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거대한 연극 유산

장지영 공연 칼럼니스트
입력2019.01.02 13:14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01.02 13:36

베리만은 연극 연출가 겸 극작가로도 맹활약 …
최근 전 세계에서 베리만 영화의 무대화 잇따라

영화감독, 연극 연출가, 극작가였던 베리만.|잉마르 베리만 재단

2018년은 스웨덴 출신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1918~2007)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제7의 봉인’, ‘산딸기’, ‘침묵’, ‘페르소나’, ‘파니와 알렉산더’ 등 영화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을 다수 남긴 그는 20세기 최고의 영화감독 가운데 한 명이다.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감독인 장 뤽 고다르가 “베리만은 종교, 죽음, 실존주의 등의 형이상학을 스크린에 옮겨온 최초의 감독이다”라고 지적했듯 베리만은 인간의 삶과 죽음, 신앙과 구원 등의 문제에 평생 천착했으며 수많은 후대 영화감독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외에도 그는 남자와 여자, 결혼과 가족, 예술가의 정체성과 실패 등의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잉베르 베리만 탄생 100주년 기념 제7회 스웨덴 영화제 포스터.

올해 베리만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전 세계에서 잇따라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1월 서울 부산 광주 인천 등 4개 도시에서 제7회 스웨덴 영화제 ‘잉마르 베리만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 열렸다. 주한 스웨덴 대사관이 매년 11월 개최하고 있는 스웨덴 영화제를 올해는 베리만 영화로 꾸민 것이다. ‘제7의 봉인’, ‘페르소나’, ‘산딸기’, ‘모니카와의 여름’, ‘가을 소나타’, ‘파니와 알렉산더’, ‘사라방드’와 베리만 생전의 인터뷰를 토대로 한 다큐멘터리 ‘베리만 아일랜드’(마리 뉘레로드 감독) 등 8편이 상연됐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베리만이 영화감독으로만 조명돼 안타깝다. 그는 영화감독 못지않게 뛰어난 연극 연출가이자 극작가였다. 평생 영화 60편(극장용 40편, TV용 20편)과 172편의 연극을 연출했는데, 복제가 불가능한 연극이라는 매체 특성상 우리나라에서 그의 연극이 소개된 적은 없다. 그나마 이번 스웨덴 영화제에서 상영된 8편 가운데 ‘베리만 아일랜드’에 연극 관련 내용이 일부나마 포함돼 아쉬움을 달래준다. 원래 TV용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 ‘베리만 아일랜드’는 영화, 연극, 사적인 삶의 3부작으로 되어 있다. 극장용으로 만들면서 3부작을 압축했는데, 연극이 영화와 동등하게 다뤄진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베리만의 영화조차도 대중성이 부족한 상황인데, 공연조차 되지 않은 그의 연극 세계를 알기란 무리다. 하지만 베리만 스스로 “연극은 충실한 아내이고, 영화는 재밌지만 돈이 많이 드는 여주인이다(The theater is like a faithful wife. The film is the great adventure-the costly, exacting mistress)”라고 말했을 정도로 연극은 영화와 함께 그의 예술과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영화감독 이전에 연극 연출가로 먼저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는 전성기엔 여름에 영화를 찍고 나머지 계절에는 연극을 연출했다. 그러다가 체력이 떨어진 노년에는 연극에만 집중했다.

게다가 그의 영화에 연극적 기법이 많이 이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쓰거나 연출한 연극의 일부가 녹아들어 있는 등 그의 영화세계는 연극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실내악적 영화’로 표현되는 그의 영화 스타일은 연극처럼 제한된 시공간을 배경으로 소수의 등장인물이 등장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극중 인물들의 움직임 또한 매우 섬세하게 계산되었다. 연극이나 무용, 오페라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도 적지 않아서 주인공이 배우 무용수 피아니스트 작가 등 예술가가 많다.

해외에서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영화 외에도 연극, 오페라, 무용 등 무대예술과 그의 긴밀했던 관계를 잇따라 조명하고 나섰다. 베리만의 작품에 대한 판권을 지닌 베리만 재단이 스웨덴 정부의 적극적 지원 아래 그의 연극 유산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국내에서도 머지않아 연극 연출가 겸 극작가 베리만에 관심을 가질 때가 올 것으로 기대된다.

