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부터 ‘인셉션’까지... 영화음악계 사로잡은 파격 첼리스트들

올댓아트 박찬미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19.11.13 09:47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11.13 09:50

“클래식의 미래는 영화음악에 있다고 믿는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시대가 도래했는지도 모른다”

한 음악평론가가 음악 스트리밍 어플 내 발행되는 매거진에 적은 말이다. 이를 목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한 번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했다. 어느 공연에 선 지휘자가 관객들을 향해 “우리 시대에는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거장은 없는 걸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곤,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이 거장들과 같은 명망을 얻게 될 이가 있으니 바로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입니다”라고 자답한 것이었다.

중세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 등의 흐름을 타고 클래식은 변화해왔다. 그들의 말처럼 21세기의 클래식은 ‘영화 음악의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

그 변화를 몸소 겪은 음악가들이 있다. 지금 소개하는 이들은 전통적인 클래식의 영역 안에서 성장했지만 현재 영화음악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최근 영화 ‘조커’의 총 음악감독으로 활약한 힐뒤르 그뷔드나도티르와 한스 짐머 밴드에서 일렉트릭 첼로 독주자로 주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티나 구오, 두 첼리스트를 만나보자.

“힐뒤르 그뷔드나도티르 Hildur Guðnadottir”

영화 ‘조커’ 스틸 이미지 | 네이버 영화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낮고 불안한 현의 울림. 영화 ‘조커’의 러닝타임을 꽉 채우는 소리다. 코미디언을 꿈꾸는 아서 플렉이 부당한 차별과 모욕을 당할 때 그 소리는 무기력하고 처연하며, 그의 억울함이 격분으로 변모하는 순간 이는 곧 울부짖는 듯 강렬해진다. 그 소리의 중심에는 ‘첼로’가 있었다.

감독 토드 필립스는 관객이 아서 플렉을 통해 누구나 한 편에 지니고 있는 외로움과 우울감에 공감하길 원했다. 이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는 어둡고 민감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할 줄 아는 작곡가를 음악감독의 자리에 소환했다. 아이슬란드 출신의 첼리스트 힐뒤르 그뷔드나도티르가 그다.

힐뒤르 그뷔드나도티르 | 공식 홈페이지

다섯 살 때부터 전형적인 클래식 음악 교육과정을 밟아온 힐뒤르는 차츰 전자 음향에 관심을 보이더니 이십 대 초반 첫 음반 ‘Mount A’를 발매하며 첼리스트이자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이후 다섯 차례 솔로 음반을 선보이는 동안 선 오(Sunn O))), 팬 소닉(Pan Sonic) 등의 실험 메탈 밴드, 전자 음악 밴드와의 협업도 병행했다. 또, ‘프리즈너’(2013), ‘시카리오’(2015), ‘레버넌트’(2015) 등의 영화와 TV 시리즈를 통해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러던 중, 힐뒤르는 구소련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재구성한 미국의 드라마 ‘체르노빌’의 총 음악감독으로 발탁된다. 그녀는 실제 운영이 중단된 핵발전소를 찾아가 그곳의 소리를 녹음해 사운드트랙에 활용하는 등 실험정신을 여실히 드러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선에 대한 공포를 효과적으로 드러낸 이 음악은 그녀에게 에미상의 영예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힐뒤르 그뷔드나도티르 솔로 음반 ‘Without Sinking’ 수록곡 ‘Erupting Light’

‘체르노빌’ 스틸 이미지 | HBO

처음 발매한 솔로 음반부터 ‘체르노빌’의 사운드트랙에 이르기까지, 힐뒤르의 음악은 줄곧 어딘가 불안하고 다소 어둡다. 그녀 또한 이 점을 주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꼭 ‘어두운 사람’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누구나 마음속에 어두움과 밝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그 어두움은 어떻게든 표출되어야 하기에 자신은 음악을 통해 그를 수행하는 것일 뿐이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한편으론, 출신 배경도 작품의 정서에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였고, 아버지는 클라리넷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이셨어요. 가족들 대다수가 클래식 연주자였기 때문에 저 역시 그런 환경에서 연주자로 자라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어머니가 저를 임신하셨을 때,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의 음악을 자주 들으셨는데, 그때 제 이름을 ‘힐뒤르’라고 정하고 첼리스트로 키우리라 결심하셨대요. 아이슬란드어로 ‘힐뒤르’는 전투라는 뜻인데, 재클린 뒤프레의 연주 스타일이 무언갈 꿰뚫어버릴 듯이 사납거든요. 드라마틱 하죠?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이래요.”

