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누아르의 전설 ‘영웅본색’…뮤지컬도 성공일까

올댓아트 김예림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0.01.29 17:26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0.01.29 17:28

100여 년 영국 지배 끝에 1997년 홍콩 반환이 결정됐다. 새로운 시대를 앞둔 1980년대 홍콩은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극심한 허무주의에 빠져있었고,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지켜야 할 건 의리뿐’이라는 시대상으로 이어졌다.

당대 홍콩을 상징하는 영화 <영웅본색>은 등장과 동시에 남성 관객들의 가슴에 깊고 진한 울림을 남겼다. 트렌치코트에 검정 선글라스, 손에 든 쌍권총과 입에 문 성냥개비 등 수많은 누아르 영화 클리셰의 시초가 바로 <영웅본색>이다. ‘홍콩 누아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으며, 할리우드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홍콩 영화계의 전성기를 열었다. 특히 극중 ‘마크’를 연기한 주윤발은 수많은 상을 거머쥐었고 장국영과 함께 홍콩 영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영화 <영웅본색> 포스터

‘오우삼 감독의 1986년 작 <영웅본색>은 한때 암흑가를 주름잡았으나 동생의 앞날을 위해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자호’, 조직에게 배신당한 자호의 복수를 대신 갚다 절름발이가 된 자호의 의형제 ‘마크’, 그리고 경찰의 길을 걸으며 조직에 몸담은 형 자호를 경멸하는 동생 ‘자걸’, 세 남자의 우정과 가족애를 담아낸 영화다.

이처럼 수없이 회자되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는 세기의 명작 <영웅본색>이 뮤지컬로 재해석됐다. 2018년 영화계에서 <영웅본색4>로 리메이크에 도전했으나 관객의 반응은 냉담했다. 대작을 다시 한번 선보인다는 것은 리스크가 꽤나 큰 시도이다. 더군다나 스크린에서 무대로 옮겼다니, 좀체 모습이 그려지질 않는다. 그 성과는 어떨까. 원작과 비교하며 조목조목 살펴보자.

■ 스토리 라인

뮤지컬 <영웅본색> 민우혁, 박민성 배우 ㅣ 영화 <영웅본색> 스틸컷

뮤지컬은 원작 영화의 1편과 2편을 적절히 각색한 스토리로 진행된다. 또한, 영화에서는 마크(주윤발)와 자호의 동생인 자걸(장국영)이 중심이 되어 극을 이끌어갔으나, 뮤지컬에서는 가족애와 의리라는 딜레마에 처한 자호를 부각시켰다. 영화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역할인 마크보다 자호의 비중이 높아 영화에서 다 보지 못한 자호의 심리를 그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뮤지컬<영웅본색> 견숙 역(문성혁)ㅣ올댓아트 강예은

원작에서 분량이 크지 않은 견숙이 뮤지컬에선 감초다. 견숙은 교도소 수감 후 출소한 자호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는 버팀목이다. 견숙이 ‘Stand up’이라는 넘버를 부르며 춤을 출 때 다소 무거워진 극의 흐름이 완전히 뒤집힌다.

■ 홍콩의 야경

뮤지컬 <영웅본색> 무대ㅣ쇼온컴퍼니

“홍콩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영화에서 마크(주윤발)의 명대사다. 홍콩을 찾는 많은 이들은 야경을 감상하러 높은 타워를 방문하고, 홍콩 시에서도 특별히 야경쇼에 큰 공을 들인다. 그런 홍콩의 화려한 야경을 실감 나게 구현하기 위해 연출가 왕용범은 최첨단 기술을 도입한 1,000여 장의 LED 패널을 설치했다. 섬세한 원근 표현과 선명한 조명은 마치 증강현실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뮤지컬 <영웅본색> 1막 무도회 장면ㅣ쇼온컴퍼니

LED 패널이 빛을 발하는 또 다른 장면이 바로 무도회장이다. 무도회장은 자걸이 조선소 회장이자 한때 홍콩의 마약왕이었던 고 회장의 뒤를 캐기 위해 그의 딸 패기에게 위장 접근한 첫 장소로, 그들의 사랑이 싹트는 장소이기도 하다. 거대한 샹들리에와 조명, 화려한 배우들의 의상이 눈을 사로잡는다.

