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피아노 속의 ‘숨은 장치’, ‘루테알’을 아시나요?

정은주 음악 칼럼니스트
입력2020.06.28 01:51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0.07.14 18:56

“정은주의 클래식 수다 : 쉽고 가볍고 즐거운 클래식 음악 이야기를 나눠요”

ⓒ 유로피아나 (www.europeana.eu)

■특허번호 278726

“내가 아는 가장 놀라운 발명품”
- 프랑스의 오르가니스트 조셉 보넷이 클루텐의 발명품에 대해 남긴 말 -

조지 클루텐은 평생 21개의 악기 관련 발명품을 개발한 발명가이자 오르간 조립가입니다. 그는 벨기에 왕립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했지만, 훗날 루테알을 개발하는 등 악기 관련 발명에 힘을 쏟았습니다. 1910년 벨기에에서 개최되었던 세계박람회에서 그의 발명품이 그랑프리를 받기도 했습니다. ⓒ위키피디아

1919년 1월 28일 벨기에 특허청은 무척 클래식한 도구를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특허번호 278726을 수여받은 이 도구의 이름은 루테알(Lutheal)입니다. 루테알은 키보드 혹은 손으로 누르는 현악기의 음색을 바꿀 수 있는 장치입니다. 이 신기한 도구는 벨기에 사람 조지 클루텐(George Cloetens, 1871~1949)가 개발했는데요. 그는 1910년 벨기에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던 발명가이자, 벨기에 왕립 음악원에서 수학했던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발명 이외에도 오르간 조립가로 활동하며, 평생 21개의 악기 관련 발명품을 개발했습니다.

클루텐은 벨기에 특허청에 루테알을 정식으로 등록한 후, 한 가지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루테알이 피아노면 피아노, 바이올린이면 바이올린 등 하나의 온전한 악기가 아닌 탓에 소유권을 주장하기가 애매한 상황에 처한 것인데요. 루테알은 악기의 음색을 바꾸어주는 일종의 역할 장치일 뿐이니까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그는 3건의 루테알을 추가적으로 개발했습니다. 벨기에 특허청도 이러한 점을 인정해, 그의 새로운 루테알에게 특허번호 280282, 292081, 306002를 부여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루테알은 총 4종류가 되었습니다.

■피아노에 뿌린 마법가루 루테알

파리 음악 박물관의 큐레이터 띠에리 매니겟이 영국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유투브 채널에 출연, 루테알을 설치한 피아노에 대해서 설명하는 영상입니다. 기존의 피아노 음색과 루테알을 설치한 피아노의 소리를 한 번 비교해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루테알에는 마치 오르간의 스탑과 같은 버튼도 있고요, 꽤 신기합니다.

위에 첨부해드린 영상은 여러분이 루테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영상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음색이 무척 재미있죠. 루테알을 장착한 피아노의 음색은 마치 ‘안개 속에서 드라이브하는 기분’ 같다고 할까요. 무언가 선명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소리의 형태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맑은 날이라면 쌩쌩 속도를 냈을 텐데, 시야가 좋지 않은 날이라 조금 천천히 밟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피아노의 음색을 이런 방식으로 변형할 수 있다는 점 자체도 독특합니다. 루테알을 통해 음향도 절반 정도로 줄어든 것 같고, 음색의 폭도 다소 좁아진 듯합니다. 음색이 기존 피아노 보다 가볍고 깔끔해졌고요. 고음역의 트릴 부분은 마치 플루트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한 마디로 피아노인 지 아닌지 헷갈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장치죠.

“루테알은 그랜드 피아노, 오르간, 하모니움의 조합이다”
- 음악학자 커트 삭스가 루테알에 대해 남긴 의견 -

■루테알을 위해 곡을 쓴 최초의 작곡가 라벨

1924년 모리스 라벨은 최초로 루테알을 위한 작품 <바이올린과 루테알을 위한 랩소디 :치간느>를 발표했습니다. 라벨은 루테알의 매력을 세상에 알린 유일한 작곡가입니다. ⓒ위키피디아

프랑스의 국민 음악가, 모리스 라벨은 루테알을 위해 곡을 쓴 최초의 작곡가입니다. 1924년 10월 15일 파리에서 <바이올린과 루테알을 위한 랩소디 :치간느>를 발표했는데요. 당시 루테알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덜컹거리는 뮤직 박스를 연상시키는 악기’, ‘다양하고 정교한 음향을 연출하는 악기’ 등의 리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루테알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오직 라벨만이 루테알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 해 라벨은 오페라 <어린이와 마법>의 초연 무대에서도 루테알을 등장시켰는데요. 이 두 작품에 사용되었던 루테알은 안타깝게도 화재 사고로 사라져버렸습니다.

라벨 이전에도 작곡가 티게인이 루테알을 사용하라는 지시를 적은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루테알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심지어 라벨이 루테알로 연주하라는 지시를 적은 악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평범한 피아노로 루테알의 역할을 연주하곤 했습니다.

사실 루테알은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도태된 장치일 뿐입니다. 현재 루테알이 무대에서 활발히 제 역할을 다 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1970년 네덜란드의 바이올리니스트 테오 올로프가 헌신적인 노력을 펼쳐 지하 창고에서 끄집어내지 않았다면, 영영 루테알은 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올로프가 루테알의 존재를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 음악가나 작곡가는 루테알을 들어는 보았다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브뤼셀 음악원 악기 박물관 4층에 오리지널 루테알이 장착된 플레이엘 그랜드 피아노가 전시 중입니다. 루테알은 발명되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소수의 애정을 받는 장치입니다. 음악적 취향이 다른 것은 누구도 탓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좌 ⓒ위키피디아, 우 ⓒ유로피아나(www.europeana.eu)

올로프는 “브뤼셀 음악원 악기 박물관의 지하실 어딘가에 녹스는 고철 더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루테알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당시 프랑스 악기 박물관의 큐레이터였던 로저 코테에게 보냈습니다. 올로프의 노력 덕분에 루테알은 고악기 복원가와 음악가, 피아노 복원가 등의 손끝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1911년 벨기에 악기 박물관에서 플레이엘 피아노에 탑재되었던 루테알을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600시간의 작업을 통해 1979년 4월 루테알을 장착한 플레이엘 피아노가 태어났죠. 이 피아노가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단 한 대의 오리지널 루테알이고요. 현재 팬데믹으로 오는 10월까지 운영을 중단한 벨기에 악기 박물관 4층에 전시 중입니다.

소수의 각별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루테알은 지금도 유명하지 않습니다. 고악기 전문가들의 불규칙적인 연구나 루테알이 소장된 악기 박물관 자체의 프로그램 등이 아니라면 세상에 알려질 일이 거의 없는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늘 새로운 것과 세상에 없던 것을 찾는 작곡가들이 언젠가 루테알을 다시 무대로 올릴지도 모르니까요!

참고| 위키피디아, 브뤼셀음악원악기박물관(www.mim.be), 유로피아나(www.europeana.eu)

■현재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필자는 국내 여러 포털 사이트와 각종 매체 등에 클래식 음악 콘텐츠를 기획·연재 중이다. 카카오페이지 신인작가 공모전 2기 당선작가(2019)로, 영국 현악 전문지 <스트라드> 한국판과 <더 트래블러>, <톱클래스> 등에서 에디터·프리랜스 에디터로 일했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 과정을 수료했다.

<정은주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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