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는 피할 수 없는 숙명같은 작품”…‘휴먼푸가’의 배요섭 연출

올댓아트 박송이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0.06.05 10:44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0.06.05 10:52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많은 순간에서 예술가들은 영감을 얻는다. ‘영감’이 뭐길래, 예술가들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걸까. 10명의 아티스트에게 그들만의 ‘영감님’에 대해 물었다. 주제는 크게 세 가지다. 영감을 주는 대상, 영감을 위한 습관, 영감을 주는 친구.
인터뷰는 릴레이 형식으로 진행된다. 인터뷰를 한 아티스트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또 다른 아티스트에게 다음 인터뷰의 배턴을 넘긴다. ’아티스트의 영감님‘ 마지막 열 번째 주인공은 김윤규 안무가가 추천한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배요섭 연출이다.”

서울 남산예술센터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시기에 맞춰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연극 <휴먼푸가>를 공연할 예정이었다.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지난 해 초연된 이 작품은 “해결되지 못한 광주 문제를 신체를 통해 연극, 춤, 설치예술을 포괄하면서 혼신의 힘으로 창작한 품격 있는 공연”이라는 평을 받으며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주관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선정된 바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5월 예정됐던 <휴먼푸가> 공연은 현재 11월로 연기된 상태다. 한편 올해로 설립된 지 20주년이 되는 공연창작집단 ‘뛰다’는 이번 <휴먼푸가>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산될 예정이다. 2010년 강원도 화천으로 터전을 옮긴 ‘뛰다’는 그간 지역주민, 해외 예술가 등과 함께 하는 다양한 실험적인 협업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번 ‘아티스트의 영감님’에서는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대표인 배요섭 연출을 만나 ‘영감’에 대한 질문 외에도 <휴먼푸가> 창작 뒷이야기와 ‘뛰다’의 지난 20년에 대해 물었다.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배요섭 연출

-<휴먼푸가> 공연이 아쉽게 11월로 연기됐습니다. 처음 <휴먼푸가>를 기획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80년 광주에서 일어났던 사회적 충격을 처음 만났던 건 스무살 때 광주를 방문했을 때였어요. 터미널에 내렸을 때 대합실 벽면에 빛바랜 참혹한 사진들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해요. 그날 이후로 이 사건은 제 삶속으로 큰 질문을 던져준 것 같아요. 2009년 이후 사회적 고통에 시선을 돌려 작업을 하게 된 것도 결국 휴먼푸가를 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는 생각이 이젠 들어요. 예술가로서 회피하지 않고 직면할 수밖에 없는 작업들이 있잖아요. 한강 작가와는 이전부터 같이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소년이 온다>는 그런 면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같은 거였어요. 2018년 봄쯤,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 같아요.”

-2012년에도 고통을 주제로 한 <고통에 대한 명상>을 공연하셨죠. ‘고통’이라는 주제는 늘 염두에 두시는 것 같습니다.

“고통은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주제에요. <휴먼푸가> 작업을 하게 된 배경에는 제 개인적인 경험도 작용을 했던 것 같아요. 2014년에 왼쪽 가운데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있었는데, 수술을 통해 겨우 붙였어요. 손가락 하나 절단된 건데 단지 ‘아프다’라는 것만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고통을 느꼈어요. 고통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는데, 정작 사고가 나니 ‘내가 고통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때 마침 <소년이 온다>가 출간돼 읽게 됐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고통을 체험하는 경험을 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소설이 이렇게 고통을 전달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또 그 때 당시 겪은 제 손가락의 고통과 맞물리면서 흔히 말하는 ‘현타’가 왔어요. 처음 공연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한 건 2018년이었지만, 2014년의 경험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휴먼푸가’ 공연 장면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한 폴란드 극단의 작품 <더 보이 이즈 커밍>도 이번에 내한해 공연할 예정이었는데, 코로나19로 무산됐습니다.

“네, 폴란드에서도 내한 공연을 하고 저희도 폴란드에 가서 공연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로 둘 다 취소됐어요. 대신에 너무 아쉬우니까 영상으로라도 서로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어요.”

