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무용의 새로운 세계를 열다, 피나 바우쉬

올댓아트 변혜령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1.11.15 10:06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1.11.15 10:10

이미 완결된 과거의 예술은 정의하기 쉽지만, 끊임없이 운동하는 동시대의 예술은 쉽게 소개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렵죠. 예술은 인간과 함께 꾸준히 변화해 왔습니다. 무용도 항상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하고 확장되어 왔는데요. 눈에 띄는 성취를 거둔 작품은 언제나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현대무용’이라는 모호한 이름으로도 불리는, 현시대의 춤에 큰 족적을 남긴 안무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스텝은 언제나 다른 곳에서 유래된다. 절대로 발에서 온 적이 없다.”

현대무용의 새 지평을 연 피나 바우쉬의 말입니다. 순간의 빛을 캔버스에 포착한 모네, 인물을 입체적으로 바라본 피카소…틀을 벗어난 ‘이단아’들은 사조와 장르를 개척한 ‘위대한 예술가’로 기억되곤 합니다. 피나 바우쉬 역시 정형화된 무용의 형식을 벗어나 그만의 장르를 개척했습니다. ‘낯선 것’으로 취급받았던 피나 바우쉬의 춤은 현재 ‘탄츠테아터’라는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이름에서 추측해 볼 수 있듯, 탄츠테아터(tanztheater)는 춤(tanz)과 연극(Theater)적 요소가 결합된 장르를 말합니다. 초현실주의 무용의 선구자로 불리는 윌리엄 포사이드는 바우쉬를 가리켜 “피나는 춤을 다시 발명(re-invent)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죠.

2009년 파리 공연에서. 가운데가 피나 바우쉬 ⓒLeafar | Wikipedia

■피나 바우쉬의 생애

바우쉬는 레스토랑이 딸린 여관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모님은 나를 위한 시간이 많지 않았다”고 회상합니다. 어린 피나 바우쉬는 대부분의 시간을 레스토랑에서 보냈습니다. 형제들을 따라 일을 거들거나, 주변을 뛰어다니며 춤추거나, 아주 늦은 시간까지 테이블 아래 숨어 손님들을 관찰하곤 했습니다. 식당의 테이블 밑에서 피나는 우정, 사랑, 싸움, 외로움을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은 바우쉬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는 “어렸을 때의 경험들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무대 위에서 재현되곤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무용을 접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인데요. 레스토랑에 종종 밥을 먹으러 오던 졸링겐 극장 합창단 사람들이 항상 춤을 추거나 뛰어다니는 어린 바우쉬를 본 것이 계기가 되어, 극장의 어린이 발레 교실을 다니게 되었죠. 어린이 발레 교실의 첫 수업에서 유연성을 칭찬받던 순간은 바우쉬가 잊지 못할 기억으로 꼽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열정을 무용에서 발견한 바우쉬는 이후 에센의 폴크방 스쿨에 진학합니다. 당시 폴크방 스쿨의 무용 교수였던 쿠르트 요스는 독일 무용계의 주축으로, 독일 표현주의 무용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을 듣습니다. 교육자로서의 요스는, 학생들이 요스의 테크닉과 스타일을 배우기보다 자신만의 개성과 상상력을 발휘하기를 바랐습니다. 바우쉬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인물 중 하나로 요스를 언급했음에도, 그의 작품에서 요스의 흔적을 크게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독일 표현주의 무용의 대가 쿠르트 요스 ⓒNationaal Archief | Wikipedia

폴크방 스쿨에서 바우쉬는 무용, 음악, 연기, 회화, 조각 사진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과 예술가들을 만납니다. 젊은 예술가들은 열정이 넘쳤고, 학교 구석구석에서 서로의 작업을 공유하곤 했죠. 바우쉬는 수석으로 폴크방 스쿨을 졸업하고, 특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뉴욕 줄리아드 스쿨로 유학을 떠납니다. 당시 미국의 무용은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요. 조지 발란신, 머스 커닝햄, 호세 리몽 등 역사적인 인물들이 활동하던 때였습니다. 바우쉬는 뉴욕에서 예술감독 안토니 튜더의 눈에 띄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무용수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예술과 문화를 접한 젊은 날의 경험은 피나 바우쉬의 예술 세계에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낯선 문화에 대한 포용성, 두려움 없이 장르의 규칙을 벗어나는 대담성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년의 유학 후 독일로 돌아온 바우쉬는 스승 쿠르트 요스의 폴크방 발레단에서 주역 무용수로 활동하며 짧은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안무작 <시간의 바람 속으로>가 쾰른 콩쿠르에서 안무 부문 우승을 거두며 가능성을 인정받았죠. 이후 1973년, 드디어 부퍼탈 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며 안무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바우쉬 이전의 부퍼탈 발레단은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발레를 주된 레퍼토리로 삼고 있었습니다. 바우쉬는 부임 이후 단체의 이름을 ‘부퍼탈 탄츠테아터’로 바꿨습니다. 고전 발레와는 확연히 다른, 이른바 ‘문제작’들이 발표되자 극장의 오랜 관객이었던 지역 주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침을 뱉거나 전화를 걸어 부퍼탈을 떠나라고 윽박지르기도 했죠. 바우쉬는 200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단장 자리를 지켰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피나 바우쉬는 독일의 작은 도시 부퍼탈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공연, 정확히는 피나 바우쉬의 작품을 보기 위해 부퍼탈의 극장을 찾습니다. 아래부터는 바우쉬의 대표작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려 합니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 세계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 ⓒDamien HR | Wikipedia

