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더 소름 ② ‘나이브스 아웃’ 속 그 음악

올댓아트 김예림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0.02.20 10:20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0.02.20 10:22

“본문은 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나이브스 아웃’의 명대사를 패러디 해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수상을 축하하는 게시글ㅣ‘나이브스 아웃’ 트위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오스카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포함 4관왕을 차지했습니다.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이어 봉준호 감독이 써 내려가는 새로운 역사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데요. 저번 ‘알고 보면 더 소름’ 시리즈로 알아봤듯, <기생충>의 배경 음악엔 심오한 뜻이 담겨 있었죠. 이번 시리즈에선 <기생충>과 함께 오스카 각본상 후보 명단에 올랐던 라이언 존슨 감독의 작품 <나이브스 아웃> 속 음악이 소름 돋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 스틸컷ㅣ네이버영화

<나이브스 아웃>은 ‘미국판 기생충’이라 불릴 만큼 날카로운 시각으로 미국 사회를 풍자한 작품입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미국에서 대두되고 있는 인종주의, 배타주의, 고립주의, 자유와 난민에 대한 여러 시각을 대변하는데요. 이를 비틀어 웃긴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블랙 코미디로 만들어버렸죠.

영화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 ‘할런’이 85세 생일에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그의 죽음의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탐정 브누아 블랑이 사건의 퍼즐을 맞추며 극이 진행되는데요. 극중 브누아 블랑이 할런을 죽인 범인을 찾는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그의 어머니 ‘워네타’를 찾았을 때 흘러나온 음악, 기억하시나요? 그 음악을 배경으로 블랑이 말 없는 워네타를 설득하고, 이때 워네타에게서 범인과 관련된 중요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스틸컷, ‘워네타’역ㅣ네이버영화

이 장면에서 나오는 음악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 아리아 ‘Ah, fors’e lui... 아 그이인가‘입니다. 많은 관객들이 이 장면을 워네타의 짧은 등장이었음에도 가장 강렬하고 심오했던 장면으로 손꼽는데요. 과연 감독이 이 장면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리아를 사용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라이언 존슨 감독의 빅 피처, 한번 살펴보시죠.

영화 <나이브스 아웃> 삽입곡,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ㅣ유튜브 (1:28 부터 감상하세요)

▼ 아래의 본문은 영화 결말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베르디는 세기의 오페라를 탄생시켰습니다. 당시 대중을 사로잡은 화려한 기교 중심의 ‘벨칸토 오페라’와 신선한 스타일의 작품으로 세상을 지배했던 작곡가 바그너의 작풍이 대두될 때, 베르디는 묵묵히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영화 <라 트라비아타>ㅣ네이버영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오페라를 모르는 분들도 많이 들어봤을 아리아, ‘축배의 노래’로 유명합니다. ‘라 트라비아타’라는 제목의 뜻은 이태리어로 ‘길을 잘못 든 여자’라는 의미입니다. 여주인공 ’비올레타‘는 파리 사교계의 여인으로, 향락을 일삼고 귀족들과 어울리며 특정 남성들의 사교계 모임에 동반하는 등의 일을 했던 직업여성입니다.

베르디는 당시 실제 존재했던 사교계 직업 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는데요. 이 때문에 1853년 베네치아의 한 극장에서 이 오페라가 초연했을 때 관객들은 야유를 보냈습니다. 옛날이야기가 아닌 동시대의 이야기를 관객의 대부분이 귀족인 오페라 무대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내다뇨. 베르디는 성난 관객의 등쌀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이 이야기의 배경을 백 년 전, 16세기로 바꿨습니다.

그렇다면 라이언 존슨 감독은 도대체 왜, 아주 오래전 사치와 향락에 빠졌던 여주인공 비올레타의 사랑 이야기를 추리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에서 사용한 걸까요?

■ <라 트라비아타>의 인물들,
<나이브스 아웃>의 인물들
“워네타와 비올레타”

영화 <나이브스 아웃>스틸컷ㅣ네이버영화

트롬비 가족들은 할런의 어머니인 ‘워네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몇 세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는 사람이 없죠. 워네타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왜 그에겐 아무런 위로도 하지 않는 걸까요. 왜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는 걸까요. 워네타가 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목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조차 안 한 걸까요?

트롬비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 탐정 브누아 블랑이 유일하게 워네타를 찾습니다. 창가에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워네타에게 아들을 잃은 슬픔을 위로합니다. 동시에 흘러간 세월과 시간의 깊이 속에 그가 걸어왔을 순간들을 음미합니다. 그리곤 워네타가 이 사건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워네타에게 할런의 죽음에 대해 묻지 않아 말을 안한 것인지, 노쇠해 말할 기력이 없던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울하고 아련한 분위기 속에서 이 음악이 흐를 때 블랑은 지나간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위로를 건넵니다. 그 위로가 진심일지, 그저 증언을 얻기 위한 가벼운 말이었을지 워네타는 미심쩍은 듯 블랑을 바라보고, 장면이 바뀝니다.

영화 <라 트라비아타>스틸컷ㅣ네이버영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는 매일 밤 파티와 술로 시간을 보내다 폐결핵이 악화됩니다. 그를 1년 동안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사랑했던 알프레도는 어느 날 파티에서 비올레타에게 ‘언젠가 그 아름답던 날 Un di felice eterea’이라는 아리아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웃어넘기며 거절하지만 곧 알프레도의 진심을 알고 그 고백을 조용히 홀로 음미하죠. 이때 부른 아리아가 바로 <나이브스 아웃>에 등장한 ‘Ah, fors’e lui... 아 그이인가’입니다.

