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22역까지? 이규형·정상훈...뮤지컬 ‘멀티맨’의 계보

김효정 공연 칼럼니스트
입력2019.01.03 11:21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01.03 16:57

뮤지컬 멀티맨의 계보

지난 12월 27일 한국뮤지컬어워즈 사무국은 ‘제3회 한국뮤지컬어워즈’ 후보를 발표했다. 일 년간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여러 작품들이 다양한 부문에 올라 축하를 받았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같은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한 작품의 식구들. 멀티캐스팅이 많은 요즘이지만, 그럼에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한 부문에 작품당 한 배우가 노미네이트되는 것이 통상적이다.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 편>에서 다이스퀴스 역할로 1인 9역을 소화해내고 있는 배우 이규형과 한지상. 많은 스태프들이 준비하기 때문에 다른 캐릭터로 바뀌는 퀵 체인지가 10초면 가능하다고. | 쇼노트

그러나 이번 어워즈에서는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편>에서 코믹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한지상과 이규형이 함께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두 사람은 극의 전반을 이끌어가는 ‘다이스퀴스’ 역을 맡았는데, 이 캐릭터는 다이스퀴스 가문의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는 1인 9역의 어려운 배역이다.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에서도 다이스퀴스를 연기한 배우 제퍼슨 메이스 역시 극찬을 받으며, 드라마데스크어워즈, 외부비평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그는 함께 무대에 선 몬티 역의 브라이스 핑크햄과 함께 토니어워즈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는데, 국내에서는 다이스퀴스 역이 조연으로 올라온 것과 비교해보면 선정 기준에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한지상과 이규형이 동시에 한 배역으로 노미네이트된 것은 일인 다역을 충분히 잘 소화했기 때문이다. 1인 9역의 다이스퀴스 역은 브로드웨이 버전을 디벨롭 할 때도 제퍼슨 메이스가 시작부터 함께 할 정도로 어려운 역할이었다. 개발과정에서 다른 캐스트들은 모두 바뀌었지만, 처음부터 함께했던 제퍼슨 메이스는 그가 아니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배역을 잘 소화해냈다.

이처럼 한 작품에서 여러 가지 배역을 맡는 것은 무대에서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장르로 치면 뮤지컬 코미디에서, 그리고 배역으로는 주로 앙상블이나 조연 같은 경우에 다역을 선보이는 일이 잦다.

TV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는 주로 인격장애나 복수, 사이코 캐릭터를 연기할 때 일인 다역이 등장하기도 한다. 드라마 <킬미힐미> <아내의 유혹>, 영화 <23아이덴티티> <월요일이 사라졌다> 등에서 주연 배우들이 역량을 발휘하며 극을 이끌었다.

뮤지컬 <김종욱 찾기>는 한때 멀티맨 붐을 일으킨 시초였다. | CJ ENM

그렇다면 그간 뮤지컬에서 일인 다역이 주목받았던 작품은 또 무엇이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배역 이름 자체가 ‘멀티맨’이었던 뮤지컬 <김종욱 찾기>이다. <김종욱 찾기> 속 멀티맨은 무려 22개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극의 감초를 담당한다. 작품 속에서 웃음과 템포를 도맡는 핵심 포인트로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2005년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배우 김태한, 전진오(전병욱), 김남호, 박정표, 원종환, 라준, 조휘, 정상훈, 최호중, 진선규, 임기홍, 김민건, 육현욱, 최성원, 최연동, 이동재, 박세욱 등 수많은 멀티맨이 작품을 거쳐 갔다. 그중에서도 탁월하게 눈에 띈 배우는 김태한, 전진오, 정상훈, 임기홍이다.

김태한은 한예종에서 학교 공연했을 당시부터 작품에 참여해 초대 멀티맨으로 알려져 있다. 전진오(전병욱)는 <김종욱 찾기>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엄기준, 오만석, 오나라와 함께 무대에서 합을 맞춘 멀티맨이다. 지금은 ‘양꼬치엔 칭타오’로 잘 알려진 배우 정상훈 역시 코믹하고 센스 넘치는 멀티맨으로 주목받았다. 이미지가 쌓여서인지 멀티맨이라고 하면 탁하고 떠오르는 이들은, 이후 작품에서도 꽤나 많은 멀티롤을 제안받았고, 본인들의 매력을 뽐내며 여러 작품에서 연기를 보여주었다. 뮤지컬이 영화화되었을 때, 멀티맨의 역은 어떻게 될지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는데, 영화 속에서는 아쉽지만 볼 수 없었다. 대신 무대에 섰던 주연배우들이 카메오로 출연해 화제가 되었다.

