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시스테마의 어두운 그림자와 불안한 미래

장지영 공연 칼럼니스트
입력2019.04.02 17:21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엘 시스테마를 냉정히 바라보기

2019년 올해 창단 100주년을 맞은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최근 한국을 찾았다. 음악감독 취임 10주년을 맞은 스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과 함께였다. 두다멜에 대한 국내 언론의 기사에는 ‘엘 시스테마(El Sistema)’ 출신이라는 내용이 반드시 나오며, 엘 시스테마에 대해 ‘클래식계의 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

2019년 3월 1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구스타보 두다멜 & LA 필하모닉 내한공연|마스트미디어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의 저소득층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오케스트라 중심의 음악교육 프로그램이다. 1975년 베네수엘라의 경제학자, 정치가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가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만들면서 시작돼, 전국 아동 및 청소년이 무상으로 오케스트라와 합창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확대됐다. 특히 2004년 거장 지휘자 사이먼 래틀과 클라우디오 아바도로부터 ‘클래식계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엘 시스테마의 정식 이름은 원래 ‘베네수엘라 아동 및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국민적 시스템을 위한 국가재단’(Fundacion del Estado para el Sistema Nacional de las Orquestas Juveniles e Infantiles de Venezuela)이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앞 글자들을 딴 ‘FESNOJIV’를 사용했지만 해외에서는 중간의 ‘el Sistema’를 따서 불렀다. 영어권에서는 ‘베네수엘라 국립 아동 및 청소년 오케스트라 네트워크’(National Network of Youth and Children‘s Orchestras of Venezuela)로도 알려져 있다. 2012년부터 ‘시몬 볼리바르 음악기금’(Fundacion Musical Simon Bolivar)으로 명칭이 변경됐으며, 줄여서 FMSB라고 부른다. 2015년 기준으로 베네수엘라 전역에 400개의 센터가 있고, 85만 명이 배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엘 시스테마 홈페이지 (http://fundamusical.org.ve)

엘 시스테마는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뉴스는 물론 책과 다큐멘터리로 소개됐다. 마약, 매춘, 폭력 등에 이미 노출됐거나 노출되기 쉬운 환경의 아이들이 엘 시스테마를 통해 어엿한 음악가로 성장하는 모습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후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의 음악 혁명이라는 평가 속에 벤치마킹의 대상이 됐다. 한국에서도 2008년 두다멜이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한 것을 계기로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서울시가 2010년부터 시작한 ‘우리동네 오케스트라’ 프로젝트와 문화체육관광부가 2011년부터 시작한 ‘꿈의 오케스트라’ 프로젝트가 바로 한국형 엘 시스테마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내한한 두다멜은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외에 LA판 엘 시스테마라고 할 수 있는 LA 유스 오케스트라(YOLA) 단원 20명 및 교육 강사들을 대동했다. 그의 지휘 아래 YOLA 단원 20명과 한국의 꿈의 오케스트라 80명은 연합 음악캠프를 가졌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는 엘 시스테마는 2010년대 초반 이전 상황에만 머물러 있다. 2010년대 이후 엘 시스테마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나온 데다, 최근 베네수엘라의 심각한 경제 위기 및 아브레우 박사의 타계 이후 엘 시스테마가 많이 흔들리고 있는데도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엘 시스테마를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평가하려면 엘 시스테마를 둘러싼 각종 논란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을 통한 사회 변혁’을 슬로건으로 내건 엘 시스테마는 1980년대부터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의 잇단 해외 투어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주빈 메타, 플라시도 도밍고, 래틀, 아바도, 베를린필 수석 단원들이 직접 베네수엘라에 와서 지도한 것은 엘 시스테마의 이름을 세계 클래식계에 알렸고 베네수엘라 청소년들에게도 동기 부여로서 의미가 컸다.

특히 두다멜이 2004년 독일에서 열린 제1회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한 후 2009년 28세의 나이로 LA필의 최연소 음악감독이 된 것은 엘 시스테마의 신화에 정점을 찍었다. 여기에 베를린필 최연소 단원 기록을 깨트린 천재 베이시스트 에딕손 루이스, 두다멜보다 3년 아래로 촉망받는 지휘자 크리스티안 바스케스 등 ‘엘 시스테마 키드’들의 활약이 이어지면서 신화는 한층 공고해졌다. 클래식 음악이 선진국 중산층 이상의 전유물로 향유 계층의 확대가 쉽지 않은 데다, 빠르고 감각적인 것을 선호하는 현대인의 취향과 맞지 않아 대중음악에 밀려 점점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엘 시스테마는 ‘클래식의 미래’를 보여줬다.