힐뒤르 그뷔드나도티르 | 공식 홈페이지

그녀의 음악은 종종 ‘음악’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악상의 파편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는 작곡하는데 꽤 ‘전통적인’ 방식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힐뒤르는 ‘조커’의 사운드트랙을 작업하면서 영화의 내러티브를 따라 자신의 상상력을 펼쳐 나갔다. 그 과정에서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리드하도록 하고, 그 사이에 전통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가미했다.

“토드가 원고를 마무리하자마자 제게 보내줬어요. 그리곤 이를 토대로 바로 음악 작업을 시작해달라고 요청했죠. 그래서 원고를 읽은 후의 감정을 그대로 음악으로 치환했어요. 내러티브를 따라 음악이 어떻게 변해야 할지 상상하면서 말이죠. 보통 영화음악은 촬영이 거의 끝난 뒤, 영상을 보면서 작곡되기 마련인데 이번 작업은 그 반대였어요. 그런데 토드는 제가 미리 쓴 그 곡들을 영화에 훌륭하게 녹여 넣었더라고요. 마치 음악과 영화가 함께 큰 하나로 성장하는 것 같았어요.”

아서는 세상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려고 했던 인물이다. 불합리한 외적 환경이 내면에 생채기를 내고, 격동을 일으키면서 비록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지만 말이다. 힐뒤르는 이 지점에서 아서에게 굉장히 공감했다고 말한다. 그 내면의 연약함을 보여 주는데 방점을 찍은 이유다. “작품의 도입에서는 주로 첼로 소리만 들려요. 영화가 진행될수록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점점 더 커지죠.” 첼로의 선율이 아서의 상처 입은 마음을 대변한다면, 풍성한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아서의 내면에 쌓인 광기를 대변하게 했다.

Joker - Call Me Joker - Hildur Guðnadottir (Official Video)

“아서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려고 무작정 첼로를 잡고 앉았어요. 원고를 읽고 난 뒤라, 그의 감정이 여전히 제 속에 맴돌고 있었죠. 첫 음을 연주하자마자 왠지 모르게 제 마음이 울리더라고요. 굉장히 강렬한 반응이 제게 돌아온 거였죠. 저는 생각했어요. ‘바로 이거다’라고.”

힐뒤르 그뷔드나도티르는 학생 시절의 자신이 ‘문제아’였다고 말한다. 어떤 음악을 옳고 그르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굉장히 힘겨웠는데, 그게 스스로에겐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그 시간을 거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단다.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무척이나 세밀한 뉘앙스까지 신경 써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색을 찾는 데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재밌는 건, 이런 생각으로 젊은 힐뒤르는 연습량을 크게 줄였는데, 오히려 더 나은 연주자가 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고 한다. 아마 이런 배경이 자양분으로 작용해, 적은 음들 만으로도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는 힐뒤르만의 음악 세계가 구축된 것은 아닐까.

“티나 구오 Tina Guo”
‘라이온 킹’(2019), ‘엑스맨: 다크 피닉스’(2019), ‘됭케르크’(2017), ‘원더우먼’(2017),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2017), 그리고 ‘인셉션’(2010)까지.

‘한스 짐머 라이브’ 공연 모습 ⓒFrankEmbacher

한스 짐머를 먼저 떠올렸겠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다. 한스 짐머 밴드에서 일렉트릭 첼로를 연주하며, 영화·게임 음악을 직접 작곡하는 다재다능 음악가, 티나 구오다.

티나 구오는 이미 두터운 팬덤을 가진 스타 연주자다.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5세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음악 선생님이었던 부모님의 지도를 따라 7세부터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보수적인 부모님 아래 하루 8시간씩 꼬박 연습을 해야 했다고 회상했는데, 그런 연습의 과정을 거쳐 전문 첼로 연주자로 성장한 후 샌디에고 심포니, 국립 멕시코 심포니, 그리스 테살로니키 주립 심포니 등을 포함한 수많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이력을 세웠다. 물론 고된 시간이었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온 것에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티나 구오.