2004년부터 국내 초연되어 2018년까지 꾸준히 사랑받아온 뮤지컬 <아이러브유> 역시 출연하는 4명의 배우가 60개의 배역을 연기해야 하는 작품이다.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옴니버스 형태로 묶은 극이기 때문에, 극 중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남자 1, 여자 2 이런 식으로만 정해져 있다. 남녀의 첫 만남부터 연애, 결혼, 육아, 황혼 등 다양한 군상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사랑이라는 주제로 엮어진 레뷔 뮤지컬로 남경주, 정성화, 최정원 등 뮤지컬계의 대선배들부터 이충주, 조형균, 정욱진, 이지수, 간미연 등 떠오르는 실력파 신예들까지 출연한 작품이다. 이처럼 2000년대 중반 관객들에게 입소문이 난 소극장 로맨틱 코미디 위주의 작품들은 간결한 세트와 멀티맨이 극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뮤지컬 <구텐버그> | 쇼노트

2000년대 중·후반부터 창작산실, CJ 아지트 등 다양한 창작 뮤지컬 지원 사업이 등장하면서, 한국 뮤지컬의 지형이 조금씩 바뀐다. 그간 대세를 이루었던 로코물 중심에서 보다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대거 등장할 수 있었다. 또한, 라이선스 뮤지컬 경쟁이 심화되면서 많은 라이선스 작품들이 실시간으로 한국에 들어오며, 이른바 다양성의 시대로 진입하였다.

뮤지컬 <마마, 돈크라이> | 알앤디웍스

뮤지컬 <구텐버그>와 뮤지컬 <마마, 돈크라이>는 단 2명만이 출연하는 작품이다. <구텐버그>는 브로드웨이에 공연을 올리기 위해 리딩 공연을 직접 연기하는 작가 더그와 버드의 이야기로, 극중극으로 등장하는 작품 속 수많은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모자에 역할 이름을 써 계속 바꿔 쓰며 연기를 한다. <마마, 돈 크라이> 역시 2인 극으로 저명한 물리학자 프로페서 V가 타임머신을 개발해 시간 여행을 떠나, 드라큘라 백작을 만나고 뱀파이어가 되어 사랑과 저주를 얻는 이야기를 다룬다. 프로페서 V는 상실감에 빠진 어머니를 위로하는 소년, 사랑 앞에 숙맥인 청년 등으로 분하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초연에서는 모노 뮤지컬로 제작되었지만, 2013년 재연에서부터 2인 극으로 자리 잡으며, 뮤지컬 마니아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는 작품이 되었다. 고영빈, 이창엽, 김호영, 송용진, 허규 등 대학로에서 핫한 배우들이 작품에 출연해왔다. 가장 최근 시즌에 출연한 배우 이승헌과 하경은 이 작품을 통해 한국뮤지컬어워즈 남자 신인상에 함께 노미네이트되었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 뉴컨텐츠컴퍼니

소극장에서 주로 멀티롤이 필요했다면, 최근엔 스케일이 더 커져, 전 배역이 멀티 역을 맡는 대극장 공연들이 생겼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주연배우 11인이 모두 1인 2역을 연기하며 2막에서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주인공 앙리가 괴물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빅터 프랑켄슈타인, 줄리아, 엘렌, 슈테판, 룽게 등 극을 이끌어 가는 인물들이 2막에서는 180도 변신하여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뮤지컬 <타이타닉>은 전 캐스트가 멀티맨이 되어 최대 1인 5역까지 선보였다. 배 안을 묘사한 열린 구조의 무대디자인이 화제가 되었다. | 오디컴퍼니

뮤지컬 <타이타닉> 역시 27명의 출연자들이 대부분 여러 캐릭터를 소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 타이타닉에 탔던 대단한 규모의 인원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들은 1등실 부자부터 3등실 청년을 비롯한 배 곳곳의 승무원과 크루들이 되기도 한다. 워낙 모든 출연진이 2인부터 5인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내야 하기 때문에 퀵 체인지를 위한 무대디자인도 돋보였던 작품이다. 아무리 무대에 선 경력이 오래된 베테랑이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두 작품은 모두 극 중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멀티롤을 연출적으로 사용하였다.

이제는 극장 규모를 막론, 주·조연, 앙상블을 따지지 않고, 작품에 효과적으로 필요하다면 멀티맨들이 언제든지 등장한다. 멀티롤은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과 퀵 체인지를 위한 무대, 의상, 분장 등 새로운 장치들이 더해졌을 때 위화감 없이 자연스레 관객들에게 어필될 수 있다. 세계 어느 시장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한국뮤지컬계에 멀티맨이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역량 있는 좋은 배우와 스태프들이 많아졌다는 반증은 아닐까.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2018. 11. 9 ~ 2019.1. 27
R석 11만원, S석 8만8천원, A석 6만6천원
약 150분 (인터미션 15분 포함)
8세 이상 관람가
출연
김동완, 유연석, 서경수, 오만석, 한지상, 이규형, 임소하, 김아선, 김현진 등

<김효정 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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