엘 시스테마를 설립한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엘 시스테마 홈페이지

무엇보다 베네수엘라에서 여러 명의 대통령이 바뀌는 동안에도 엘 시스테마를 굳건히 확장시켜온 아브레우의 열정은 감동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엘 시스테마를 대표하는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와 그 지휘자인 두다멜의 공연은 세계 어디서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참고로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는 2011년 단원들의 나이가 성인에 해당하기 때문에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런데, 베네수엘라에서 빈곤층 아동 및 청소년을 변화시킨 엘 시스테마의 성과 때문에 가려지긴 했지만 2007년부터 아브레우와 두다멜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베네수엘라에서는 독재자인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야당 성향의 민영TV인 RCTV를 폐쇄시키는가 하면 무제한 집권을 위해 대통령 연임을 제한한 헌법 조항을 철폐하는 국민투표를 추진할 때였다. 차베스의 무자비한 언론 탄압은 세계 각국의 비판을 받았는데, 두다멜은 RCTV를 대신해 설립된 공영방송에서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국가(國歌)를 연주한 것이다. 두다멜은 이후에도 차베스가 참석한 국가 행사에 꾸준히 참석해 지휘했고, 그 자리에는 아브레우도 언제나 함께였다.

차베스 반대파는 아브레우와 두다멜이 독재 정권의 앞잡이가 됐다고 비판했다. 엘 시스테마가 차베스 정권의 권력 유지를 돕는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국내에서 내한 공연을 가진 바 있는 피아니스트 가브리엘라 몬테로는 음악계에서 일찌감치 엘 시스테마를 비판한 인물이다. 내한공연을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도 얼굴을 알린 몬테로는 차베스 대통령이 2009년 대통령 연임 제한 폐지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통과시킨 이후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진실을 알리는 것은 예술가의 의무지만 아브레우와 두다멜이 차베스의 독재를 모른 척한다”고 지적했다.

차베스는 원래 집권 초기엔 엘 시스테마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반미-반서구를 표방했던 만큼 유럽 문화의 유산인 클래식 음악을 가르치는 엘 시스테마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래서 1999년 2월 취임 이후 엘 시스테마 지원 중단을 검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빈곤 퇴치와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부흥의 수단이자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 된다고 판단해 지원을 계속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엘 시스테마를 다룬 다큐멘터리

나아가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의 해외 공연을 늘리거나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음악가들을 초청해 엘 시스테마를 해외에 알리는 데 집중했다. 이런 전략의 일환으로 2004년 다큐멘터리 <연주하고 싸워라>를 시작으로 엘 시스테마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TV 프로그램 등이 속속 만들어졌다. 차베스는 2007년 아브레우와 함께 직접 TV에 출연해 엘 시스테마를 통한 정부의 음악 교육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아브레우와 두다멜은 차베스와 관련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받을 때마다 원론적인 이야기만 언급했다. 해외에서 비판받았던 개헌 관련 국민투표에 대해 아브레우는 “베네수엘라에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투표가 이뤄진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나는 정치적 압력을 느껴본 적 없다”면서 “엘 시스테마와 국가의 관계는 매우 간단하다. 우리 아이들이 음악 교육을 받을 권리, 즉 헌법상 부여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두다멜 역시 RCTV를 폐쇄하고 설립된 공영방송에서 축하연주를 한 것에 대해 “나의 음악은 모든 베네수엘라를 위해 연주되었다. 우리 오케스트라는 국민으로서 국가를 위해 최고를 보여줘야 한다”면서 “엘 시스테마는 아이들에게 음악 교육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엘 시스테마에 대해) 정치화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아브레우와 두다멜의 애매한 태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 엘 시스테마를 확장시키는 것이 두 사람의 주요 관심사인 만큼 정치와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차베스 이전 6개 정부 시절에도 두 사람은 엘 시스테마를 위해서라면 국가 행사에 참가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모이스 나임 전 베네수엘라 산업통상부 장관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베네수엘라에서 엘 시스테마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수장(아브레우)이 정부나 정치와 관련해 침묵을 지키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아브레우와 두다멜의 독재 정권 옹호 논란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와 함께 예술과 정치는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는가, 예술가들은 그들이 동의하지 않는 정치를 비난해야 하는가, 예술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존속되어야 하는가 등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오랜 질문을 다시금 사람들에게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엘 시스테마와 관련해 격렬한 찬반 논쟁이 일어난 것은 2010년대 들어서부터다. 2012년 런던 현대음악 페스티벌 예술감독 겸 잡지 <스펙테이터>의 예술 부문 에디터인 이고르 토로니-랄릭은 잡지 <클래시컬 뮤직>에서 2회에 걸친 기사를 통해 엘 시스테마가 차베스 정권의 선전도구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빈민층 청소년 구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차베스 정권에 대한 아브레우와 두다멜의 태도야 그렇다 하더라도 음악 교육을 통해 빈민층 청소년을 빈곤과 범죄로부터 구한다는 엘 시스테마의 기본 미션을 의심한 것이다. 토로니-랄릭은 엘 시스테마를 아예 ‘조작’ ‘사기’라고까지 비난했다.