티나 구오 | 티나 구오 공식 홈페이지

보수적인 환경에서 고전음악을 연주하던 그녀가 파격적인 모습으로 강렬한 사운드의 일렉트릭 첼로를 연주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 출발한다. 대학교 2학년, 당시 그녀의 전 남친이었던 한 기타리스트와 함께 처음으로 헤비메탈 공연장에 방문했다. 이전까지 클래식 공연만 다녔던 그녀에게 북적이고 더럽고 음산한 그곳은 굉장히 충격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분위기에 끌렸다고. 무엇보다도, 해야 하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이 무대에, 그리고 자신의 음악에 대해 평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 사로잡혔다. 그 공연이 끝난 직후, 그녀는 결심했다. 바로 이런 음악을 하겠다고. 물론 이런 다짐을 지인들에게 말하면 “그래, 해봐! 귀엽네” 정도의 반응이 돌아왔지만.

무언가를 원한다면 일단 그에 관한 뭐든 시도해봐야 된다는 인생의 모토를 기둥 삼아, 그녀는 일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이제껏 모은 용돈을 탈탈 털어 모아(현재 환율로 약 700만 원..) 하나의 뮤직비디오를 만든 것. 영상 속 밴드가 연주한 곡은 우리 모두가 아는 그 클래식 곡,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이었다.

티나 구오 ‘왕벌의 비행’

결과물을 본 부모님의 반응은 냉담했다. 전 학년 장학생으로 다니던 대학도 그만두고, 반은 벗은 채로 뮤직비디오에 등장하지를 않나, 황금색으로 온몸을 칠하는 기괴함을 보이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이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된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음악계 거물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한다. ‘위대한 쇼맨’ ‘정글북’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활동한 존 데브니는 ‘아이언맨 2’에서 첼로 솔로를 연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건넸다. 이내 한스 짐머가 연락해왔다. 준비 중인 ‘셜록 홈즈’ 음악에 역시 독주로 등장해달라는 것이었다. 끝이 아니다. 더 이상 블록버스터 영화 음악을 제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한스 짐머에 이어 영화 음악계 신예로 떠오르고 있는 브라이언 타일러의 러브콜까지 받았다. 티나 구오는 이 모든 것이 우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문제의(?)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만 해도, 세션 음악가나 영화 음악가로 살 게 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고.

티나 구오 | 위키미디어커먼스

티나 구오는 2016년, 2017년 ‘한스 짐머 라이브’ 투어에 참여해 솔로이스트로 활약했다. 동명의 공연 투어가 지난 9월 서울 올림픽공원에도 상륙한 바 있다. 밴드의 경계를 넘어, 그녀는 온전히 하나의 곡, 하나의 앨범을 직접 작곡해 선보이고 있다. 특히 ‘게임광’으로 알려진 그녀가 주로 택하는 테마는 게임 음악이다. 비디오 게임 ‘콜 오브 듀티: 고스트’ ‘MTX4’ 등의 음악과 더불어 영화 ‘더 베스트 오퍼’의 공식 트레일러 음악도 작곡했다.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2011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발매한 정규 앨범이 9개, 그 외 싱글 앨범은 33개가 넘는다.

2016년 독일, ‘한스 짐머 라이브’에서 ‘캐리비안의 해적’을 연주하는 티나 구오

한편, 그녀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음악 아카데미의 열성적인 후원자이기도 하며, 비영리 복지단체와 동물 복지 협회, 아동 보호 협회 등에 음악으로 거둔 결실을 나누고 있다. 한 번은, 몇몇 작곡가들과 함께 자선 앨범을 제작해 수익금 100%를 음악 교육을 받기 어려운 가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음악교육과 악기를 제공하는 복지 단체에 기부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녀의 성공이 운으로부터 비롯됐을 거라 치부하지만, 티나 구오는 말한다. 자신이 했던 것 중 80% 이상이 실패작이었다고. ‘원더우먼’, 한스 짐머가 “그녀가 활을 들 때 마치 검을 드는 것 같다”라며 티나 구오에게 지어준 별명이다. 실력으로 우뚝 서 변화를 선도하고 음악의 가치를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있는 그녀에게 더없이 어울린다.

참고 | ‘Joker’ Composer Hildur Guðnadottir Is Shaking Up The Industry (Esquire, 2019), Composer Hildur Guðnadottir Finds The Humanity In ‘Joker’ (npr, 2019), In the Studio With Tina Guo (Output, 2018)

<올댓아트 박찬미 인턴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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