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을 때 더 불행한, ‘가족’에 대한 작품 3

올댓아트 김지희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0.11.13 10:45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0.11.17 21:11

‘가족’이라는 주제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에게 공감을 사고 인기가 있는 스테디셀러입니다. 다양한 모습을 가진 가족들, 부모와 자식 사이의 내리사랑과 치사랑, 형제자매들과의 우정과 성장 모두 가족 드라마에서 즐겨 찾는 화제들이죠.

연극 <아들> 역시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보편적인 주제를 건드립니다. 다만 이번에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들, 니콜라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환자를 돌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런 경제적 보상을 바랄 수 없는 가족 구성원을 돌봐야 하는 경우, 돌봄 노동을 하는 동시에 생계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것 때문에 관계를 화목하게 유지하는 게 더더욱 힘들어지죠.

병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어떤 균열을 내는 걸까요? 가족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병을 가지고 있는 자녀와 그들을 대하는 부모를 그린 작품들은 우리에게 무얼 전달하고 싶은 것일까요? 병과 싸우며 가족 간의 의미를 찾아가는 작품들을 모아봤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아들을 대하는 부모의 이야기, 연극 <아들>

연극 <아들> 공연 사진 | 연극열전

연극 <아들>의 니콜라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입니다. 니콜라는 어머니인 안느와 살고 있고, 안느는 사는 걸 버거워하는 니콜라와 함께 사는 것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이혼하고 소피아와 가정을 꾸린 피에르에게 니콜라를 맡깁니다. 니콜라는 피에르와 생활하면서 점점 좋아지는 듯이 보였습니다. 피에르, 소피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서로 대화하면서 이해하는 시간도 가집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의도치 않게 니콜라가 상처받는 사건이 생기고 나서부터 균열이 일어납니다. 니콜라가 숨겼던 비밀이 드러나고 또 한 번 니콜라의 가족에게는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갑니다. 마침내 니콜라는 병원에 입원하고, 이를 지켜보는 피에르와 안느는 가슴이 찢어지죠. 그래서 그들은 니콜라를 얼른 퇴원시켜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작가 플로리앙 젤레르는 2010년 희곡 <어머니>와 2012년 <아버지>를 연작으로 발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발표된 <아들>까지, 그의 가족 삼부작에서 <어머니>의 어머니는 ‘빈 둥지 증후군’을, <아버지>의 아버지는 ‘알츠하이머’를, 그리고 <아들>의 아들은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연극 <아들> 공연 사진 | 연극열전

극 중 초반, 니콜라는 아파트처럼 꾸며져 있는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듭니다. 결코 자연스럽게 지나칠 수 없게끔 어질러져 있는데 니콜라의 가족들은 아무것도 이상한 게 없다는 듯이 행동합니다. 무대 디자이너 오태훈은 이번 무대 연출에 대해 “무대미술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일반적인 실내의 모습이 니콜라의 심리에 따라 비현실적인 공간의 느낌으로 변화되는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질러진 집은 니콜라의 마음이 반영된 환상의 세계로 볼 수 있습니다. 중간중간 나는 물소리와 새소리, 푸른 계열의 조명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나마 니콜라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죠.

하지만 이야기는 니콜라의 내면을 서술하기보다, 니콜라의 가족들을 위주로 흘러갑니다. 우리는 니콜라와 함께 지내며 어려움을 겪는 안느의 고민, 갑작스레 니콜라와 함께 생활해야 하는 소피아의 혼란스러움, 그리고 니콜라를 사랑으로 돌봐주고 싶으면서도 뜻대로 니콜라를 낫게 만들 수 없다는 피에르의 좌절감은 쉽게 파악하고, 공감할 수 있지만 이 모든 사람들의 중심에 있는 니콜라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안느와 살기 어려워할 때도, 피에르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도, 의도치 않게 의심받았을 때도 니콜라가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족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반응을 보여줄 뿐이죠. 어쩌다가 말한 진심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니콜라의 상태를 외면하는 가족들은 집이 어질러져 있는지도 모른 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극 중 초반 가족들의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

연극 <아들> 공연 사진 | 연극열전

플로리앙 젤레르는 한 인터뷰에서 “사랑으로 충분한가. 타인을 고통에서 구원해 줄 정도로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에서 니콜라는 분명 사랑받습니다. 안느, 피에르, 소피아까지도 나름대로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보살핌을 니콜라에게 주려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마음이 니콜라의 증상을 낫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작품 말미, 니콜라가 입원한 병원의 의사는 안느와 피에르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사랑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 경우엔, 사랑만으론 충분하지 않아요.” 사랑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 연극 <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는 가족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보여주려 합니다.

불치병에 걸린 아들이 오랜만에 가족을 마주했을 때, 희곡 <단지 세상의 끝>

희곡 원작 영화 <단지 세상의 끝> 예고편 | Youtube

가족을 떠나 지식인으로서 성공한 장남 루이는 불치병에 걸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란 소식을 알리기 위해 십수 년 만에 집을 찾습니다. 그 사이에 꼬마였던 막냇동생은 거의 성인이 되었고, 둘째 동생은 어느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런데 루이가 집에 온 게 이 가족들에게는 감정 폭탄의 도화선이 되었나 봅니다. 이들은 그동안 루이에게 느꼈던 원망, 죄의식, 분노, 책임감 등을 토해내듯이 루이에게 쏟아냅니다. 이 기세에 눌려 루이는 원래 하려던 말을 못 하고 가족을 다시 떠나게 됩니다.

