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안에 ‘빨래집게’를 넣었더니 벌어진 일

올댓아트 이민정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1.02.03 19:13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1.02.03 19:19

악보가 놓인 평범한 그랜드 피아노. 연주자는 건반 위로 손을 올려 아름다운 연주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째 피아노 소리가 이상합니다. ‘틱’, ‘탁’ 하는 탁성도 들리고 빈 병이나 젬베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도 들리죠. 맑고 고운 일반적인 피아노 음색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악기가 고장 난 걸까요? 사실, 이 피아노에는 특별한 비밀이 있습니다.

■ 현 사이에 끼운 물건들, 새로운 음색을 만들다!

앞서 본 영상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약 30초경부터 이어지는 피아노 내부를 촬영한 장면인데요. 곧게 뻗은 현 사이에 긴 볼트들이 듬성듬성 끼워져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접해 온 피아노 내부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데요. 이 볼트들은 연주자가 연주 전에 일부러 끼워놓은 것입니다. 연주 내내 피아노에서 탁성과 타악기 소리가 들린 이유죠. 이처럼 내부에 볼트, 나뭇조각, 유리, 찰흙 등 이물을 넣어 소리를 변질시킨 피아노를 ‘프리페어드 피아노(Prepared Piano)’라고 부릅니다.

■ 왜 하필 현 사이에 볼트를 끼운 걸까?

피아노는 건반악기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현악기의 일종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연주자가 누르는 건반이 직접 소리를 내는 것 같지만, 실은 건반을 눌렀을 때 건반에 연결된 해머가 현을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방식입니다. 울려야 할 현에 다른 물체가 끼어들면 현이 온전히 진동하지 못해, 원래 소리와 다른 소리를 냅니다. 시끄럽게 울리는 심벌에 손이나 스틱을 갖다 대었을 때 소리가 잦아들거나 먹먹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죠.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이 원리를 이용해 다양한 음색을 창조합니다.

피아노 내부 사진. 해머와 연결된 현을 볼 수 있다. ㅣ 픽사베이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변화무쌍한 음색이 매력적입니다. 같은 악보를 보고 연주하더라도 피아노 사이에 무엇을 끼워 넣느냐에 따라 아예 다른 음악이 되고, 같은 물체를 끼워 넣더라도 물건의 위치가 달라지면 소리가 확연히 바뀌죠. 타건 세기에 따라서도 악기의 음색이 달라집니다. 아래 영상은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준비하는 모습인데요. 앞서 본 영상보다 더 다양한 사물들을 활용합니다. 빨래집게, 스테인리스 뚜껑, 목걸이, 찰흙 등 상상도 못한 물건들이 등장합니다.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이처럼 다양한 사물을 활용할수록 원래 피아노의 음색과 거리가 먼 소리를 냅니다. 더 다채롭고 독창적인 하모니를 만들어내죠. 하지만 무작정 많은 물건을 넣거나 피아노 자체를 변질시키는 것은 금물입니다. 원하는 음색, 분위기에 맞게 물건을 적절히 배치하고, 여러 번 시험해보는 것이 이상적인 방법이죠. 프리페어드 피아노에도 지켜야 할 몇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1. 피아노 현에 직접 영향을 주는 물체를 사용해야 한다.
2. 피아노 내부의 원하는 위치에 물체를 놓아야 한다.
3.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연주하는 동안 물건이 자리에서 이동하지 않아야 한다.
4. 피아노에 영구적으로 영향을 주거나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

■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고안해 낸 사람은?

공식적으로는 20세기 초부터 피아노 현에 직접 영향을 주는 연주 방식이 시도됐습니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들라주는 특정 건반의 현 아래에 골판지를 넣어 인도 드럼 소리를 흉내냈고, 미국의 작곡가 헨리 코웰은 연주자가 직접 피아노 현을 만져 연주하는 기술을 고안해냈죠. 브라질의 작곡가 에이토르 빌라로부스는 현과 해머 사이에 종이 조각을 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음악의 거장 존 케이지가 선례에 영감을 받아 ‘프리페어드 피아노’라는 개념을 완성하죠.

존 케이지는 우연성 음악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현대음악계의 거장입니다. 문제작으로 자주 거론되는 ‘4분 33초’를 탄생시킨 작곡가이기도 하고요. 1930년대 후반, 존 케이지는 타악기 앙상블을 위한 음악 작곡을 의뢰받는데요. 음악이 연주될 무대가 터무니없이 좁아서 작곡에 제한이 가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홀에 들어갈 수 있는 악기는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유일했죠. 존 케이지는 피아노 한 대로 타악기 앙상블을 모방하는 시도를 하는데요. 피아노 현에 유리구슬이나 고무 등을 끼워 프리페어드 피아노로 공연을 올리게 됩니다. 피아노 한대로 타악기 앙상블을 흉내 낼 수 있다니! 이 시도는 당시 음악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래 영상은 존 케이지가 작곡한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와 간주곡’인데요. 실제 사용된 악기는 피아노 한 대뿐이지만, 타악기와 피아노의 협연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잠시 감상해 볼까요?

■ 더 다양한 프리페어드 피아노 연주를 만나보자!

존 케이지 이후에도 실험적인 시도를 원하는 많은 음악가들이 프리페어드 피아노로 연주를 시도했습니다. 그중 화제가 된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아래 영상 속 연주는 독일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하우슈카가 방송에서 공개한 프리페어드 피아노 즉흥곡입니다. 전기 장치, 병뚜껑, 테이프, 탁구공... 하나씩 짚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물건들을 사용하는데요. 막상 연주를 시작하니 안정적으로 들려오는 하모니가 인상적입니다. 하우슈카는 평소에도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이용한 연주를 자주 선보입니다.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면 하우슈카의 유튜브 개인 채널을 방문해 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두번째는 국내에 뉴에이지 피아노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피아니스트 이루마의 ‘H.I.S Monologue’입니다. 2006년에 발표된 음원인데요. 프리페어드 피아노가 지금보다도 훨씬 생소했던 때라 팬들 사이에서 많은 화제가 되었습니다. 몽환적인 음색이 매력적입니다.

마지막으로 피아노 연주 그룹 ‘The Piano Guys’의 유튜브 계정에 업로드된 영상인데요. 현에 물체를 끼우는 것은 아니지만, 초창기 프리페어드 피아노처럼 직접 현을 두드리고 퉁기는 방식의 연주입니다. One Direction의 ‘What Makes You Beautiful’을 한 대의 피아노로 다섯 명이 연주하죠. 이렇게 보니 피아노 한 대에서 탄생할 수 있는 소리가 정말 다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 | 위키피디아
음악의 역사 (김원구, 한국사전연구사)
파퓰러음악용어사전&클래식음악용어사전 (삼호뮤직 편집부, 삼호뮤직)
악기백과 (민은기 외 137인, (사)음악사연구회)
세계악기사전 (이강석, 한국사전연구사)

별별예술 기사 더보기

이런 기사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