■연극으로 시작해 연극으로 마무리한 베리만의 삶

베리만은 1919년 7월 14일 스웨덴 웁살라에서 유서 깊은 목사 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에 엄격해서 간혹 체벌을 가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반발심을 가졌던 그는 대학 시절 크게 다투고 집을 나간 후에는 다시는 집에 가지 않았다. 베리만이 평생 종교와 신의 문제, 사랑과 증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집착 등을 테마로 다룬 배경에는 그의 가족관계가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베리만은 어린 시절부터 영화와 연극에 매료됐다. 9살 때 형이 선물 받은 환등기를 자신이 아끼던 장난감들과 바꾼 일화는 그의 운명을 예감하게 만든다. 그는 환등기를 이용해 인형극을 만들면서 놀았다. 직접 인형과 무대를 만들고 조명까지 설치했는데, 점점 인형극의 규모가 커졌다. 1994년 발표된 그의 자서전 제목이 ‘환등기’(한국어판 제목은 ‘마법의 등’)인 것만 보더라도 그가 어린 시절부터 연극과 영화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영화이자 자전적인 ‘화니와 알렉산더’에서도 주인공인 소년 알렉산더는 환등기를 이용해 인형극을 만든다.

영화 ‘화니와 알렉산더’.

스톡홀름대학 재학 시절 그는 학생 극단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대학을 중퇴한 후 아마추어 극단에서 극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하면서 프로 연극계의 주목을 받았다. 26살이던 1944년 스웨덴 남부 소도시 헬싱보리 시립극장에서 최연소 극장장이 된 그는 두 시즌 동안 나치즘 비판을 담은 <맥베스> 등 9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려 극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는 1946년부터 세 시즌 동안 예술감독으로 일한 예테보리 시립극장에서 연극 연출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헬싱보리 시립극장에선 시설이 너무 열악해 제대로 된 연출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테보리 시립극장에서는 스펙터클한 무대가 돋보인 ‘칼리굴라’부터 극중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배우 중심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까지 다채로운 스타일의 연극을 선보였다.

연극 <칼리굴라(1946)> (왼쪽)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49)>의 한 장면|잉마르 베리만 재단

연극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그는 1946년 ‘위기’, ‘우리 사랑에 비가 내린다’로 영화 작업에도 본격 뛰어들었다. 앞서 1944년 ‘고통’의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계에 데뷔했지만, 그는 자신의 영화 경력의 시작을 ‘위기’라고 말해 왔다. 이후 영화 커리어를 그만둘 때까지 연간 평균 1편의 영화를 선보였다. 말뫼 시립극장 예술감독(1952~58년)과 스톡홀름 왕립극장 극장장(1963~66년)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극장의 오프 시즌인 여름마다 영화를 찍었다. 쓸데없는 회의가 많아서 작업에 집중할 수 없다며 스톡홀름 왕립극장 극장장을 2년여 만에 그만둔 뒤에도 그는 영화와 연극 연출을 병행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말뫼 시립극장 예술감독을 맡은 1952년부터 스톡홀름 왕립극장 극장장을 맡기 직전까지의 10년간은 그의 연극 커리어에서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그는 다양한 고전 희곡을 새롭게 재해석한 것은 찬사를 받았으며, 오페라를 종종 연출하기도 했다. 특히 스웨덴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노르웨이 헨리크 입센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극작가였다. 스트린드베리의 ‘꿈’과 입센의 ‘헤다 가블러’는 세 번이나 각각 다르게 연출됐으며 후대 연극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이 시기에 그는 ‘베리만 군단’으로 불리는 배우와 스태프 그룹을 키워나갔는데, 베리만 군단은 영화 작업에도 늘 함께 했다. 베리만이 독립적인 저예산 영화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베리만 군단의 힘이다.

그가 국제 영화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1955년 영화 ‘한여름밤의 미소’ 칸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으면서 스웨덴 밖에서도 주목받았다. 이 영화는 그가 한 해 전 말뫼 시립극장에서 연출한 오페라 <유쾌한 미망인>과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코미디 영화다. 그리고 1957년 삶과 구원, 인간과 종교라는 특유의 형이상학적 주제를 다룬 ‘일곱 번째 봉인’과 ‘산딸기’가 나란히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과 베를린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으면서 단숨에 최고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1960년 ‘처녀의 샘’으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그는 1960~70년대 ‘어두운 유리를 통해’, ‘겨울빛’, ‘침묵’, ‘늑대의 시간’, ‘수치’, ‘정열’, ‘페르소나’ 등 주옥같은 영화들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의 영화들이 당시 영화계의 극단적인 사실주의와 달리 다소 양식화돼 있는 것은 연극의 영향을 보여준다.

