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에 등장하는 ‘바지 역할’을 아시나요?

올댓아트 김예림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0.01.08 18:08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0.01.08 18:09

여성 성악가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밤의 여왕 아리아’를 부를 수 있냐는 것이죠. 하물며 “조수미처럼 노래할 수 있냐”라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에게 여성 성악가는 대중 앞에서 현란한 기교와 극고음을 뽐내는 여성이라는 인식이 굳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처럼 여성 성악가가 항상 빛나는 여주인공을 연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타의 오페라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역할이 있는데요. 여성 성악가이지만 남성을 연기하는, 이른바 바지 역할입니다. 바지 역할이 무엇인지, 왜 생겼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려면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합니다.

사진ㅣ메트로폴리탄오페라 홈페이지

고대 문명에서는 어떤 장르에서도 여성 음악가에 대한 편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4세기가 되면서 여성이 교회에서 노래하는 것이 금지됩니다. 여성들은 오직 수녀원의 예배에서 노래하는 것만이 허락되었죠. 이후 여성에게 성악은 단지 취미와 교양으로만 장려됐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여성이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게 되어 본격적으로 전문 가수로서의 경력을 쌓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16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여성과 소녀들이 교회에서 노래하는 것을 허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이 주장은 종교가 절대적이었던 1688년, 교황 클레멘스 9세가 “여성은 가수로 일할 목적으로 음악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금지령을 발표함에 따라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또한, 1686년 로마 교황 인노센츠 11세는 로마 극장에서의 여성 출연을 금지시켰습니다. 극장에서 노래하는 여성은 정숙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죠.

때문에 남성과 남자아이(보이 소프라노)만이 대중 앞에서 노래를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많은 이들은 천상의 소리를 연상시킨다는 미성에 열광했습니다. 이에 17세기부터는 변성기가 오기 전, 고운 목소리를 지닌 남자아이를 거세시켜 맑은 소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카스트라토가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영화 <파리넬리>

당시 카스트라토는 최고의 인기와 부를 누렸습니다. 그들의 재력과 무대 위의 멋진 모습에 반한 많은 여인들이 카스트라토를 선망했고, 심지어 성 기능을 하지 못하는 그들과 결혼하고자 안간힘을 쓰기도 했죠.대표적으로 영화 <파리 넬리>의 주인공 ‘파리 넬리’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파리 넬리는 매 공연마다 천문학적인 출연료를 받았고, 유일무이한 음색으로 많은 청중을 열광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건 단 1퍼센트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탈리아의 가난한 부모들은 아이의 출세를 바라며 너도 나도 아들을 거세시켰습니다. 물론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에서요. 그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거나 평생을 불구로 지내며 고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근력이 없어 노래는커녕 밭일마저 할 수 없어 가난에 허덕이며 불행한 삶을 살았죠.

18세기 후반부터 사람들은 카스트라토의 소리에 흥미를 잃습니다. 카스트라토는 대체로 신화나 고대 영웅담과 같은 진지한 음악극을 노래했는데, 18세기 사람들은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며 재밌는 음악극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프랑스혁명 이후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당대 최고의 카스트라토 학교였던 나폴리 음악원에 카스트라토의 입학을 금지시킵니다. 급격히 줄어든 카스트라토의 자리를 대체할 여성 가수가 필요했고 그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남장한 여성 가수, 바로 바지 역할입니다.

(왼쪽부터)잘츠부르크 오페라 페스티벌(2003) 유튜브 영상 캡처 ㅣ 사진제공 국립오페라단

오늘 살펴볼 바지 역할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귀족 부인의 시종 케루비노와 훔퍼딩크의 <헨델과 그레텔>의 헨젤, 그리고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오르페오입니다.

■ 미소년, 케루비노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사랑의 괴로움을 그대는 아는가 Voi che sapete’ - Rinat Shaham

아주 유명한 이 곡은 백작에게 버림받아 슬퍼하는 백작부인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미소년 시종 케루비노의 아리아 ‘사랑의 괴로움을 그대는 아는가 Voi che sapete’입니다. 감미로운 멜로디 안의 감추지 못한 사랑의 벅참이 느껴지시나요? 모차르트는 미성숙한 소년의 목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처음부터 케루비노 역할을 바지 역할로 구상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바지 역할은 낮고 묵직한 음색의 메조소프라노가 부르죠.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스토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시녀 수잔나와 농부 피가로. 이 둘은 곧 있을 결혼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여쁘고 영리한 수잔나를 호시탐탐 노리는 백작은 당시 귀족 계급이 가졌던 ‘초야권’을 행사하려 기회를 엿봅니다. 여기서 ‘초야권’이라는 것이 정말 황당합니다. 중세 시대는 봉건사회로 지방 영주가 권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영주 밑에서 일하는 평민 처녀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약혼자와의 첫날밤 이전에 영주와 먼저 잠자리를 가져야만 했습니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백작의 초야권 행사를 막기 위한 등장인물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소동극입니다.

