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말랑하게 하는 ‘추천 가을 음악’...아르헨티나 작곡가 카를로스 구아스타비노

정예경 음악감독
입력2018.11.15 17:37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8.12.03 12:58

늦가을을 소환하는 아르헨티나 작곡가, 구아스타비노

카를로스 구아스타비노의 사진. | 위키피디아

늦가을, 11월.

오늘은 독자님들 앞에, 감히 자신 있게 ‘가을을 부르는 작곡가’라고 선정해본 ‘카를로스 구아스타비노’의 음악을 소개하고 싶어 들고 왔다. ‘Autumn in New York’이나 ‘Autumn Leaves’ 같은 가을 음악은 독자님들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실 테니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들으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적시는, 아르헨티나 남자의 보석 같은 곡을 여기 드려본다.

“팜파스의 슈베르트 ‘카를로스 구아스타비노’”

카를로스 구아스타비노는 아르헨티나 현대 작곡가이다. ‘아르헨티나’ 하면 정열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르고 여름에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되지만, 구아스타비노의 음악은 참 뜻밖의 로맨스를 불러올 것만 같은 음악이다.

일단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로맨스’ 하나 들으면서 시작해볼까? 분명 클래식 곡이지만, 음악을 멜랑꼴리하게 만들어주는 텐션음들이 더해진 7화음들과 더불어 반음계적인 진행도 두드러진다. 때문에 클래식 콘서트 피스라기보다는, 오히려 영화음악 같은 느낌이 든다.

Carlos Guastavino, Romance for two pianos op. 2 n. 1 - Las ninas de Santa Fe (c. 1940)

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면…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이 구아스타비노라는 작곡가는 1912년 생으로, 2000년까지 장수하며 500곡이 넘는 음악을 썼다. 그중 출판이 안 된 음악도 꽤 되고, 알려진 곡들은 ‘피아노’와 ‘노래’를 위한 곡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의 작풍은 동시대 작곡가들에 비해 상당히 보수적으로, 아름다운 화성과 멜로디가 가득한 낭만주의적 작품들이다. 아르헨티나 민속 음악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위의 피아노 곡으로 그를 처음 소개해드렸지만, 사실 그는 ‘노래’곡으로 더 유명하다. 가곡의 왕이었던 슈베르트를 떠올리며, 사람들은 그를 ‘팜파스의 슈베르트’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노래 한 번 들어볼까? 가장 유명한 곡들 중 하나인 ‘장미와 버드나무’ ‘그 비둘기는 틀렸어’라는 곡을 오늘 소개해본다.

첫 번째로, 안나 네트렙코의 목소리로 듣는 ‘장미와 버드나무’이다. 가사는 대략 이러하다.

“장미꽃이 조금씩 피어갔네. 버드나무를 에워싸며.
나무는 사랑에 빠졌네.
하지만 소녀가 장미꽃을 꺾어갔고, 나무는 장미를 그리며 말라가네.”

Anna Netrebko - La rosa y El Sauce (The rose and the Willow)

조금 놀라운 사실은, 이 노래를 1994년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른 버전도 있다는 것!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리며 바야흐로 조수미 시대의 서막을 알리던 시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미 작곡가의 노래가 언어 때문인지 많이 소개가 되지 않았던 때인데, 그가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에 이미 공중파에서 이 노래를 우리에게 소개했다는 걸 생각하면 조수미의 레퍼토리가 얼마나 넓은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Sumi Jo - Carlos Guastavino - La Rosa Y El Sauce (The Rose And The Willow) - 1994

두 번째로 소개해드릴 곡은, 앞서 언급한 ‘그 비둘기는 틀렸어’이다.

라파엘 알베르티의 시에 붙인 노래인데,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전위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영향을 받은 에스파냐의 시인의 가사였고, 내용은 이러하다.