1976년 말 스톡홀름 왕립극장에서 스트린드베리의 <죽음의 춤>을 연습하던 중 그는 탈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스웨덴 국세청이 스웨덴에 있는 그의 회사와 외국 배우 개런티 지급의 편의성을 위해 스위스에 만들었던 자회사 사이의 거래를 탈세로 본 것이다. 모욕을 느낀 그는 바로 독일로 건너가 뮌헨 레지덴츠 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했다. 1979년 국세청이 탈세가 아니었다며 잘못된 조사였음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상처받았던 그는 1984년이 되어서야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1982년 잠시 귀국해 마지막 극장 영화 ‘파니와 알렉산더’를 촬영한 것을 제외하고 스웨덴을 떠나 있는 동안 그는 독일, 영국, 미국, 노르웨이의 영화 제작사와 작업했다.

의사로부터 휴식을 권유받은 그는 스웨덴에 돌아와 영화 작업을 중단했다. 이후 TV 프로덕션과 라디오극 연출도 했지만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극은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무대에서 끊임없이 실험을 했다. 그는 젊은 시절 가까이하지 않았던 셰익스피어를 잇따라 연출하는가 하면 1990년대 초반에는 고대 그리스 연극 시리즈로 큰 화제를 모았다. 또 2000년대에는 다시 스트린드베리의 <유령 소나타>와 입센의 <유령> 등을 연출하기도 했다. 연극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작가주의 감독인 그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직접 시나리오를 쓰거나 각색했다. 연극의 경우에도 초반에는 직접 대본을 썼으며 그 양도 만만치 않다. 또한 ‘제7의 봉인’ 등 여러 영화에는 그가 썼던 희곡이 부분적으로 담겨 있는데, 점점 희곡을 쓰지 않게 됐다. 당시 평론가들이 그의 연출력에 찬사를 보냈지만 희곡에 대해서는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리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1981년 자신의 TV 시리즈 ‘결혼의 풍경’(1973)을 직접 희곡으로 각색하고 연출했을 때와 1993년 직접 쓴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 <마지막 숨>을 무대에 올렸을 때는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마지막 숨>은 1995년 TV 단막극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전 세계에서 잇따라 무대화 되는 그의 영화들

베리만이 타계하고 3년이 지난 2009년 8월 스톡홀름왕립극장은 ‘잉마르 베리만 국제 연극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베리만이 전 세계적으로 영화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연극 연출가였던 것을 알리는 한편 그의 연극 유산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당시 잉마르 베리만 국제 연극 페스티벌은 그가 직접 썼던 희곡을 후대 연출가들이 새롭게 연출한 작품들과 그의 영화를 무대화 한 작품들로 프로그래밍 됐다.

한국에서 공연된 임영웅 연출 <가을 소나타>(왼쪽)와 안드레이 서반 연출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내한공연|신시컴퍼니, 국립극장

사실 베리만의 영화, TV 및 라디오극은 출연진의 수가 적고 한정된 공간에서 이뤄지는 만큼 연극으로 다시 만든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다. 그 자신이 생전에 영화 ‘결혼의 풍경’ 등을 직접 연극으로 만들기도 했으며, 영화 ‘가을 소나타’(1978)와 라디오극 ‘마음의 문제’(1993) 등은 여러 나라에서 무대화가 이뤄지기도 했다.

게다가 많은 극작가, 연출가, 프로듀서 등이 일찍부터 베리만 영화의 무대화에 관심을 드러냈다. 극작가 겸 프로듀서 앤드류 업튼-배우 케이트 블란쳇 부부의 경우 2004년 베리만을 설득해 영화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의 무대화 판권을 획득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 연기되긴 했지만 업튼이 각색을 맡고 블란쳇이 제작한 이 작품은 2010년 영국 런던 알메이다 극장에서 배우 루스 윌슨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졌다. 업튼은 2008년 호주 빅토리아 오페라가 동명 작품을 토대로 만든 오페라에서 리브레토를 담당하기도 했다.

