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 아닌 예술가의 길 걷고파”, ‘팬텀싱어’ 손혜수의 음악 인생

올댓아트 김예림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0.05.02 13:34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0.05.02 13:38

한국판 ‘일 디보’, 크로스오버 남성 중창팀을 선발하기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가 시즌 3로 돌아왔다. ‘크로스오버’는 성악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대중가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까지 발 뻗은 음악이다. <팬텀싱어> 안방극장 첫 등장 반응은 어땠을까. 매력 있는 참가자들은 달콤한 노래로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이도 저도 아닌 음악이 나올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를 단숨에 잠재웠다.

시즌 1, 2 우승팀 ‘포르테 디 콰트로’, ‘포레스텔라’의 순회공연은 연일 매진이다. 전공도, 창법도 각기 다른 다양한 참가자들을 선발해 조화를 이뤄 낸 프로듀서(심사위원)들 중 유일한 성악가, 베이스 손혜수에게 관심이 향하는 건 당연지사다.

베이스 손혜수ㅣ아트앤아티스트

베이스 손혜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정통 오페라 가수다. 서울대 음대 졸업, 독일 유학 이후 프랑스 마르세이유 콩쿠르, 마리아칼라스 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모차르트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 우승을 차지했다. 세계적인 콩쿠르를 휩쓸며 일찍이 큰 주목을 받은 그는 독일의 가장 오래된 극장 함부르크 슈타츠오퍼를 비롯해 비스바덴, 뉘른베르크 등 독일 대표 국공립 극장에서 주역 배우로 활동했다. 이처럼 한평생 정통 성악의 길을 걸었던 손혜수가 ‘크로스오버’라는 장르를 통해 대중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온 이유는 무엇일까.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실험 정신으로? 베일에 싸인 듯한 손혜수의 생각을 어렴풋이 그려보며 그를 맞이했다. 손혜수는 유쾌하고 호탕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팬텀싱어>와 손혜수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팬텀싱어3>의 첫 방송이 연기됐다. 촬영 현장은 어땠나.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이 있었나?

출연진과 스태프, 모든 관계자들이 긴장하며 촬영을 했다. 매니저도 촬영장에 들어오지 못했다. 다소 살벌한 분위기로 조심스레 진행하고 있다.

정통 클래식 가수로서 크로스오버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 출연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 같다. 부담을 느끼진 않았나.

오히려 심사하는 입장인 나보다는, 참가자들이 더 어려웠을 것 같다. 특히 성악을 전공한 참가자들의 경우엔 더 그렇다. 클래식 음악계는 보수적이기 때문에, 참가자들이 크로스오버 음악으로 경력을 시작하는 데엔 많은 부담이 따른다.

따듯하고 세심한 심사평이 화제였다. <팬텀싱어>에서 심사할 때 중점으로 보는 부분은 무엇인가?

프로듀서 중에선 내가 유일한 성악가이다. 그러다보니 발성과 테크닉적인 면을 전문성 있게 보고 심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호흡과 근육을 사용하고 성대를 움직여 소리를 내는 것은 어느 장르든 똑같으나, 성악은 마이크의 유무와 관계없이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참가자들에게 올바른 발성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지난 두 시즌에서 심사한 것을 보았을 때, 성악이 아닌 분야에서 온 참가자를 선정하는 등 진중하면서도 과감한 면모를 보였다. 평소 클래식이 아닌 다른 장르의 음악에도 관심이 있었나?

당연하다. 누구나 그럴 거다. 서로 다른 장르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다른 장르의 음악에서 유연성을 가져올 때도 있다. 성악은 딱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중가요는 상대적으로 편안한 분위기가 있지 않나. 관심은 많지만 평소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은 아니다. <팬텀싱어> 촬영은 10시간이 넘어갈 때도 있고, 개인 연습도 해야 하고, 공연이 있으면 더 바쁘다. 하루가 너무 바쁘다 보니 오히려 음악을 멀리하고 쉴 때도 많다.