그는 차베스 정권이 엘 시스테마로 대표되는 예술 교육을 통해 국민들의 투쟁 정신과 비판적 사고를 무디게 만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엘 시스테마가 실제로 사회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었다는 실제적 증거는 없다면서, 예술 단체가 긍정적인 사회적 성과를 보여줘야만 공공기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되물었다. 또한 공공 교육이 된 엘 시스테마가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음악 수업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사회적 이익을 목표로 한다면 비용 대비 면에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토로니-랄릭은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대한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과 지원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동안 아름답게만 포장됐던 엘 시스테마를 좀 더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의 글은 상당히 감정적이고 논리적인 근거가 빈약해 적지 않은 반박에 직면했다.

엘 시스테마 지지자들은 우선 아이들에 대한 음악 교육은 전혀 강압적이지 않다면서, 서양인의 시선에서 중남미 아이들과 클래식 음악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적 성과와 관련해 그동안 엘 시스테마에 나온 다큐멘터리들 안에 나오는 사례들 외에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빈곤층 아이들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반박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개발을 목표로 설립된 미주개발은행의 조사 자료는 토로니-랄릭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많이 이용됐다. 차베스 정권 출범 이전인 1998년부터 엘 시스테마를 부분적으로 지원해온 미주개발은행은 2007년 1억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당시 결정의 근거는 엘 시스테마를 통해 음악 교육을 접한 학생들의 범죄율과 학교 중퇴율이 현저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엘 시스테마의 효과를 평가하기 위해 26개 지표를 조사했는데, 엘 시스테마에 1달러를 투자하면 베네수엘라에 결과적으로 1.68달러의 이익이 되돌아온다고 판단했다.

엘 시스테마 논란을 폭발시킨 조프리 베이커 박사의 책

토로니-랄릭 이후 소강상태였던 엘 시스테마 논란은 2014년 11월 영국 런던 로열 홀로웨이 대학 음악학과 교수인 조프리 베이커 박사가 출간한 책 『El Sistema: Orchestrating Venezuela’s Youth(엘 시스테마: 베네수엘라 청소년을 조직하기)』를 계기로 폭발했다. 그는 책 출판을 앞두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게재한 칼럼에서 “엘 시스테마의 장밋빛 이미지에 영감을 받아 이를 연구하기 위해 베네수엘라로 갔다가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앞서 엘 시스테마에 대한 비판이 간간이 나오긴 했지만 학계의 전문 연구자가 현지 조사와 참가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베이커가 처음이었다.

