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최초의 여성 오페라 작곡가, 엘리자베스 게르

올댓아트 이민정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1.02.06 00:19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1.02.06 00:23

창작 음악의 역사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3~4천 년이라는 아득한 옛날부터 시작되었죠. 여성 음악가의 창작 음악은 어떨까요. 오래전부터 예술적 창작은 남성 예술가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작곡도 다르지 않았죠. 여성 음악가의 창작 활동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이 19세기 말 즈음이니 불과 200년도 되지 않은 셈입니다. 논의 이전에도 여성 작곡가들은 꾸준히 존재해왔지만 그 작품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일은 적었죠. 이번 글에서 소개할 주인공은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뛰어난 음악가로 이름을 남긴 인물입니다. 프랑스 최초로 오페라를 완성한 여성 음악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하프시코드 연주의 거장이자 즉흥연주의 귀재, 엘리자베스 드 라 게르입니다.

“루이 14세를 놀라게 한 일곱 살 음악 신동”

엘리자베스 드 라 게르의 초상화 ㅣ 위키피디아

엘리자베스는 하프시코드 장인이자 생 루이 앙 릴(Saint-Louis-en-l‘Ile) 교회의 수석 오르가니스트였던클로드 자크의 딸이었습니다. 음악에 열정이 넘쳤던 클로드 부부의 네명의 아이들은 모두 음악가가 되었는데요. 그중에서도 둘째 엘리자베스는 노래, 연주 모두 큰 재능을 보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여자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었음에도, 클로드는 엘리자베스에게 성악, 하프시코드 연주, 즉흥 연주, 반주, 작곡 등을 가르쳤죠.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어느 면에서도 부족함 없는 음악 신동으로 성장했습니다.

클로드는 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음악가로 성공할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일까요. 왕실과 연이 있었던 그는 엘리자베스가 일곱 살이 되던 해, 루이 14세를 찾아가 딸의 연주 실력을 직접 보여주기로 합니다. 루이 14세는 절대 왕권의 대명사로 잘 알려져 있죠. 예술 분야에서도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왕이었습니다. 보는 눈이 높기도 했고요. 그런 루이 14세가 보기에도 엘리자베스의 실력은 상당했습니다. 머지않아 파리 전역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신동의 소문이 퍼져나갔죠.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주도로 엘리자베스는 열두 살 나이에 왕실에 입성했고, 루이 14세의 자제들과 함께 음악 공부를 하게 됩니다.

루이 14세의 초상ㅣ 위키피디아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초상.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엘리자베스를 위한 음악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ㅣ 위키피디아

엘리자베스의 실력은 날로 늘어갔습니다.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는 즉흥 연주에서 강점을 보였는데요. 연주뿐 아니라 창작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오페라 창작에 관심을 보였죠. 하지만 왕가의 후원을 받는 음악가라고 해도 엘리자베스는 나이가 어렸고, 더군다나 여성은 창작 작품을 선보이기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에 섣불리 ‘오페라를 창작해보고 싶다’는 뜻을 내보이지 못했습니다. 당시 궁정 음악을 총괄하고 있던 장 바티스트 륄리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죠. 왕실 입성 후 4년이 지나서야 엘리자베스는 자신 역시 작품을 쓰고 싶다는 뜻을 밝힙니다. 다행히도 루이 14세는 엘리자베스의 재능을 알고 있었고, 계속 작곡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을 계속했죠.

이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원래대로라면 왕실 후원을 받는 엘리자베스도 함께 거처를 옮겨야 했는데요. 복잡한 왕실보다 파리 생활이 더욱 좋았던 엘리자베스는 루이 14세에게 자신은 파리에 남고 싶다는 청을 합니다. 루이 14세는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죠. 평생 연금을 지급하고 자신에게 작품을 헌정할 수 있는 권한도 주었습니다.

“오페라 전막 작품 공개, 프랑스 여성 음악가로서는 최초! 하지만...”

루이 14세 통치 당시 궁정 음악을 총괄하던 장 바티스트 륄리의 초상화 ㅣ 위키피디아

엘리자베스는 파리에 머물며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던 마랭 드 라 게르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립니다. 결혼 후에도 창작을 계속하며 작품들을 써 내려갔는데요. 그중에서 <승리의 영광과 유희>는 엘리자베스가 쓴 첫 오페라 발레 작품으로 기록됩니다. 동시에 프랑스 여성 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오페라 발레였죠. 그는 이 작품을 루이 14세에게 헌정하기로 했는데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은 음악가라 할지라도 작곡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완전히 깨부수긴 어려웠던 것이죠. 궁정 음악을 여전히 꽉 쥐고 있는 장 바티스트 륄리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겠다는 걱정에, 엘리자베스는 루이 14세를 위한 정성스러운 헌정사를 작품과 함께 보냅니다. 자신의 모든 음악적 성과는 루이 14세로부터 비롯한 것이라고 말이죠. 아래는 그 헌정사의 일부입니다. 엘리자베스의 영리함이 돋보이면서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작품이 이유 없이 문전박대 당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씁쓸하게도 다가옵니다.