오페라의 현대화가 성행하는 지금, 케루비노가 마냥 순수한 어린 소년으로 등장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ㅣ케루비노의 심쿵연기, 꼭 감상해보세요!

앞 영상의 케루비노와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보입니다. 이 곡은 케루비노의 두 번째 아리아 ‘나도 나를 알 수 없어요 Non so piu cosa son, cosa faccio’입니다. ‘사랑을 하면 자신도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기분이 좋다가도 한없이 우울하고, 뜨겁게 타오르는듯하다가도 금세 식어버리죠’라는 가사의 노래인데요. 10대 소년이 수줍게 고백하기에는 매우 성숙한 표현이죠. 케루비노의 수줍은 모습보다는 발칙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모습을 부각시켜 색다른 연출로 나타냈습니다.

■ 호기심 많은 소년, 헨젤

빈 국립 오페라 극장 - 헨젤과 그레텔 이중창, ‘오빠, 나랑 춤추자’ ㅣ0:30초부터 감상하세요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의 헨젤 역시 바지 역할입니다. 이 작품은 모두가 알고 있는 그림형제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오페라입니다. 얼마 전 국립오페라단에서는 아주 재밌는 연출로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사진제공 국립오페라단

<헨젤과 그레텔>에서 눈여겨볼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치마 역할도 등장한다는 것이죠. 과자집의 주인인 무시무시한 마녀를 남성 성악가인 테너로 연출하여 신선함을 더합니다. 오페라에서의 이러한 연출은 고정된 성 의식을 깨뜨리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위의 두 작품, 케루비노와 헨젤 역 모두 미소년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성숙하고 연약한 어린 남자아이 역할에는 바지 역할이 제격인 것이죠.

■ 바지 역할의 변천사, 오르페오

‘에우리디체 없이 무엇하리오? Che faro senza Euridice?’ - 아일랜드 국립 오페라

앞선 바지 역할이 연약한 미소년을 대신했다면, 이번엔 조금 다릅니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를 원작으로 한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서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체를 다시 살리기 위해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로맨틱한 남자 주인공 오르페오가 바로 바지 역할입니다.

이 작품은 오페라사에서 아주 중요한 작품으로 꼽힙니다. 1762년 비엔나 초연 당시에는 드물지만 여전히 존재했던 카스트라토가 역할을 맡아 공연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카스트라토의 입학을 금지시키는 등 카스트라토가 청중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파리에서는 오르페오 역할을 테너가 맡았습니다. 또한 이탈리아 파르마 공연에서는 소프라노가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카스트라토 자리를 대신하기 위한 바지 역할의 등장을 그대로 나타내는 작품이죠.

에우리디체를 잃은 슬픔을 노래하는 이 아리아는 아름다운 명곡으로, 이 곡만 따로 발췌해 공연되기도 하는데요. 조성을 낮추어 테너가 부르기도 하고 오리지널 조성을 카운터테너, 즉 가성으로 소프라노의 음역대를 구사하는 남성 성악가가 부르기도 합니다. 이 중 카스트라토의 대를 이은 카운터테너 버전의 노래를 감상해볼까요?

카운터테너 필립 자루스키

비록 여성의 목소리를 억압시킨 데에서 비롯된 역할이었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되는 등 바지 역할의 색다른 연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페라 속 바지 역할과 함께 음악사에서 여성 성악가의 역할 변화를 살펴본 것 처럼 오페라에는 시대의 흐름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먼 훗날 지금의 창작 오페라와 새롭게 각색된 오페라를 살펴본다면 낯설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앞서 다루었던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당대 귀족 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던 모차르트의 블랙코미디 오페라입니다. 이 작품들을 짧게나마 만나보며 오페라에 한층 더 가까워지셨길 바랍니다.

참고|이용숙,<오페라 교실>, 민은기,<음악과 페미니즘>

<올댓아트 김예림 인턴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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