처음으로 찾아온 진실한 사랑에 맘이 설렙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 사랑을 받아도 될지, 이 남자의 고백이 진심일지 고민하죠. 이후 이어지는 ’언제나 자유롭게... Sempre libera‘라는 아리아는 어두운 과거와 깊어가는 폐결핵에 절망하며 이대로 내내 자유롭게 살겠다고 외칩니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며 깊어지는 사랑에, 비올레타는 모든 걸 버리고 알프레도와 함께 도시 외곽으로 떠납니다.

<나이브스 아웃>의 OST 녹음한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아 그이인가 Ah forse lui’ㅣ유튜브 (영화 등장은 1:19부터)

워네타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나지막이 비올레타의 노랫소리가 흐르죠. 알프레도의 사랑 고백이 진심일지 의심쩍게 고민하며 자신의 지난 과거를 돌아보는 비올레타의 대사가 워네타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위로가 워네타의 마음을 적셨는지, 사건이 있던 날, 랜섬을 봤다고 얘기합니다.

“마르타와 비올레타”
비올레타는 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리며 고급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즐기며 마치 그들 구성원의 일원이 된 듯했죠. 하지만 알프레도와 진정한 사랑을 하려 하자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그녀를 찾아옵니다. 그리곤 자신의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오빠인 알프레도가 매춘부와 함께 산다는 소문 때문에 난처하니 알프레도와 헤어지라는 요구를 합니다. 아주 젠틀하지만 교묘하게 비올레타를 깎아 내리며 설득하죠.

영화 <나이브스 아웃>스틸컷ㅣ네이버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마르타는 할런을 성심성의껏 간병했습니다. 그가 지닌 따듯한 마음씨에 트롬비 가족들은 모두 마르타를 가족의 일원이라 생각했죠. 할런 사망 후 갈 곳을 잃은 마르타를 경제적으로 도와주겠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할런의 모든 유산이 마르타에게 상속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돌변합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까지 퍼붓죠. 마르타의 집에 찾아와 좋은 변호인을 써서 어머니의 영주권 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 상속을 포기하라고도 합니다. 트롬비 가족에 의해 설득 당하고 있는 마르타의 상황은 비올레타의 상황과 꽤 많이 닮았습니다.

■ 베르디와 라이언 존슨이 비판한 사회
미국 태생의 라이언 존슨 감독은 오페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남다르다고 합니다. 미국 최고의 오페라단인 메트오페라의 2019-20 시즌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의 연출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고, 메트오페라가 운영하는‘아리아 코드’라는 팟캐스트의 애청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존슨 감독은 자신의 트위터에 메트오페라 게시글을 자주 리트윗하고 있죠.

영화 <나이브스 아웃>스틸컷ㅣ네이버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트롬비 가족들은 모두 사회에 관심이 많습니다.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도 하고, 인권에 대해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뒤바뀌자 불법체류자인 마르타의 어머니를 약점 삼아 상속을 포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트롬비 가족들은 마르타의 국적을 우루과이, 파라과이라고 하는 등 제대로 알지도 못했죠. 그뿐인가요. 간병인 ‘마르타’를 가정부로 착각한 형사에게 불같이 화냈지만, 먹다 남은 접시를 자연스레 마르타에게 건네는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멸시를 지속했습니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어떨까요. 상류층 인물들은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너도나도 모두 친구인 듯 노래를 부르고 축배를 들지만, 그동안의 모든 삶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떠난 비올레타에게 그 자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습과 편견이 비올레타와 알프레도를 갈라놓고, 마침내 비올레타는 폐결핵으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죠.

영화 <라 트라비아타>스틸컷ㅣ네이버영화

베르디는 아내와 아이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 후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진 여인이 있었는데요. 소프라노 스트레포니입니다. 당시 여가수는 많은 이들 앞에서 노래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매춘부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베르디가 스트레포니와 동거하며 주변의 비난과 따가운 시선을 받았던 건 당연지사죠. 이러한 인습에 지친 베르디는 당시 사회를 비판하고자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작곡했습니다. 떳떳하지 못한 과거가 있으나, 모두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여성을 바라보는 편협적인 사람들의 시선을 담아냈죠.

트롬비의 가족들처럼, <라 트라비아타>의 등장인물들처럼, 우리 주변에 이중잣대는 만연합니다. 마르타와 워네타, 비올레타는 모두 이민자, 고령자, 창부라는 사회 변두리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가치는 이들의 유용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비올레타가 파티에서 즐거움을 줬고, 마르타가 트롬비 가족의 일을 도와줬던 것 처럼요. 하지만 비올레타가 자유롭게 사랑하려 했을 때, 마르타가 자신이 정당하게 부여받은 상속권을 주장하려 할 때, 워레타가 나이가 들어 약해져 갈 때 우리 사회는 그들을 짓밟고 무시합니다.

라이언 존슨 감독도, 작곡가 베르디도 이런 시대적 상황을 비판하고 싶었을 겁니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은 고전적인 탐정 추리물인 듯하지만 그 이면엔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 속 음악의 의미를 알았으니, 다시 한번 영화를 감상하며 숨은 상징물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클래식 명곡 명연주> 이용숙 , 네이버지식백과

David Salazar

<올댓아트 김예림 인턴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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