■ 의상&소품

뮤지컬 <영웅본색> 담배 신 재현 (1:10초부터 감상하세요)ㅣ유튜브 ‘더뮤지컬’

영웅본색에는 빠져선 안될 장면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돈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다. 뮤지컬이 시작되자마자 자호와 마크가 이 액션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실제 지폐에 불을 붙이자 관객석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는 역시다.

‘자걸’역 의상ㅣ쇼온컴퍼니

제복과 정장, 블루종과 허름한 외투... 자걸역의 한지상은 “1막에서만 10번의 의상 체인지가 있어 쉴 틈이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빠른 장면 전환 속에서 배우들의 의상과 소품 변화를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2막 말미에 마크가 “형은 새 삶을 살 준비가 됐는데, 왜 너는 형을 용서할 용기가 없는 거야! 형제란...”라는 대사를 읊는 중간 총을 맞는 연출 역시 감탄할 만하다.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 리메이크의 관건이다. 스크린을 활용한 왕용범의 연출은 단연 성공적이었다.

■ 음악
장국영이 불러 히트한 ‘당년정’, ‘분향미래일자’ 역시 한국어 가사로 재해석했다. 원곡의 쓸쓸한 감성을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계속해서 등장하는 익숙한 멜로디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귓가를 맴돈다.

뮤지컬 <영웅본색>ㅣ쇼온컴퍼니

‘분향미래일자’가 시작되면 자걸이 지난 순간들을 회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가 처한 암울한 상황을 파란 배경으로 형용했고, 그 뒤 경찰이 됐던 순간, 처음 패기를 만난 순간, 형과 마주친 순간 등이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간다. 원곡의 향수와 감수성을 해치지 않는 편곡은 기성세대에게는 향수를, 젊은 세대에게는 명곡의 압도감을 전한다.

이 두 곡 외에 새로 작곡한 곡들도 많다. 잔잔한 곡들도 있지만 급박한 상황 전개 때문에 빠른 템포의 곡이 대부분이다. 의상을 바꿔 입고 바로 무대에 뛰어든 배우들이 아직 진행에 익숙지 않은 건지 음정이 불안정하고 템포가 뒤처지기도 했다.

■ 다른 느낌의 <영웅본색>
뮤지컬 <영웅본색>은 영화를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따라서 원작과 아주 동일할 것이라고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겠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영웅본색은 스크린과 또 다른 인상을 준다. 방대한 양을 제한된 공간과 시간에 다 구현하기엔 부족할 수 있으나, 원작이 주는 감동만은 변하지 않았다. 관객 중에 눈물을 훔치는 분들도 있었으니까.

뮤지컬 <영웅본색> 출연진들ㅣ올댓아트 강예은

<영웅본색>은 오늘 새로운 것이 내일 옛 것이 돼버리는 빠른 세상 속에서 우리가 진정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상기시킨다. 이 뮤지컬이 남성 관객만을 사로잡을 거란 편견은 무의미하다. ‘의리’와 ‘가족애’라는 대주제를 넘어 화려한 무대를 경험하고, 추억의 명곡을 다시 한번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관객이 즐기기엔 충분하다.

■ 뮤지컬 <영웅본색>
2019.12.17 ~ 2020.03.22
서울 한전아트센터
관람시간 150분 (중간휴식 20분)
미취학 아동 입장 불가
유준상, 임태경, 민우혁, 한지상, 박영수, 이장우, 최대철, 박민성,
김대종, 박인배, 제이민, 송주희, 정유지, 이정수, 문성혁 등 출연

사진·자료|쇼온컴퍼니

<올댓아트 김예림 인턴 allthat_art@naver.com>

뮤지컬 기사 더보기

이런 기사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