“그 비둘기는 틀렸어. 실수한 거야. 북쪽으로 가야 하는데 남쪽으로 날아갔어, 밀알이 물이라고 믿어서. 바다가 하늘이라고 생각해서.” 사실 이런 전위적인?! (다소 ‘이상’의 시 같은…) 내용으로, 이렇게 보수적이고 아름다운 곡을 썼다는 것도 참 아이러니이긴 하다.

이 곡을 아르헨티나 테너 호세 쿠라의 미성과 기타가 어우러진 버전으로 들어볼까? (호세 쿠라는 플라시도 도밍고가 개최하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Se equivoco la paloma - Carlos Guastavino (Jose Cura)

그리고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여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성으로도 이어서 들어보자. 아르헨티나 특유의 우수가 깃든 멜로디를 부르는 남자 가수와 여자의 가수의 창법이 너무나 달라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잠깐,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역시 아르헨티나 가수로서 ‘라 네그라(’검은 여인‘이라는 뜻)’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머리카락이 칠흑같이 검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녀는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라는 뜻)’ 운동, 즉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을 발굴하고 복원, 재해석을 통해 발전시켜 널리 알리는 노래 운동에 앞장섰다. 군부 독재 시절 망명하는 등, 나름 스케일과 굴곡이 있는 대스타의 삶을 살다 간 전설의 여가수이다.

Mercedes Sosa - Se equivoco la paloma

이 외에도,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 그가 곡을 붙인 음악도 있다.

Guastavino: Esta iglesia no tiene - Victor Suzan Reed, Tenor - Jozef Olechowski, Piano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낭만주의자”

2000년대까지 살았던 그와 동시대의 작곡가들을 떠올려 보면, 사실 현대음악의 최전선에서 아방가르드 스타일을 추구한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현대 작곡가는 ‘알베르토 히나스테라’로, 현대음악을 쓰면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적 색채를 구축하고 음악 세계를 펼쳐나갔다.

동시대의 비슷한 곳에 사는 작곡가들과 얼마나 달랐는지 감을 잡아보기 위해, 아방가르드한 곡을 썼던 히나스테라의 곡을 한 번 들어볼까?

Ginastera - Piano Concerto № 1, Op. 28 [Audio + Score]

물론 히나스테라의 곡도, 다른 유럽 작곡가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음악적’ 맥락을 가진 훌륭한 곡들인데, 어쨌든 클래식 서양음악의 근간을 이루는 체계인 조성과 기능화성을 벗어나서, 새로운 음악어법을 탐구하며 쓴 곡들임에는 틀림없다.

반면, 구아스타비노는 아주 보수적으로 낭만 화성과 멜로디에 의지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구아스타비노는 역설적이지만, 정말 용감하게도 주류에 편승하지 않고 완전히 역행해 자기 갈 길을 꾸준히 걸었던 작곡가였던 것이다. (아카데믹한 작곡계의 분위기를 보면, 이러기도 쉽지는 않았을 듯하다.)

“대중이 사랑한 작곡가”

구아스타비노가 다른 현대음악 작곡가들과 조금 다르고 특이한 점이 또 있다. 아주 유명한 사람이 아니면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곡은 녹음되거나 연주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등 곡을 쓰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구아스타비노의 경우는, 연주 로열티를 꼬박꼬박 잘 챙겨 받아서 돈 걱정 안 하고 부업도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이 참 남달랐다고나 할까? (정말 바람직한 현대음악가의 모델이 아닐 수가 없다!)

사실 지금 조차도 이런 현대음악 작곡가는 매우 드물다. 말 그대로 진짜 1회용으로 연주되는 현대음악이 얼마나 많은지!!! 현대음악은 대중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쓴다기보다는, ‘지성’과 ‘감성’의 결합 내지는, 다른 수학적 시도들도 많이 하기 때문에 다소 실험적인 경향이 짙다. 때문에, 뭐든지 빠르고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요즘 시대에 현대음악이란 장르가 대중적으로 어필하기는 사실 쉽지 않다.