베이커는 엘 시스테마를 설립한 아브레우가 박애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설립했으며 운영 방식도 독재적이었다고 비판했다. 현지에서 엘 시스테마의 간판인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는 ‘베네수엘라의 노예 오케스트라’로도 불렸으며, 해외 후원금의 사용도 불투명했지만 누구도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 또한 엘 시스테마가 자랑하는 오케스트라를 통한 ‘또래 학습’이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의 폭력, 성추행 사건 등의 어두운 면도 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베이커는 엘 시스테마의 근간인 ‘빈곤층 청소년 구제’가 사실과 다르다고 비판했다. 적어도 엘 시스테마가 처음 생겼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정권 시절엔 아브레우가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한 적이 없으며, 차베스 정권부터 그런 방향성이 확실해졌다는 것이다. 아브레우는 처음엔 순수한 오케스트라 활동의 일환으로 시작했다. 음악 애호가였던 그는 전문 연주자들이 음악학교를 나온 뒤 자리를 잡지 못하는 베네수엘라의 열악한 음악계를 바꾸고 싶어 했다. 실제로 아브레우가 1975년 2월 12일 오케스트라 단원 공모를 보고 처음 찾아왔던 11명은 음악학교 졸업생이거나 학생이었다. 그리고 두 달여 뒤인 4월 30일 첫 콘서트를 할 때는 단원이 80명까지 늘었는데, 아브레우가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빼왔다고 한다. 아브레우는 또 그 해 7월 멕시코와 8월 콜롬비아에서 콘서트를 가졌는데, 해외에서의 성공 소식이 국내에서 오케스트라에 대한 지원을 받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레우는 이후에도 오케스트라의 해외 연주 투어에 적극적이었으며, 엘 시스테마를 홍보할 때 적극 활용했다.

오케스트라를 각지에 설립하려면 청소년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정치적·사회적 승인을 얻기 쉽기 때문에 아브레우가 빈곤과 범죄 예방 효과를 점차 강조하게 됐다는 게 베이커의 지적이다. 그는 또 베네수엘라 정부가 발표한 경제적 효과가 전혀 검증되지 않았으며, 엘 시스테마가 빈곤 대책을 내세우지만 실체는 중산층 이상을 위한 활동이라고 지적했다. 엘 시스테마 수혜자의 90%가 빈곤층 청소년으로 알려졌지만 베이커의 조사 결과 중산층 이상이 절반이 넘었다. 실제로 빈곤층이 많은 다수의 하급 오케스트라 덕분에 엘 시스테마가 지원을 받지만, 가장 많은 기금과 하이라이트를 받는 상급 오케스트라는 거의 중산층 출신으로 구성돼 있다. 빈곤층의 경우 음악을 시작했다가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두다멜을 비롯해 해외에서 활동하는 베네수엘라 음악가들도 중산층 출신이다.

베이커의 책은 출간과 동시에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앞서 토로니-랄릭 때와 달리 충실한 현장 조사를 토대로 썼기 때문에 높은 지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 엘 시스테마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행정적 허술함을 인정하면서도 엘 시스테마가 사회에 끼친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특히 아브레우의 평소 지론인 “빈곤층 청소년들이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 무명성을 극복하고 풍부한 정신성을 획득할 수 있다”면서 엘 시스테마가 빈곤층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부각했다.

베이커는 끝으로 책에서 엘 시스테마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봤다. 베네수엘라에서의 성공을 토대로 많은 국가들에게 오케스트라 운동이 퍼지고 있지만, 베네수엘라 외에서는 국가적 시스템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봤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마이너 장르에 국가가 나서서 지원한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이해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차베스 독재 정권이 막대한 석유 수입을 토대로 국민에게 토지·의료·교육·식료품을 무상 제공하는 등 극단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유가 문제로 베네수엘라 경제가 어려워지면 엘 시스테마에 대한 지원도 바로 축소될 것으로 전망했다.