스톡홀름왕립극장이 2009년 주최한 ‘잉마르 베리만 국제 연극 페스티벌’은 세계적인 연출가 이보 반 호프가 연출한 ‘외침과 속삭임’ 등 영화를 무대화 한 연극을 여러 편 선보였다. 스톡홀름왕립극장은 스웨덴영화협회, 제작사 스웨덴필름인더스트리, 스웨덴 텔레비전(SVT)과 함께 작품 판권 및 각종 자료들을 소유한 베리만 재단의 운영을 맡고 있다. 사실 페스티벌은 베리만의 연극 유산을 지키려는 학구적인 의도에서 비롯됐지만 평단과 대중의 환호를 받는 등 큰 성공을 거뒀다. 아예 축제의 상설화를 결정한 스톡홀름왕립극장은 2년에 한 번씩 열되 2018년 탄생 100주년에 맞추기 위해 2012년 제1회 잉마르 베리만 연극 페스티벌을 열게 됐다.

동명 영화를 무대화 한 오페라 <제7의 봉인>(왼쪽)과 연극 <리허설 후/페르소나>|2018 잉마르 베리만 연극 페스티벌

그리고 잉마르 베리만 국제 연극 페스티벌 외에 전 세계 극장에서 그의 영화를 원작으로 한 연극 오페라 등의 공연이 잇따라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013년 한국 국립극장에서 내한공연을 가진 안드레이 서반 연출 루마니아 클루지 헝가리어 극단의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외침과 속삭임)>은 2010년 초연된 작품으로 최근 유럽 연극계의 베리만 영화 무대화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최근만 보더라도 2015년 베리만의 딸인 안나 베리만이 베를린 도이체 시어터에서 연출한 ‘페르소나’, 2016년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리브 울만이 영국 국립극단에서 직접 연출한 <사적인 고백>, 2017년 핀란드 국립오페라에서 오페라로 제작한 <가을 소나타>, 2018년 런던 올드빅 시어터에서 오페라로 만들어진 <파니와 알렉산더> 등 일일이 꼽기도 어렵다.

베리만 탄생 100주년인 2018년에 열린 4회 페스티벌(8월 23일~9월 2일)에서는 9개국 아티스트가 참가한 18편의 공연을 비롯해 워크숍, 강의, 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이보 반 호프가 영화를 바탕으로 만든 연극 <리허설 후/ 페르소나>, 스웨덴의 대표적 안무가 마츠 에크·알렉산데 에크만·요한 잉게가 각각 베리만을 테마로 안무한 트리플빌 <댄싱 위드 베리만>, 영화 ‘제7의 봉인’을 토대로 제작된 동명 오페라 등이 관심을 모았다.

무용 <댄스 위드 베리만>(왼쪽)과 영화 ‘잉마르 베리만-안무가의 눈을 통해 바라보다’. |2018 잉마르 베리만 연극 페스티벌, 서울무용영화제

‘잉마르 베리만-안무가의 눈을 통해 바라보다’ 트레일러 영상.

국내에서는 LG아트센터와 서울국제무용제(SIDANCE)가 <댄싱 위드 베리만>에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실제로 초청공연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대신 11월 서울무용영화제에서 에크만을 비롯해 스웨덴 왕립발레단 출신 4명의 젊은 안무가가 베리만의 영화에 내재된 안무적 감각에서 모티브를 얻어 춤으로 표현한 댄스필름 ‘잉마르 베리만?안무가의 눈을 통해 바라보다’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앞으로 한국 공연계에서 베리만 영화의 무대화에 도전해보면 어떨까.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만든다면 해외에서도 각광받는 콘텐츠가 될 수도 있다.

공연 칼럼니스트 장지영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성균관대 공연예술협동과정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한국기자협회 지원으로 일본 도쿄대학대학원 문화자원학과에서 연수했다. 1997년 국민일보에 입사해 문화부 스포츠부 사회부 국제부 등 여러 부서를 거쳤다. 2003년 문화부에서 처음 공연을 담당하면서 공연계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기자로서만이 아니라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재밌게, 재밌는 것을 진지하게, 진지한 것을 유쾌하게, 그리고 유쾌한 것을 어디까지나 유쾌하게”라는 일본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격언을 따르려고 노력 중이다.

<장지영 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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