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최초! 영국 왕립아카데미가 242년 만에 채용한 회화과 교수...그리고 지우는 그림

올댓아트 김영남 allthat_art@naver.com
입력2018.12.12 11:03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8.12.12 11:04

<인어의 목소리를 듣다, Hears a mermaid> 2018ⅠOil on canvasⅠ61x49.5cm ⓒFiona Rae

그린듯 지운듯한 그림은 수채화가 채 마르기 전에 강풍을 만난듯 흔들리고 있습니다. 투명한 유화, 수채화같은 추상화, 동양화같은 서양화, 디즈니 애니매이션의 배경같기도 한, 알쏭달쏭하지만 무궁무진 상상이 가능한 그림이 한국을 찾았습니다. 홍콩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아시아에서 보낸 작가지만 한국 최초, 아시아에서의 두번째 개인전입니다. ‘학고재청담’ 개관전으로 열리는 <피오나 래>(Fiona Rae, b.1963, 홍콩 출생) 전 입니다.

이번 전시는 1988년 《프리즈(Freeze)》 전을 통해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oung British Artist)’중 한 사람으로 데뷔하며 이름을 알렸던 작가 피오나 래를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출품된 작품은 흑백으로 그려진 작품부터 연보라색 안개 위로 부드러운 덩굴줄기가 뻗어 나오는 듯한 파스텔톤 채색 작품까지 다양합니다. 작가의 작업이 절정에 달한 2014년부터 올해까지 작업한 최근작들은 마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스크린처럼 캔버스에서 빛을 뿜어내는 듯한 느낌이 특징입니다.

(왼쪽)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Sleeping Beauty will hum about mine ears> 2017ⅠOil on canvasⅠ183x129.5cm (오른쪽) <촉촉한 유리, The wat_ry glass> 2018ⅠOil on canvasⅠ61x49.5cm ⓒFiona Rae

래는 그동안 반짝이나 스텐실, 스프레이 페인트, 만화 속 캐릭터, 꽃과 별 문양 등 그동안 ‘훌륭한’ 회화로서는 의심스럽게 여겨졌던 요소들을 캔버스 위로 대담하게 옮겨오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2014년부터는 캔버스에서 형상이 뚜렷하지 않은 추상 회화 작업을 해 오고 있습니다.

‘화가들의 화가’라 불리는 피오나 래는 1963년 홍콩에서 태어났습니다. 중국어에 능숙한 부친을 따라 어린 시절을 홍콩과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에서 보낸 뒤 1971년 영국으로 돌아가 정규 교육을 받았습니다. 1987년 골드스미스 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이듬해,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가 기획한 전시이자 훗날 영국 현대미술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평가받는 <프리즈>에 참가하며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중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하였고, 다음 해에는 영국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 터너 상(Turner Prize) 후보에 선정되었습니다. 1993년에는 젊은 회화가들을 대상으로 한 오스트리아의 엘리에트 폰 카라얀 젊은 작가상(Eliette Von Karajan Prize)의 후보로도 지목되었죠. 1997에는 몇몇 <프리즈> 출신 작가들과 사치 컬렉션으로 꾸려진 전시 <센세이션 Sensation>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크고 작은 전시에 참여하며 이름을 알려온 래는 회화의 경계 확장을 지속해왔습니다. 2011년 여성 최초로 영국 왕립 아카데미 대학(Royal Academy Schools) 회화과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손꼽히는 예술가들만 초청되는 영국 왕립 미술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에도 이름을 올렸죠. 그 외, 카리 현대 미술관(님, 프랑스), 에슬 미술관(클로스터노이부르크, 오스트리아), 쿤스트뮤지엄 슈투트가르트(슈투트가르트, 독일), 쿤스트할레 바젤(바젤, 스위스)에서 전시를 열었습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파리),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 미술관(베를린), 테이트 컬렉션(영국), 허시혼 박물관 & 조각공원, 스미스소니언(워싱턴 D.C.) 등 세계 유수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1999년 일본 개인전 이후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피오나 래의 개인전이자 국내에서는 처음 열리는 <피오나 래>전은 지난 30여 년간 자신의 표현 방식을 스스로 혁신해온 작가의 지난 5년간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평생을 회화에 매달려 왔습니다만 2014년부터는 자신의 장기이기도 했던 채색을 배제하고 붓 터치와 형상을 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요술 옷, Magic garment> 2018ⅠOil on canvasⅠ61x49.5cm ⓒFiona Rae