바우쉬의 작품에서 기술적 완성도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인 듯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다는,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는 그의 유명한 말처럼, 바우쉬에게 춤은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이자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바우쉬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삶’인데요. 그중에서도 세계와 인간의 모순, 존재의 필연적인 고독, 이성 간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관계 등 우리가 쉽게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입니다.

관객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를 수 없는 극장에 앉아, 보여주는 것을 보아야만 하는 입장에 놓입니다. 바우쉬의 작품에는 줄거리도, 정답도 없습니다. 결론을 강요하거나 설득하지도 않죠. 두 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 동안, 관객은 무대 위에서 진실, 폭력, 결핍 혹은 사랑을 목격하고, 이 ‘불편한 진실’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주제의식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 바로 유명한 <봄의 제전>입니다.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동명의 곡이 쓰였습니다. 고대의 의식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에서 주요한 소품은 ‘희생’을 의미하는 빨간 천입니다. 빨간 천이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며 제물이 선택되고, 제물은 죽음을 맞이하는데요. 우리는 죽음을 맞는 제물의 모습에서, 혹은 죽음을 방관하는 다수의 모습에서 자신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피나 바우쉬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영국 새들러스 웰즈 극장이 제작한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 댄스 필름 중 일부 | YouTube

<봄의 제전>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작품은 <카페 뮐러>입니다. 바우쉬의 어린 시절이 반영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한 <카페 뮐러>는 수많은 사람이 왔다가 다시 떠나는 카페를 배경으로 합니다.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 중 반복되는 시퀀스 | YouTube

<카페 뮐러>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두 무용수의 반복 프레이즈입니다. 검은 재킷을 입은 무용수가 서로를 안고 있는 한 쌍의 남녀를, 마치 인형의 자세를 고치듯 교정하기 시작하는데요. 검은 재킷을 입은 무용수가 자리를 떠나면, 두 무용수는 다시 처음의, 서로를 안는 자세로 돌아갑니다. 필사적인 느낌마저 드는 이 시퀀스가 17번 반복되는 동안, 관객은 강렬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무용수는 마치 눈이 멀었거나,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거나, 길을 헤매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대 위 무용수들의 관계는 모두 실패하거나 일방적이죠. 이 처절하게 고독한 작품은 공감에서 오는 이상한 위로를 남기기도 합니다. <카페 뮐러>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공간 ‘카페’를 배경으로 하지만, 어떤 줄거리도 없습니다. 무대에 오르는 무용수들도 특정한 역할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서사 없이 여러 개의 장면과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피나 바우쉬의 작품은 미술의 ‘콜라주’ 기법에 빗대어지기도 합니다.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Helmut Drinhaus | 부퍼탈탄츠테아터

바우쉬는 서사적 구조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를 ‘콜라주’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춤과 연극, 음악과 무대 미술이 동등한 위상을 가집니다. 이런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75년 발표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이하 <오르페우스>)부터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소재로 작곡된 글룩의 오페라가 재료입니다. 바우쉬는 이전에도 오페라 안무인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를 발표했었는데요. 전작에서 오페라 가수가 무대에 등장하지 않고 관람석에서 노래를 불렀던 것과 달리, <오르페우스>에서는 가수와 무용수가 모두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맡습니다. 이후에도 피나 바우쉬의 작품에서는 무용수가 노래를 부르고, 관객을 향해 대사를 뱉고, 마임을 하고, 수화를 하거나, 다 같이 식사를 하는 등 전통적인 춤과 거리가 먼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파리 가르니에 극장에서 공연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소프라노와 무용수가 함께 극을 이끈다 | YouTube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성안으로 이끌고, 다른 사람들이 뒤따른다> ⓒUwe Stratmann | 부퍼탈 탄츠테아터

1978년 작품인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성안으로 이끌고, 다른 사람들이 뒤따른다>의 작업도 콜라주 형태로 이뤄졌는데요. 당시 신작을 위해 다섯 명의 무용수, 네 명의 연극배우와 가수 소나 체르베나가 모였습니다. 다른 배경에서 다른 예술과 공연을 경험한 출연진과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바우쉬는 약간 다른 방법을 택합니다. 바로 작품과 셰익스피어의 텍스트, 장면, 상황에 대한 출연진들의 입장을 ‘묻기’ 시작한 겁니다. 피나 바우쉬의 유명한 ‘묻고 답하기’는 이렇게 작업 방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피나 바우쉬의 드라마투르그(dramaturg·극작술을 연구하는 사람. 주로 단체에 상주하며 공연 제작의 전 과정에 참여한다)로 일했던 라이문트 호게가 출판한 <반도네온> 연습 일지에서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아래에 간략히 옮겨 봅니다.