실험적인 현대음악보다는, 음유시인 마냥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그의 음악에 더 끌려서였을까? 그의 곡은 지금까지도 마르타 아르헤리치·기돈 크레머·키리 데 카나와와 같은 세계적 연주자들에 의해 연주되고, 수많은 팬들로부터 많이 사랑받고 있다.

“영국문화원이 알린 남미 작곡가”

그런데 위에 설명했던 것처럼, 그가 로열티를 잘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런 환경적 여건이 갖춰져서였을텐데, 그것은 그의 활동 반경과도 관련이 있는 듯 하다.

1947, 1948, 1949 년. 그의 작품이 영국 런던에 소개되었는데, 그는 ‘영국 문화원’의 장학금 수혜자로서 BBC 방송으로부터 초대되었다. 이 시기동안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그의 곡을 연주했는데, ‘Tres Romances Argentinos’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연주했다. 아름다운 화성적 색채가 오케스트라 악기를 통해 더 잘 표현되고 있다. 오케스트라 버전의 곡을 감상해보자.

Carlos Guastavino Tres Romances Argentinos

잠깐 여기서 얘기해보자면, 많은 나라가 문화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영국은 특히 국가 차원에서 문화원을 아주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해외 활동과 교류를 장려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하는 많은 사업들 중, 특히 영국 문화원 어학원은 우리나라에서 너무도 인기가 많아 늘상 대기를 해야지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다.

문화원을 통해 현재 가장 핫하게 활동하는 뮤지션·댄서들의 공연과 소통, 교육, 세미나 등 수준 높은 문화활동의 기회가 늘 제공된다.

그가 비록 남미의 작곡가지만, 영국문화원을 통해 지원받고 유럽에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입지를 구축했기 때문에 활동 폭도 넓어지고 연주 기회도 운 좋게 많이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세계의 많은 예술인들이 영국 문화원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행복했던 작곡가”

카를로스 구아스타비노의 사진. | 위키피디아

구아스타비노는 재능으로 쓰는 음악을 썼던 작곡가였다. 그 당시는 현대 음악가들이 음악성이나 음악적 재능보다는, 기하학·건축학·수학 등의 요소를 음악과 결합하고 감정을 배제한 채, 지적 유희를 통해 곡을 쓰던 것이 유행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순전히 감성에서 출발된다. 물론 작곡법 스킬이야 많이 노력하고 단련하여 발전시켰지만, 음악의 출발 자체는 그의 재능과 음악성이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런 음악이 동시대의 주류 작곡계에서는 약간 외면받았을 수 있으나, 대중과 연주자들은 아직까지도 그의 음악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작곡가는 죽어서야 많은 이들이 재조명하고 알아주기 시작하는데, 살아있을 때 사랑받고 음악으로 저작권료를 받아 그야말로 뮤지션답게 생계를 유지했다면 그보다 행복한 작곡가가 또 있을까? 구아스타비노는 진정한 인생의 승자요, 이상이 아닌 현실의 삶을 옹골차게 살아냈던 작곡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감독 정예경은
서울예고와 서울대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미국 뉴욕대에서 영화-멀티미디어 음악(석사)을 공부했다.
뮤지컬 첫 작품인 ‘액터-뮤지션 뮤지컬 모비딕‘에서 배우가 연기, 노래, 춤, 악기를 모두 담당하는 새로운 형식의 음악을 선보이면서 주목을 받았고, 이 작품으로 서울뮤지컬 페스티벌에서 예그린 무대 음악상, 혁신상을 수상했다. 정통 클래식의 계보를 이으며 금난새, 조수미, 백혜선, I Musici 등 국내외 유명 클래식 음악가들과 작업하는 한편 게임회사 ‘트리플래닛’, KBS 드라마 ‘오렌지 마말레이드’ 등의 대중음악 장르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는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음악세계를 펼치고 있다.

<정예경 음악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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