게다가 베이커는 아브레우처럼 음악을 이해하면서도 신념, 정치력, 인맥, 수완 등을 고도로 겸비한 카리스마 지도자가 다른 나라에서 나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책을 쓸 때 이미 고령이었던 아브레우가 타계할 경우 엘 시스테마를 이을 후계자가 있을지도 우려했다. 아브레우 같은 수완가가 아니면 앞으로 다가올 다양한 사회정치적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베이커의 우려는 맞았다. 2013년 차베스가 암으로 사망한 후 마두로가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엘 시스테마도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를 계승한 마두로는 석유 수입을 산업과 인프라 등에 투자하기보다는 무상복지제도를 늘리는 포퓰리즘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그런데, 2014년 중반 배럴당 100달러대이던 국제유가가 2015년 배럴당 20~30달러대로 폭락하면서 국가 재정의 95%를 원유 수출에 의존해온 베네수엘라는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마두로가 재원 마련을 위해 돈을 마구 찍어내면서 초인플레이션의 지옥에 빠진 것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무려 160만%였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조국을 등지기 시작해 최근 5년간 전체 인구의 11%인 340만 명이 외국으로 떠났다.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두다멜은 2016년까지만 해도 베네수엘라 정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2014년 2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엘 시스테마 40주년 기념 콘서트를 앞두고 미국 언론은 마두로 참석이 발표되자 두다멜에게 지휘를 포기할 것을 권했다. 당시 두다멜이 지휘하는 LA필 공연을 앞두고 시위까지 열렸지만 두다멜은 참석을 택했다.

지난 2019년 3월 내한한 두다멜|마스트미디어

두다멜이 마두로 정권과 각을 세우게 된 것은 2017년 5월 초 카라카스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서 엘 시스테마의 학생이 진압 과정 중 총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다. 마두로는 집권 연장을 위해 자신을 지지하는 제헌 의회를 구성해 개헌을 밀어붙였고, 국민의 반발을 강경 진압했다가 대규모 유혈 사태를 촉발했다. 그동안 베네수엘라의 심각한 경제난과 정정불안에도 침묵을 지켜왔던 두다멜은 마침내 베네수엘라 정부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나 기고에서 “폭력에 반대하며 모든 종류의 억압에 반대한다. 유혈사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서 “민주주의는 특정 정부의 필요에 맞춰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양심과 헌법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을 바탕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 언론은 두다멜이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두다멜의 비판에 대해 당시 마두로는 TV에서 “당신이 정치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하지만, 윤리의식을 갖고 행동해야지 자신을 기만하면 안 된다”면서 독설을 퍼부었다. 이후 두다멜과 베네수엘라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베네수엘라 오케스트라들의 해외 투어 공연은 모두 취소됐다. 베네수엘라 오케스트라들은 그동안 해외 투어 공연을 하면서 엘 시스테마 출신 간판 스타인 두다멜에게 지휘봉을 맡겨왔지만, 두다멜이 베네수엘라 입국 금지 리스트에 오르면서 모든 것이 중단됐다.

지난 2018년 3월 아브레우가 타계하면서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의 혼란과 맞물려 무기력한 상태다. 아브레우의 후임으로 변호사 출신이며 15년간 엘 시스테마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아온 에두아르도 멘데즈가 대표가 됐다. 엘 시스테마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했던 그는 취임 직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수천 명의 아브레우를 양성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의 업적(젊은 음악가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오케스트라 시스템의 독창성과 자발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두다멜은 엘 시스테마에서 아브레우가 임명한 음악감독으로 아직 그만둔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조만간 두다멜이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베네수엘라 오케스트라들을 이끌고 해외에서 공연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상황이 계속 악화돼서 멘데즈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란 어려워 보인다. 멘데즈가 지난해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경제 위기로 인해 스타 연주자의 상당수와 음악 교사의 8%가 베네수엘라를 떠났다. 특히 엘 시스테마의 간판이던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도 단원의 40%가 베네수엘라를 떠났다. 아마도 엘 시스테마에 참여하던 어린 학생들도 부모와 함께 베네수엘라를 떠났거나 식량난 등 각종 문제 때문에 제대로 수업이나 연습에 참여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는 여전히 ‘클래식계의 기적’으로 알려져 있는 엘 시스테마는 현재 백척간두의 위기 상태다.

공연 칼럼니스트 장지영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성균관대 공연예술협동과정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한국기자협회 지원으로 일본 도쿄대학대학원 문화자원학과에서 연수했다. 1997년 국민일보에 입사해 문화부 스포츠부 사회부 국제부 등 여러 부서를 거쳤다. 2003년 문화부에서 처음 공연을 담당하면서 공연계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기자로서만이 아니라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재밌게, 재밌는 것을 진지하게, 진지한 것을 유쾌하게, 그리고 유쾌한 것을 어디까지나 유쾌하게”라는 일본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격언을 따르려고 노력 중이다.

<장지영 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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