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참 쉽죠?” 라고 위로하던 밥 아저씨가 그립다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0.06.05 10:44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0.06.05 10:55

무심한 듯 눌러찍는 붓질은 기본,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긁어내는 나이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주시하다 보면 어느새 완성된 그림. 그것도 매번, 반복해서! 밥 로스, 아니 밥 아저씨 하면 떠오르는 나의 어린 시절 한 페이지다.

EBS ‘그림을 그립시다’

밥 로스. 트레이드마크인 파마머리와 덥수룩한 수염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그는 1983년부터 1994년까지 11년간 미국 PBS 방송의 ‘The Joy of Painting’을 진행한 화가다. 밥은 이 프로그램에서 마르지 않은 물감 위에 다시 물감을 덧칠하는 이른바 ‘wet-on-wet’ 화법으로 풍경화를 그렸다. 미술계의 반응과 달리 ‘누구나 쉽고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그림을 그리자’는 그의 모토는 대중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4년 ‘그림을 그립시다(EBS)’라는 제목으로 시청자들을 만났는데, 성우 김세한의 목소리로 방송됐음에도 밥의 매력이나 온화한 성품은 ‘더빙’ 되지 않았다. “실수한 것이 아니에요. 행복한 사고가 일어난 것이죠(We don‘t make mistakes. We have happy little accidents)”와 같은 주옥같은 명언도 오래도록 회자됐다.

‘The Joy of Painting’을 진행하며 팬덤을 형성한 화가 밥 로스. ⓒ Gettyimages Korea

그러나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 것만 같았던 밥은 1995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악성림프종이었다. 이후 아들인 스티브 로스가 아버지의 화법을 배워 후임자로 나섰지만 명성을 이어가진 못했다.

생전 그가 남긴 3만여 점의 그림도 그리움을 달래주지 못했다. 관람 자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을 관리하는 밥 로스 재단에서는 그의 그림을 유통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이례적으로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밥 로스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당시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재단의 코왈스키 회장은 앞으로도 그림을 판매할 계획이 없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하면 쉽고 재미있게 그림을 알려줄지에만 관심이 있었던 밥의 생각을 따른 것이라고.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의 영상들이 유튜브 채널에서 부활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밥 로스의 채널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소리 콘텐츠로 각광받았다. 차분한 그의 목소리와 캔버스를 오가는 붓의 서걱거림이 ASMR로 최적이었던 것. 2020년 5월 현재 그는 3백95만 명의 구독자를 둔, 세대를 넘나드는 호감형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화면 밖에서 보여준 행동들을 비춰봤을 때 말이다.

“참 쉽죠?(That easy?)”

누가 봐도 쉽지 않은 상황에 왜 하필 이런 질문을 툭, 하고 건네는지 과거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이 말이 얼마나 든든한 응원이었는지 깨닫는다. 밥의 수다에는 ‘너도 할 수 있다’라는 따뜻한 다독임이 녹아있다. 힘든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는 위로가 숨어있다.

코로나19로 ‘집콕’ 생활이 길어지면서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취미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답답함으로 차오른 당신의 마음을 녹여줄 아날로그 감성을 소개한다. 그 시절, 우리들의 밥 아저씨.

Bob Ross Channel Trailer

Bob Ross - A Walk in the Woods (Season 1 Episode 1)

Bob Ross - Meadow Lake (Season 2 Episode 1)

더불어 번외 편으로 준비했다. 일명 밥 로스의 TMI(Too Much Information).

밥은 20년간 미 공군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특히 알래스카 기지에서 복무하며 눈에 담아둔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만의 풍경화를 완성하는 밑거름이 됐다. 번개처럼 빠른 붓놀림과 대비되는 조용한 말투와 느긋한 태도는 사실 밥이 의도한 것이라고 한다. 툭하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상사를 보면서 전역 후 남은 삶은 부드럽게 살겠노라 맹세했다고.

밥 역시 모델로 삼은 ‘선배’ 방송인이 있었다. 바로 독일의 화가 빌 알렉산더다. 빌은 ‘유화의 마법’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밥은 그의 영상을 참고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의 영상을 비교해 보면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구석이 있다.

놀.랍.게.도 밥은 생머리였다. 유명세를 치르기 전까지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다. 미용실에 자주 갈 형편이 되지 못해 강력한 펌을 했으나 이후 이 헤어스타일이 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면서 의지와 상관없이 이를 유지하게 됐다고. 또 주로 상체 클로즈업으로 방송이나 사진 촬영에 임해 그가 장신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은데, 기록에 따르면 그의 키는 188cm다.

유난히 동물을 사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다친 동물들을 수이 지나치지 못했던 그는 성인이 된 뒤에도 새, 다람쥐, 뱀, 악어 등 다양한 동물들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의 친구들은 방송에도 종종 출연했는데, 이중 가장 인기가 있는 동물은 셔츠 주머니에서 ‘깜짝’ 등장한 청설모였다. 반면 그의 그림에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가 그린 집에는 굴뚝이 없거나, 있다 해도 연기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이 머물지 않는 집임을 의미한다.

색맹이라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시청자의 고민에 단 하나의 색으로 채워진 멋진 그림을 완성해 감탄을 자아낸 에피소드가 있다. 밥은 이 과정을 통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 역시 어린 시절 목공 작업 중 사고로 왼쪽 검지의 일부를 잃었다. 방송에서는 주로 왼손으로 팔레트를 들어 잘 보이지 않지만 붓을 내려놓고 특유의 수다를 이어갈 때 종종 카메라에 잡히곤 했다. 물론 이 장애는 그의 다작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The Joy of Painting’ 프로그램은 총 31시즌이었다. 각 시즌은 13회로 구성돼 있는데 밥은 보통 한 시즌을 이틀 동안 몰아 촬영했다고 한다. 1회 방송은 30분 남짓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방송으로 돈을 벌진 않았다. 자신이 사용하는 미술용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수익을 남겼을 뿐이다.

참고 |응팔 세대의 그림 선생님, 밥 로스의 ‘부활’
밥로스! 시청자들이 몰랐던 사실 Top10(와치모조 코리아)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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