희곡 <단지 세상의 끝>의 작가이자 연출을 맡기도 했던 장뤼크 라가르스는 프랑스 오트손 지방 에리쿠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푸조 공장의 노동자였고, 그는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연극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이즈에 걸려 37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죠. 지방에 있는 고향, 노동자 계급의 가족, 그리고 불치병 등 <단지 세상의 끝>의 주인공 루이와 작가 장 뤽 라가르스는 닮은 점이 많습니다. 루이를 작가의 분신으로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장 뤽 라가르스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가족관계와 자신의 본질에 대한 어려움들을 고뇌했습니다. <단지 세상의 끝>에서도 이러한 작품 세계가 이어지죠. 이 작품은 독백과 대화가 번갈아서 구성되고, 장마다 독백하는 주된 인물이 다릅니다. 1부 4장에서는 쉬잔이, 8장에서는 어머니가, 1부 11장과 2부 3장에서는 앙트완이 주된 화자입니다. 쉬잔은 루이를 향한 동경과 지적인 위치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고, 앙트완은 루이가 없는 동안 가족 내에서 자신이 장남의 역할을 대신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루이의 위선을 비난하죠. 가족들이 독백하는 장면에서 루이는 언제나 청자로 등장합니다. 죽음을 알려야겠다는 목적과는 모순되게, 그는 오히려 가족의 해묵은 감정을 들어주기만 하게 됩니다.

문제는 루이가 들어주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러한 상황을 모두 알고 있죠. 쉬잔과 앙트완이 루이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루이가 어떻게 침묵할지까지 말입니다. 쉬잔과 앙트완이 부러워하는 건 가족에 얽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루이의 자유로움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쉬잔과 앙트완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루이가 가족에 참여하는 지분이 늘어야 가능합니다. 루이가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 본인의 역할을 할 때, 쉬잔과 앙트완이 다른 가족을 돌봐야한다는 책임감을 덜 수 있으니까요.

이들의 대화는 어긋납니다. 어머니, 쉬잔, 앙트완, 그리고 앙트완의 아내 카트린까지, 이들은 루이에게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지만 그 말은 루이에게 닿지 않습니다. 가족끼리의 소통이 불발되는 순간입니다.

ADHD를 앓고 있는 아들과 함께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영화 <마미>

영화 <마미> 예고편 | Youtube

홀로 지내고 있던 디안은 보호소에서 쫓겨난 ADHD 환자인 아들 스티브와 오랜만에 함께 살게 됩니다. 디안은 스티브를 홈스쿨링을 시키기로 결정하지만, 스티브를 보살피다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합니다. 스티브는 그런 엄마를 돕기 위해 마트에서 도둑질을 하고, 이에 화난 디안과 크게 싸웁니다. 싸움 도중 다치고 흥분한 스티브를 우연히 이웃 주민 카일라가 도와주고, 디안은 이를 계기로 교사로 일한 적이 있는 카일라에게 스티브의 교육을 부탁합니다. 말을 더듬던 카일라는 스티브를 가르치며 말더듬 증상을 낫게 하기 위해 이를 수락하고, 이 셋은 가족 같은 관계가 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하지만 이내 스티브가 마트에서 방화하고 물건을 훔쳤을 때의 피해 보상 배상금을 청구 받게 되면서 이들의 일상은 틀어지게 됩니다.

영화 <마미>는 ‘칸의 총아’라고 불리는 자비에 돌란이 쓰고 연출한 작품입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상을 수상했습니다. 자비에 돌란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성소수자 남성 청년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가족 관계와 의미를 묻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작품인 희곡 <단지 세상의 끝> 역시 자비에 돌란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죠. 때로는 작품 속 남자 주인공으로 분해 연출과 동시에 연기를 하기도 합니다.

디안, 스티브, 카일라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카일라는 디안과 스티브의 불같은 성격을 중화해 주고, 디안과 스티브는 순진한 모습으로 카일라의 닫힌 문을 열죠. 이들을 엮는 건 혈연이나 계약이 아닌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 끝을 예견이라도 하듯 극중 초반 보호소의 직원은 디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과 구원은 별개예요.” 확실히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는 현실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영화 <마미>는 전형적이지 않은 가족의 모습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묻고, 사랑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과 이겨낼 수 없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들>과 <마미>의 이야기는 부모의 시선에서 전개됩니다. 한부모 가정, 재혼 가정을 이루고 있는 부모들이 질환이 있는 자녀를 키울 때 부딪히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보여주고, 사랑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을 보여줍니다. 반면 <단지 세상의 끝>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자녀인 루이의 입장에서 전개됩니다. 그는 모든 독백의 청자이며, 정상가족의 틀 안에서 가족 구성원 사이에 불통의 순간을 보여주는 구심점입니다. 가족들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의무감과 서운함을 오롯이 대화로만 드러나죠.

이 세 작품들은 이야기를 교훈적인 주제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다만 안식처로 여겨지는 가족이 그저 어떻게 서로 상처 입게 되는지 상황을 보여줄 뿐입니다. 가족의 의미는 작품을 본 관객의 몫으로 남습니다. 작품을 모두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요?”

사진 | 연극열전

참고 | 연극 <아들> 프로그램 북

<단지 세상의 끝>. (장뤼크 라가르스, 임혜경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올댓아트 김지희 인턴 allthat_art@naver.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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