래의 가장 최근 작품인 <옛날 옛적에 인어의 노래를 듣다 Once upon a time hears the sea-maid’s music>(2018)를 시작으로, 2014년 회색조의 작품부터 순서대로 전시함으로써 작가의 행적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흔적을 스스로 지우는 붓질과 비형상과 형상 사이에 걸친 듯한 형식입니다.

2014년부터 2015년 사이의 작품은 흑백의 기운생동한 붓질이 마치 화조도(花鳥圖)나 사군자화(四君子畵) 같기도 하고, 검은 배경색 위에 그어진 밝은 회색 선이 엑스레이 필름과도 같은 느낌을 냅니다. 그러 2016년부터는 화면에서 검은색을 몰아내며 마치 이전 시기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회색의 사용을 점차 줄여나가다 마침내 검은색과 회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파스텔톤의 안개 같은 추상 회화를 만들어냅니다.

<공중으로 녹아들다, Melts into air> 2018ⅠOil on canvasⅠ61x49.5cm ⓒ Fiona Rae

피오나 래의 지워지는 선은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이 <여인 Woman> 시리즈를 작업할 때 보였던 형상과 추상 사이, 그리고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가 데 쿠닝의 드로잉을 빌려와 지운 작품 <지워진 데 쿠닝의 드로잉 Erased de Kooning Drawing>(1953)을 연상시킵니다. 래는 텅 빈 화면 위로 지워진 드로잉이 희미하게 보이는 이 작품에서 데 쿠닝의 명성과 그를 극복하려는 젊고 패기 넘치는 후배 작가 라우셴버그가 동시에 보인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래는 라우셴버그가 드로잉을 지우는 한 달 동안 데 쿠닝으로부터 작업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으리라고 생각했죠. 이 지워진 드로잉에는 데 쿠닝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데, 이는 미술의 역사가 이전 시기의 것을 극복하며 진행되어 왔지만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또, 이는 아날로그 세계에서의 완전한 삭제란 없음을 의미하죠. 왕립 아카데미 대학에서 242년 만에 채용한 여성 최초의 회화과 교수인 그는 지금도 종종 학교를 방문해 회화에 뜻을 둔 제자들을 만납니다. 세대의 연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에게 젊은 작가들과의 교류야말로 매우 중요한 경험입니다.

(왼쪽) <상상 1g> (오른쪽) <상상 1c> 2015ⅠOil and acrylic on canvasⅠ61x49.5cm ⓒFiona Rae

파블로 피카소의 영향을 받아 피오나 래의 그리고 지우는 선은 화면을 구상과 비구상 사이로 이끕니다. 래는 피카소의 여러 후기 작품들이 칼이나 꽃, 끈으로 맨 부츠, 그리고 화려한 헤어스타일을 한 병사의 형상이 추상화 되어가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래의 회화가 보일 듯 말 듯 한 인물들이 왕관이나 구름, 활, 드레스, 신발, 모자, 별 등을 가진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래는 2013년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에서 본 중국 남송 말기의 화가 진용(陳容)의 두루마리 회화 〈구룡도권 九龍圖卷〉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진용이 단지 몇 번의 붓질만으로 용이 파도와 구름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장면을 그려낸 것에 영감을 얻어 자신의 작업실에 그 그림을 실제 사이즈인 약 15미터로 프린트해 붙여 두었다고 합니다.

홍콩과 인도네시아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본 동양화와 자수, 서예 두루마리 등의 시각 경험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형광색이나 꽃, 별 등의 문양은 그가 어린 시절 아시아의 복잡한 거리나 시장에서 보았던 네온사인, 혹은 인도네시아의 열대 풍경의 흔적 아닐까요.