-같은 원작으로 한 두 공연이 각기 어떤 울림을 줄지 궁금한데요. 폴란드 공연을 직접 보셨는데, 어떠셨나요?

“<더 보이 이즈 커밍>은 <소년이 온다>를 1부로 하고, 2부에서는 10년 후 광주와 비슷한 상황이 폴란드에서 벌어졌다는 설정으로 극을 전개하고 있어요. 지금 폴란드에 극우정권이 집권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국가폭력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고 해요. 제가 폴란드 말을 전혀 모르니까 극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똑같은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나 우려들은 전달되더라고요.”

-<휴먼푸가>를 연출하실 때 연출에 주안점을 두신 부분이 있으셨나요?

“‘사회적 고통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했어요. 저는 고통은 몸을 통해서 기억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생명체는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유전자 속에 기억들을 담는다고 생각하는데, 고통 또한 몸의 유전자 속에 기억된다는 건데요. ‘사회정의’라는 목적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기억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그 지점에서 생각을 발전시켜나갔어요.”

-고통을 몸으로 표현한다는 게 어려웠을 것 같아요.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할지를 찾아가는 게 어려운 지점이었어요. 그날의 사건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배우들이 몸을 통해 그날의 사건을 같이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했어요. 소설 속 등장인물이 겪었던 순간들을 어떻게 몸으로 발언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죠. 고통의 깊이는 즉각적이면서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연결될 수 있는 것이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 분들에게는 대사로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계속 40년 전의 고통스럽고 아픈 순간들에 생각과 감각이 머물러 있어야 하다 보니까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 했고 또 실제로 몸이 아팠던 배우들도 있었고요. 배우들이 특정 인물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인물이 겪었던 시간과 공간, 사건들을 몸으로 이해해야 했었는데요. 그러기 위해 관련 자료들도 많이 찾아봤어요. 광주뿐만 아니라 광주와 비슷한 역사적 사건들까지 알아보고 배우들이 좀더 몸으로 감각할 수 있도록 그날의 기억이 담긴 광주의 장소들을 찾아가기도 했죠.”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를 찾아가셨나요?

“예를 들면 광주의 국군통합병원 같은 곳을 찾아갔는데요. 이곳은 5.18 당시 계엄사에 연행돼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부상을 당한 시민들이 끌려와 치료를 받았던 곳이에요. 이곳에까지 계엄사 수사관들이 파견돼 시민들이 치료 과정에서 취조를 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고 실제 사망자도 있었다고 하고요. 지금은 폐허가 됐는데, 폐허가 된 건물 자체가 갖고 있는 에너지가 사람의 몸과 굉장히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 공간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배우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 왔고, 그런 감각적 경험들을 통해 배우들이 무대에서 진실된 순간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휴먼푸가’ 공연 장면

-<휴먼푸가>가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셨어요. ‘뛰다’는 완전히 해산하는 건가요?

“‘뛰다’라는 공동체로 작업하는 방식 자체를 접는 거죠. 저에게 공연은 개별 작업자의 생각을 구현하는 게 아니에요. 같이 살아가면서 고민하고 발견한 것들을 공연이라는 형식으로 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같이 길을 찾아가는 게 저에게 되게 중요했어요.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 제가 추구했던 방식이 여러 가지 이유로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결정을 내리게 됐어요. 단원들 개인의 창작욕구와 변해가는 관계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이전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가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화천에서 보낸 10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네,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요. 첫 번째는 예술가들이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하는 재미있는 ‘작당’들을 많이 해봤다는 거고요. 두 번째는 화천의 예술텃밭이라는 공간에서 다른 문화,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과 만남을 계속 가져왔던 거예요. 그 두 가지가 제일 큰 변화였던 것 같습니다.”

-주민들과 함께 하는 작업은 어떠셨나요?

“화천의 주민들과 화천에서 전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찾아보고 한 달 동안 같이 여러 가지 크기의 인형도 만들고 퍼레이드도 하고 주민들 100명 정도가 출연하는 공연을 하기도 했어요. 2014년부터 거의 매해 했었는데, 힘들긴 했지만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었어요. 또 과천, 안산, 서울, 광주, 안동, 고양 등 전국을 돌면서 그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유목 연극’을 진행하기도 했어요. 사전에 지역에 대한 조사를 마친 후 지역 주민들과 일주일 동안 워크숍을 해서 같이 공연을 올리는 프로젝트였는데요. ‘뛰다’의 공연에는 인형 오브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인형들이 크다 보니까 5톤 트럭 3대에 인형들과 저희가 먹고 자는 텐트, 무대 세트를 싣고 전국을 돌아다녔죠.”