베이스 손혜수ㅣ아트앤아티스트

<팬텀싱어> 출연 후 일상에서 달라진 점이 있는가?

정말 신기하게도, 있다. 설렁탕집에서 만두가 공짜로 나온다거나, 치킨 집에서 떡볶이가 나올 때도 있었다(웃음). <팬텀싱어> 시즌 2 이후로 지금의 방송까지 공백이 꽤 있었는데도 알아봐 주시더라. 얼마 전엔 심사 차 제주도를 방문했었다. 카페에서 음료를 시키고 기다리는데 사장님이 나오시더니 팬이라며 빵을 주셨다. 방심하고 있을 때 알아보셨다. 신기하고, 감사하다.

방송에서 비친 모습보다 훨씬 유연한 것 같다.

나는 ‘릴렉스’ 되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방송엔 심사자로 출연하는 거니까, 최대한 진중하고 공정한 모습을 보이려고 한다. 일반적인 성악 콩쿠르에선 최고 점수와 최저 점수를 제한하고 점수의 편차를 줄이기 위해 심사 점수 폭도 정해 놓는데, <팬텀싱어> 초기에 제작진들에게 이 부분을 반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대한 공정히 심사하기 위해서다. 꼼꼼한 모습을 보여서 그런지 ‘돌 부처’라는 표현을 듣기도 하지만 그게 내 일상 모습은 아니다.

<팬텀싱어>가 클래식 음악계에, 그치고 대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는가.

대중들에게는 ‘성악은 달콤한 음악 장르’라는 인식을 심어줄 것이고, 성악가들에게는 활동의 폭을 넓혀줄 것이다. 크로스오버 무대를 통해 성악의 짜릿한 맛을 본 사람들이 정통 클래식 공연까지 찾는다면, <팬텀싱어>란 프로그램이 결국 클래식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성악가들은 끼가 많다. 대부분의 성악가들은 예능의 피가 흐른다. 말도 잘 하고, 긴 유학 생활로 인해 요리도 잘한다. 그런 면에서는 <팬텀싱어>가 음악가들이 예능인으로서 활동할 기회도 제공할 것이라 본다.

■베이스 손혜수

일찍이 국내 콩쿠르는 물론 마르세유, 모차르트, 마리아 칼라스 콩쿠르에서 차례로 우승했다. 큰 무대에 설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는가?

가장 중요한 건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무대에 서는 일이란 쉬운 것이 아니다. 단 한 번도 내 공연에 만족한 적이 없다. 그러나 무대에 올라있는 그 순간 만큼은 내가 최고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다. 학부생 시절 중앙 콩쿠르에서 1위를 한 날, 본선 무대에 서기 전 했던 말이 있다. 내가 제일 마지막 순서였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에 오를 때 “자, 일등 하러 가볼까”라고 했다. 내가 거만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 깜냥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무대에서만큼은 자신이 최고라는 사실을상기하는 것. 그게 나의 멘탈 관리 비법이다.

졸업 후 떠난 독일에서 극장 가수로 활동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극장 솔리스트’는 생소하다. 어떤 시스템인가?

축구에 ‘리그’라는 것이 있지 않나. 각 지역마다 축구 팀이 있듯,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대부분의 지역마다 오페라, 발레, 연극, 뮤지컬을 올리는 극장이 있다. ‘극장 가수’는, 말하자면 극장이 직장인 거다. 매일 출근해서 연습하고, 극장에서 올리는 오페라 무대에 주·조연으로 연기하면서 페이를 받는 시스템이다. 가수마다 계약 조건이 다르고, 공연 횟수가 다르다. 물론 연륜이 쌓이고 실력이 향상될수록 적은 공연으로 많은 보수를 받는다.