피오나 래는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고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작업 방식에 규제를 걸었다 이를 깨뜨리며 성장해왔습니다. 피오나 래의 작품세계는 이전 시기의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의 연속이랄 수 있겠네요.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 동기들이 대체로 매체를 넘나들며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것과 달리 래는 오랫동안 회화에만 배달려왔습니다. 회화가 ‘오래된’ 매체가 아니냐는 물음에 자신에게 있어 ‘회화란 현재’라고 합니다. 유화라는 매체가 가진, 기름이 색소를 머금으며 내는 빛을 뿜는 듯한 효과에 매료되었죠.

래의 채색은 유화 매체 특유의 불투명하며 때로는 탁한 느낌이 없습니다. 특히 최근작에서 보이는 수채화에 가까운 그의 채색은 유화의 물성마저 극복한듯 합니다. 그는 우리의 시선을 끄는 매체인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스크린과 같은 반짝이는 듯한 느낌을 캔버스로 불러옵니다. 그는 자신의 눈에 포착된 동시대적 요소를 캔버스에 옮기며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동양에서 나고 어린시절을 보낸 영국인. 스마트폰처럼 빛을 내뿜는 화면을 캔버스에 옮기며, 셰익스피어작품의 한 구절이나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따온 작품 제목 등 고전과 현재를 섞어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그는 회화의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맑고 높은 가을 날 끝없이 높아진 하늘 위로 뭉게 구름이 지나가며 수많은 형상을 만들었다 지웠다하듯이 그 찰나의 한 장면같은 래의 작품들은 무한한 상상을 불러 일으킵니다.

피오나 래의 주요 작품을 살펴볼까요?

<옛날 옛적에 인어의 노래를 듣다> 2018Ⅰ캔버스에 유채Ⅰ129.5x183cm ⓒFiona Rae

이 작품은 숨어있는 형상이 연보랏빛 구름에서 나타날 듯한 모습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는 작가가 현재 집중하고 있는 형상과 비형상 사이, 뚜렷한 색상과 하얀색 배경 사이로 관람객을 이끕니다.

<인물 1h> 2014Ⅰ캔버스에 유채와 아크릴릭Ⅰ183x129.5cm ⓒFiona Rae

피오나 래는 자신이 사용하는 다양한 색채와 캔버스 위 요소들을 일정 기간 제한함으로써 현재의 스스로에게 도전하는 작가입니다. 과거의 그는 종종 밝은 색채의 컬러나 이미지, 혹은 심벌 등 뜻밖의 요소들을 작품 내 삽입하곤 했습니다. 작가는 ‘닥터 수스(Dr. Seuss)’ 동화책, 찰스 프레저(Charles Freger)의 사진, 그리고 진용의 두루마리 회화 등 다양한 곳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피오나 래는 이 시리즈를 작업하는 과정을 통해 ‘직접적인 표현 방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죠.

<인물 2 e> 2016Ⅰ캔버스에 유채Ⅰ183x129.5cm ⓒFiona Rae

이 작업을 통해 작가는 흑백의 연작 이후 색을 다시 사용하는 것에 대해 골몰합니다. 이 작품은 작가가 빛을 뿜어내는 채색법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이 담겨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회색과 검은색이 섞여 탁하게 되지 않고 섞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 백설공주는 자신의 세계에서 달을 꺼내올린다> 2017Ⅰ캔버스에 유채Ⅰ183x129.5cm ⓒFiona Rae

피오나 래는 이 작품을 통해 검은색이나 회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하얀색의 배경에 칠해진 색의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이 작품은 이전 시기의 작품보다 밝은 배경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작가가 캔버스 위에서 섞지 않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색의 사용, 구름과 같은 부드러운 색으로부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환상적인 형상 암시 등에 성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 시 명 : <피오나 래>
전시기간 : 2018년 11월 23일(금) ~ 2019년 1월 20일(일)
전시장소 : 학고재청담(서울 강남구 청담동)
자료&사진 학고재갤러리

<올댓아트 김영남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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