-해외 예술가를 초대해서 같이 무대를 만들기도 하셨다고요?

“서울에 있었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이죠. 화천이라는 시골로 가니까 오히려 예술가들의 글로벌한 네트워크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화천에서 했던 공연 중 <쏭노인퐁당뎐>이라는 작업이 있었는데, 호주의 유명한 예술가 집단인 ‘스너프퍼펫’과 함께 한 공연이었어요. 실제 화천에 생존해 계신 99세 송남석 할아버지가 1938년 화천댐이 생기면서 수몰된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걸 듣고 모티브를 얻어 만든 작품이에요. 또 2015~2016년에는 일본의 ‘새의 극장’이라는 단체와 작업을 진행했는데요. ‘시의 교실’이라는 작품을 일본에서 올리기도 했어요. 일제 강점기 이후의 역사와 아픔에 대해서 두 나라의 관점을 묶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도 막상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관점이 너무 다르고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도 너무 달라서 쉽지 않은 작업이었어요. 또 영국, 한국, 일본, 인도, 호주 예술가 16명을 모아서 창작 실험 작업을 한 레지던스 프로젝트도 있었고요. 화천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자주 벌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2011년 공연된 ‘쏭노인퐁당뎐’ 영상|유튜브

-‘뛰다’와 관련한 현안이 많다보니 저희 인터뷰의 주제인 영감에 대한 질문이 늦어졌습니다. 보통 영감은 어디서 얻으시나요?

“영감이 어디서 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영감이 일종의 ‘화두’같다는 생각을 해요. ‘화두’는 답이 있는 게 아니라 질문, 하나의 명제 같은 거잖아요. 어떤 질문이나 명제가 내 안에서 머물러 있는 시간들이 있거든요. 씨앗이 자라듯, 제법 오래 시간이 쌓이다보면 영감을 만나게 되는 때가 오는 것 같아요. 내가 생각을 따라가면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발견이나 깨달음에 가까운 건데요. 원래 있었던 것이지만 다른 것을 보느라 보지 못했던 것을 갑자기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내 생각과 몸이 하나의 질문에 잘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영감을 만나는 순간이 온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순간의 질문이 무엇인지를 잘 붙들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질문을 잘 붙들고 있으면 작업을 할 때 고민하던 것이 어느 순간 스르르 풀린다는 의미인가요?

“케이스마다 다르겠지만, 예를 들어 지금은 ‘아름다움’을 화두로 잡은 지 6개월 정도 됐어요. 제가 다음에 하려는 작업이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거든요. 사실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은 20년 가까이 작업하면서 갖고 있었던 것이기도 해요. 예술가가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름다움이 어떻게 예술가를 움직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이되는지 등을 늘 질문해 왔어요. 이 질문들을 풀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내년 가을쯤 무대에 올리려고 계획하고 있는데요. 작품을 준비하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을 두고 책이나 영화나 영상, 강연들을 무작정 보고 있어요. ‘아름다움’이라는 씨앗을 주변으로 여러 경험과 생각들이 쌓이도록 놔두는 거죠.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넘쳐흐르고 또 비워질 때가 오거든요. 그렇게 비워지고 나면 남아 있는 게 뭔지 알게 되고, 그 다음에는 그 남아 있는 것을 그냥 하면 돼요. 저는 이런 과정을 믿는 편이에요.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같이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해줄 수 있는 것들을 믿고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연출인 제가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고민이나 질문들을 던져놓을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작업을 하시는 데 있어서 다른 예술가들과 교류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보통은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들이 제가 갖고 있는 생각보다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보다 그냥 놔두는 게 훨씬 좋아요. 물론 연출가의 입장에서 책임져야 할 부분은 있으니까 명확한 컨셉과 안정된 틀을 만들어주는 건 굉장히 중요해요. 그게 잘 만들어지면 그 안에서 더 새롭고 재미있는 것들이 생성될 수 있어요.”