베이스 손혜수의 공연 모습ㅣ아트앤아티스트

문화가 다른 곳에서 공부하고, 음악을 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독일과 독일 극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땠나?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전반적으로 ‘딱딱하다’인데, 그렇지 않다. 극장 관계자들은 생각보다 유연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공연하기 위해선 극장 측에서 양해 해주어야 한다. 한국 공연을 가기 위해 “지금 거의 굶을 지경이다. 한국에 가야 고기도 먹고 더 잘 노래할 수 있지 않겠냐!”라고 호소한 적도 있다. 그러자 이해 해줬다(웃음).

졸업 후 타국에서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학 길에 오르는 후배 성악도들과 세계 무대를 꿈꾸는 음악가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택하면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문구가 있다. 나도 동감한다. 그래도 현실은 냉혹하다. 누구보다 단단해야 하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연기 연습을 혹독하게 해라’라는 말이다. 노래 실력으로는 한국 성악가들이 최고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연기를 연습하지 않는다. 외국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제스처를 쓰고 다양한 표정을 쓰는 등 연기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라왔지만, 한국인은 그런 경험이 상대적으로 덜 하다. 나는 대학생 때 도서관에서 DVD를 빌려 성악가들이 무대에서 어떻게 연기하는지 연구했다. 이런 연습과 공부들이 유학 생활과 무대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

베이스 손혜수가 공연한 극장ㅣ아트앤아티스트

안정적인 극장을 떠나 프리랜서의 길을 택했다.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컸을 것 같다. 프리랜서 가수의 삶은 어떤가.

독일 무대에 서는 동안에도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극장 가수 시절에도 최대한 한국 공연을 많이 하려 노력했다. 자녀의 성장 환경 이유도 있고,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었던 평상시 바람으로 프리랜서의 길을 택했다. 프리랜서는 정신력이 강해야 한다. 전 세계가 내 무대지만, 집을 몇 년 떠나야 하는 삶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다. 무대에서 행복하게 노래하면서도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전 세계가 무대’라는 말은, 달리 말해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삶이라는 건데. 슬럼프에 빠지거나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 때 어떻게 극복했나.

나 자신이 흔들릴 때마다,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노래를 하나’, ‘나는 지금 즐거운가’라는 의문을 되뇐다. 그런 근본적인 질문들을 생각하고, 답을 내리려는 과정에서 내 직업의 확신과 사명을 상기한다. 깊은 명상 끝에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회복되면 다시 괜찮아지더라.

평상시 스트레스 극복 방법은 무엇인가? 그 활동이 본인의 음악과 소리에 영향을 미치는가?

책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한다. 하지만 운동만큼 좋은 취미는 없는 것 같다. 운동을 하면 정신도 환기가 되고, 체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 성악가는 결국 체력 싸움이다.

베이스 손혜수 공연 실황ㅣ아트앤아티스트

모차르트부터 바그너까지 다양한 오페라 레퍼토리를 소화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 배역이 있는가?

특별히 선호하는 작곡가는 없다.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에서의 악마 메피스토,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자라스트로 역할이 재미있었다. 평상시에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연기하는 데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캐릭터이지 않나. 좋은 경험이고 재미있는 시간이다. 희극적인 요소가 강조된 배역도 재미있다.

조금 더 젊었을 때 나의 노래와 지금의 내 노래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어떤 성악가로 남고 싶은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베이스’는 갈수록 농익는, 와인 같은 성역이다. 한번은 독창회 앙코르 곡으로 ‘마중’이라는 곡을 불렀다. ‘또 중’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많은 젊은 성악가들이 부르는 곡이다. 하지만 내가 부른 ‘마중’에는 연륜이 묻어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성악가는 단순히 소리만 내는 사람이 아니다. 개개인의 인생 스토리를 노래에 담아 전달하기 위해선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내 경험을 노래로 표현할 때가 됐다. ‘성악가’가 아닌 ‘예술가’의 길을 걸어갈 때라고 생각한다. 와인처럼 ‘숙성미’를 가진 성악가로, 오래 노래하고 싶다.

<올댓아트 김예림 인턴 allthat_art@naver.com 기자>

별별예술 기사 더보기

이런 기사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