“피나는 “여러분들이 갓난 아기나 아이들에게서 보았는데 여러분 자신은 이미 그것을 잊고 말아서 아쉬운 것”을 알아내기 위해 ‘더 이상 없어서 섭섭하다고 생각하는 것,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아 아쉬워하는’ 그런 것들이 있는지 질문합니다.

한 남자 무용수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일이 잘 안 맞아떨어질 때 고함지르기와 울기, 긴장하지 않고 카메라를 바라보기,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도 놀기’임을 기억해 냅니다. 이 답변을 들은 한 여성 무용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그것을 잊어버렸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더 이상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뿐일까요?” 피나는 망설이다 대답합니다.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네가 그것을 더 이상 못하는 걸 보려는 게 아니야””

바우쉬의 ‘묻고 답하기’는 무용수들로부터 원하는 답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은 아닙니다. 바우쉬는 자신도 언제나 무엇을 찾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했죠. “제 머리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올바른 이미지를 찾으려고 하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예요. 하지만 직감적으로 바로 이거다 싶은 게 있죠.” 바우쉬는 자신의 작품은 시작에서 끝을 향해 전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에서 밖으로 자라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바우쉬는 무용수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고, 관찰하고, 가능성과 이야기를 찾아냅니다.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면서요. 그렇게 찾아낸 조그만 조각들이 모여 바우쉬의 작품을 구성합니다. 작품 <1980>의 첫 장면은, 휴식 시간에 깡통 수프를 먹던 무용수의 장난에서 발전되었습니다.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 ⓒclau damaso | Wikipedia

바우쉬의 작품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무대 미술입니다. 바우쉬의 연인이자 무대 디자이너, 롤프 보르칙과 함께 작업한 <봄의 제전>에는 1cm 가량의 토탄이 댄스 플로어를 대신합니다. 흙으로 뒤덮인 바닥은 원시적인 느낌을 전달하고, 무용수의 옷을 흙먼지로 더럽히면서 광란의 희생제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외에도 <아리아>에서는 바닥에 1cm 높이의 물을 채웠고, <카네이션>에서는 칠레에서 본 카네이션 들판을 재현했습니다. 관객은 인공적인 극장에서 물, 흙, 꽃, 나무 등 자연의 풍광을 마주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합니다. 피나 바우쉬는 보르칙 사망 이후 무대 디자이너 페터 팝스트와 29년간 함께 작업했습니다.

(6분 40초 경) 피나 바우쉬 안무의 <팔레르모, 팔레르모>에서는 무대 위에서 거대한 벽이 무너졌다 | YouTube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피나 바우쉬와 부퍼탈 탄츠테아터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투어를 진행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바우쉬는 세계 곳곳의 극장, 도시와 협업하며 작품을 발표했는데요. 현지의 문화와 소재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이 작품들은 ‘도시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2005년에는 LG아트센터에서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 <러프 컷>을 세계 초연하기도 했습니다.

항상 하나로 묶은 긴 머리에 검은 옷차림, 담배를 든 모습으로 기억되는 피나 바우쉬는 2009년 폐암 선고를 받은 지 5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영화감독인 빔 벤더스가 이후 그에게 헌정하는 영화 <피나>를 발표하기도 했죠.

빔 벤더스의 <피나> 예고편. 영화는 피나의 작품들과 무용수들의 인터뷰로 구성됐다 | YouTube

피나 바우쉬의 작품에는 항상 “이것이 춤인가?”하는 물음이 따라붙곤 합니다. 다시 한번, “춤은 발에서 오지 않는다. 항상 다른 곳에서 온다”는 바우쉬의 말을 생각해 봅니다. 피나의 춤이 위대한 이유는 틀을 벗어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데에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피나가 작품을 통해 건네고자 한 것은 춤이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피나가 무대 위에 올린 이야기와 질문들은 지금도 부퍼탈 탄츠테아터를 통해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있습니다.

자료|부퍼탈 탄츠테아터, Wikipedia, YouTube

참고|<피나 바우쉬 : 두려움에 맞선 춤사위>, 요헨 슈미트 지음, 을유문화사, 2005
<예술하는 습관>, 메이슨 커리 지음, 걷는나무, 2020
“Dancing in the dark”, 2002. 1. 26, 가디언지
“What Moves Me”, 2007, 피나 바우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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