-특별히 지키려고 하는 습관이 있으신가요?

“저는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해요. 연습을 할 때도 5분 단위, 10분 단위로 계획을 세밀하게 짜는 편이에요. 물론 거의 지켜지지는 않죠. 하지만 시작하기 전에는 스케줄이 정확하게 나와 있는 게 중요해요. 일주일 연습이면 일주일에 대한 계획이 있어야 하고, 3주 연습이면 3주에 대한 계획이 나와야 해요. 하루가 똑같이 흘러가는 게 저에게는 중요한데 그 리듬 안에서 좀 더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거든요. 물론 배우들 중에는 저의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서 연습할 때 힘들어 하기도 해요. <휴먼푸가> 처음 연습할 때 아침 7시부터 한 시간 반 정도 신체훈련을 한다고 했거든요. 2주 정도 했는데 배우들 중에 너무 힘들어서 안 되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서 시간을 늦추기도 하고 옮기기도 했어요. 어쨌든 저는 기본적으로 정확한 일정에 맞춰 매일 아침 일찍 일과를 시작해 저녁 먹기 전에 일을 끝내는 걸 좋아해요.”

2017년 진행된 예술텃밭레지던스 예술가들의 놀이터

-현재 좋은 자극을 주고받는 네트워크가 있으신가요?

“‘뛰다’가 2011년부터 인도예술가들과 작업을 해왔는데, 인도의 예술가들이 저에게는 자극을 많이 주는 것 같아요. 제가 2017년에 안식년을 갖고 인도에 쉬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기회가 닿아 그 곳에서 인도예술가들과 작업을 하게 됐어요. 한국의 옛날이야기와 인도의 신화를 합쳐 공연을 만들었는데 정말 좋았던 기억이에요. 공연 연습하던 시간도 좋았고 특히 인도에 머무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6시마다 ‘깔라리빠얏’이라고 하는 인도 무술을 수련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시간이 참 좋았어요. 그런 기운들이 몸에 쌓이니까 인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고 인도 예술가들과 작품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인도예술가들과 같이 작업을 하고 싶어서 어떻게 판을 벌려 볼지 모색 중에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뛰다’를 마무리하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일단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할 시점이라고 봐요. 새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전의 것들을 잘 정리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서 내년 상반기까지는 20년 동안 ‘뛰다’가 했던 작업들, 지나온 여정들을 아카이빙하고 이를 전시 형태로 공유하는 작업을 해보려고 합니다. 저와 더불어 연출가 이주야씨와 배우 황혜란씨, 최재영씨 4명이 주축이 돼 ‘뛰다’ 작업에서 중요했던 연기의 방법론, 인형과 오브제, 연출론, 화천의 청소년들과 했던 작업들 등을 주제로 4-5권의 책을 내려고 해요. 또 ‘뛰다’가 그동안 27개의 작품을 했는데 그 중 20개 정도를 추려서 공연대본집을 내려고도 합니다. 내년 6월쯤에는 출판기념회 겸 전시공연을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뛰다’의 작업은 멈추지만 화천에서의 다양한 예술활동은 계속 하시는 거죠?

“네, 지금 화천의 문화공간 예술텃밭이 예술가들의 네트워크로서 유용한 공간이 돼 주고 있어요. 저희가 화천에 들어간 게 계기가 돼, 화천군과 행안부의 지원으로 폐교 2개를 보수해 스튜디오, 작업공방, 국장, 숙소를 갖춘 공간을 만들었거든요. ‘뛰다’의 작업공간이면서 다른 협업작업 예술가들이 사용해 왔는데, 이제는 레지던스 공간으로 확장해 좀더 많은 예술가들과 팀이 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됐어요. 그 동안 예술텃밭에서는 예술축제도 하고, 국내예술가와 해외예술가들을 초대해 일종의 레지던스 축제를 했었어요. 그 때 만났던 예술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맺어서 따로 알아서 작업을 이어가기도 하더라고요.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해주는 역할을 해서 좋았고 앞으로도 화천에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진 |배요섭 제공

<올댓아트 박송이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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