“지금까지 어떤 여성도 오페라 전곡을 작곡한 바가 없습니다.
이 곡은 전하께 헌정하게 되어 더욱 큰 영광을 얻습니다.”
-엘리자베스 드 라 게르의 헌정사 중-

헌정사 덕분인지, 엘리자베스의 작품은 무사히 무대에 올랐는데요. 관객들은 <승리의 영광과 유희>에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어느 정도 실패를 예상하긴 했지만, 실망감을 감추긴 어려웠죠. 대신 잠시 오페라 작곡을 쉬면서 자신이 제일 자신 있어 하던 하프시코드를 위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엘리자베스의 ‘클라브생 작품집 1권’은 이 즈음 만들어졌습니다.

3년 뒤, 엘리자베스는 실패의 아픔을 딛고 오페라에 다시 도전합니다. 당시 파리에 유행하던 서정비극을 시도했는데요. 서정비극은 장 바티스트 륄리가 만든 오페라 장르 중 하나로, 고전 신화나 민화, 낭만 서사시를 기초로 하는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시인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를 토대로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장 바티스트 륄리가 세상을 떠난 후였고, 엘리자베스의 작품은 왕립음악원 무대에 여러 번 오를 수 있었죠. 하지만 이번에도 관객들은 엘리자베스의 작품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음악은 아름다웠지만, 시인 조제프 프랑수아 뒤셰 드 방시가 쓴 오페라의 대본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혹평을 피하기 어려웠죠. 루이 14세가 오페라에 흥미를 잃음에 따라 국민들도 오페라를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작품이 흥행 반열에 오르기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알렉산더 마코가 그린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 ㅣ 위키피디아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엔 따라주지 않는 주변 요소가 너무 많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엘리자베스는 두 번째 실패를 경험하며 오페라에서 손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칸타타, 하프시코드 연주곡, 소나타 등을 작곡하며 여전히 음악 활동을 계속합니다. 주변 음악가들의 시기 어린 비판과 질투도 오갔고, 남편과 아버지, 아들이 세상을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나며 슬럼프를 겪기도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노년까지 음악가로서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연주는 날이 갈수록 많은 관객들을 매료시켰죠. 그가 발표한 작품집은 지금까지도 하프시코드 음악 명작으로 꼽힙니다.

“오늘날 하프시코드의 역사에서 ‘엘리자베스 드 라 게르’의 의미는...”

엘리자베스는 공식적인 은퇴 후에도 왕실로부터 프랑스의 상황을 반영한 칸타타, 전시를 위한 연주곡 등의 작곡 의뢰를 계속해서 받았습니다. 1721년 완성한 그의 마지막 작품 ‘테 데움’은 루이 15세의 회복을 기념하는 헌정곡이기도 하죠. 1729년에 엘리자베스는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는데요. 프랑스의 유명 인사와 귀족, 왕족들이 거쳐갔던 생 외스타슈 성당에 묻힙니다.

그가 사망하고 3년 뒤. 프랑스 저술가인 티톤 두 틸레가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작곡가들을 기리는 메달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엘리자베스 드 라 게르는 여성 음악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이 리스트에 포함되었습니다. 메달엔 아래 문구가 적혔습니다.

“나는 영광을 두고 위대한 음악가들과 경쟁했다(Aux grands musicien j‘ay dispute le prix).”

엘리자베스 드 라 게르의 기념 메달 초상화 ㅣ 게티이미지

하프시코드를 찾아보기 어려워지면서 엘리자베스의 작품은 자연스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많은 음악가들이 엘리자베스의 하프시코드 연주곡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재녹음 되는 사례가 여럿 있었는데요. 아래는 ‘바이올린과 콘티누오를 위한 소나타’와 그의 오페라인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 전곡을 감상할 수 있는 링크입니다. 꼭 한번 들어보세요.

바이올린과 콘티누오를 위한 소나타 2번

오페라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

참고|세이렌의 노래 : 여성 작곡가들의 삶과 음악 (이디스 재크, 만복당)
Elisabeth-Claude Jacquet de la Guerre (MUGi)
Sounds and Sweet Airs: The Forgotten Women of Classical Music (Oneworld Publications, 2017)

<올댓아트 이민정 인턴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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