및 행사의 입장권과 초대권을 전시했습니다.

평양 골프장 스코어카드.

마지막 네 번째 코너는 ‘오늘의 평양’으로 영상을 통해 오늘날의 평양과 평양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국에서 열렸던 전시에서는 평양 거리와 사람들의 일상을 저속 촬영한 5분 정도의 필름(Rob Whitworth 프로듀서) 을 선보였는데요.

이번 전시에는 이 필름과 함께 지난 9월부터 11월 초까지 5년 만에 선보인 대집단체조예술공연 <빛나는 조국> 공연과 평양 시내의 건축물들을 초현실적으로 보이도록 촬영한 조어그 데이버(Joerg Daiber) 감독의 <특이한 평양(Peculiar Pyongyang)>이 새로 추가되어 상영되고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고려투어가 제작에 참여한 것입니다.

(왼쪽) 기차이미지 배경. (오른쪽) 팝업스토어 평양슈퍼마켓 전경.

초중고생들의 겨울방학에 맞춰 기획된 만큼, 서울-평양의 기차 이미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고, 지난해 6월 성수동에서 열린 팝업전시회 ‘평양슈퍼마켓’에서 판매된 다양한 북한 스타일 상품을 제작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니콜라스 보너 인터뷰

필자는 지난해 10월 13일 평창에서 열린 <평창 평화영화제> 참석차 방한한 니콜라스 보너를 영화제 행사장에서 만나 인터뷰할 수 있었습니다. 보너는 영화제에서 초청작으로 상영된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81분, Comrade Kim goes flying, 2012)의 감독 자격으로 참석했는데요. 그가 준 명함의 이메일 주소 서버도 @comradekimgoesflying.com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필자는 그가 전시와 관련해 펴낸 (UK: Phaidon, 2017)에 필자 사인을 받으면서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2018년 10월 13일 평창에서 만난 니콜라스 보너.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는 어떤 영화인가?
땅속 깊은 곳에서 탄을 캐는 탄광 처녀 영미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공중곡예 교예단원이라는 꿈을 꾸게 되고 이를 이루는 영화이다. 벨기에, 북한, 영국 3개국이 제작에 참여했는데, 2012년 평양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부산영화제를 비롯해 각종 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TV에서 방영되었기 때문에 북한 주민치고는 이 영화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탄광 처녀가 교예단원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와중에 남성 교예단원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로맨스 코미디물이기도 하다. 물론 북한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마이 페어 레이디’와 같은 자기 성장적 내용과 로맨스가 버무려진 판타지 로맨스물로 보면 될 것 같다. 북한에서는 춤과 노래가 많이 들어간 흥겨운 인도의 발리우드 영화가 매우 인기 있다. 이 작품의 밝은 분위기도 북한 주민들의 성향과 잘 맞은 것 같다. 하지만 아직까지 자본주의국가 영화 배급사에서 연락 온 곳은 없었다.(웃음)

영화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 스틸 컷. 김영미 역의 배우 한종심. ㅣ 네이버 영화

영미로 나오는 배우가 서커스를 잘 하는 것 같다. 연습을 많이 한 것인가? 북한 배우들의 개런티는? 그리고 북한판 <홍길동>으로 유명한 인민배우 리영호가 출연해 최근의 모습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동계올림픽 가면 응원의 가면 이미지 배우로도 알려져 있다.
주인공 영미로 출연한 배우 한종심은 실제 교예배우 출신이다. 영화 출연은 처음이었는데도 자연스럽게 매우 잘해주었다. 개런티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처럼 높은 수준은 전혀 아니었다. 영미가 꿈을 이루도록 돕는 공사장의 석근 중대장이 인민배우 리영호인데, 역시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배우답게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밸런스를 잘 맞춰주었다.

1993년 보너의 첫 북한 방문. 조쉬 그린(왼쪽)과 함께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북한 전문 여행사의 대표이자, 북한 영화감독이며, 북한 미술품 컬렉터이다. 당신은 북한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과 어떻게 인연을 가지게 되었나?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1993년 친구를 따라 북한 여행을 했다. 북한은 1987년부터 외국인 관광을 허용했지만, 거의 관광객이 없었다. 당시 베이징에서 북한과 택배운송사업을 벌이기 시작한 친구 조쉬 그린(Josh Green)이 그보다 몇 년 전 베이징의 한 대학에서 중국어를 배울 때, 같은 반에 있던 북한 유학생이 북한에 귀국해 관광담당자가 되어 그를 초청한 것이다.
그렇게 설립된 고려투어의 첫 번째 관광객으로 가본 북한은 너무 아름다웠다. 보통강과 대동강이 흐르는 평양은 도시 사이에 조성된 여러 공원들과 독특한 건물들이 어우러져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었다. 이후 고려투어를 맡게 되면서 수 백번 북한을 방문했고, 사탕껍질에서부터 포스터, 미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 콘텐츠에 매료되어 다양한 것들을 수집하고 전시하며 책도 출판하게 되었다.

고려 평양마라톤 투어 동영상 갈무리. ㅣ 고려투어 공식 유튜브

고려투어의 인터넷 홈페이지(https://koryogroup.com/)를 통해 보니 올해 평양마라톤 패키지 투어를 비롯해 문화체육행사와 결합된 북한 투어 상품이 많고, 그동안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기획하고 수행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2014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해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2008년 뉴욕필의 평양 공연을 비롯해 서구와 함께 하는 많은 문화행사의 코디네이터로 고려투어와 내가 참여하고 있다. 지금은 개혁개방 노선으로 선회하고 있지만, 그동안 은둔의 나라로 알려진 북한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에서 특별히 보너 씨를 믿고 문화 관련 일을 맡기는 것 같다. 어떤 특별대우 같은 것이 있나?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웃음) 북한에서 나를 많이 인내해주고(tolerate) 있는 것 같다.

영화제 참석 말고는 남한에서 어떤 행사를 계획하고 있나?
영국에서 열렸던 <메이드인 노스코리아>전시를 서울에서 2018년 말부터 2019년 4월까지 열고, 그 외에도 내가 수집한 목판화전이 예정되어 있다. 여러 경로로 수집한 다양한 종류의 북한미술품들이 정리되는 대로 책을 출판하고, 전시를 할 것이다.

경향신문에서 오랫동안 미술담당 기자를 지낸 필자는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석사를 마치고 현재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박사과정 중에 있다.

<이무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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