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빠져든다…이희문만의 ‘색’ 다른 스웨그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1.05.24 14:37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1.05.24 14:39

2017년, 미국 공영 라디오 NPR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는 민요 록밴드 ‘씽씽’이 출연했다. 당시 NPR는 이들의 공연을 “다른 어떤 밴드에서도 보거나 듣지 못한 음악”이라고 설명했다. 이 ‘듣도 보도 못한’ 음악의 정체는 테크노 비트, 글램 록, 디스코 사운드를 입힌 ‘경기 민요 메들리’, ‘난봉가’, ‘사설난봉가’였다.

내외적으로 화려한 등장에 세계인들은 주목했다. 간드러진 목소리와 장단을 자유자재로 타고 넘는 몸짓에 동서고금을 막론한 팬덤까지 형성됐다. 으레 그럴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이들의 행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힙’ 해졌다. 장르를 넘나들며 존재감을 드러냈고, 놀랍도록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씽씽’의 중심에는 이희문이 있었다. 요즘 말로 ‘선을 넘으며’ 자신의 색을 칠해가는 그에게는 국악계의 이단아, 전통을 재창조한 괴짜, 파격의 아이콘 등과 같은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을 포장하는 숱한 표현들이 ‘경기 소리꾼’으로 귀결되기를 바란다. 형형색색의 외형에 머물렀던 시선을 ‘귀’로 옮길 차례다. 그가 펼쳐 보이는 예사롭지 않은 음악에 차오르는 ‘흥’이 느껴진다면, 그걸로 됐다. 기꺼이 즐길 준비가 끝났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이희문 오방신과 발광 中 |노원문화재단

이희문컴퍼니는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졌나요.

처음에는 경기민요에 집중한 1인 기업이었어요. 경기민요는 일제 강점기 이후 가장 유행했던 음악인데 어느 순간부터 판도가 달라졌죠. ‘서편제’라는 영화를 통해 판소리가 유명해졌고, 김덕수 선생님의 사물놀이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음악이라고 하면 딱 그 두 가지를 떠올리게 됐거든요. 경기민요가 주목을 받기 위해선 이 장르의 스타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방송이나 인터뷰를 할 때마다 ‘경기민요를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곤 하는데 아직 제가 덜 유명해서일까요(웃음). 여전히 힘든 부분이 많긴 해요.

긍정적으로, 이희문이라는 이름을 알렸다는 목적은 달성하지 않았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급과 수요가 맞지 않으니 운영의 어려움이 있죠. 이걸 유지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지구력이 필요한데 그게 쉽지 않거든요. 저는 그래도 아들 뒷바라지를 해주신 어머니(고주랑 명창)의 도움으로 10년 정도는 버텼어요. 이후 조금씩 수익이 생기고는 있지만, 다른 분야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하죠. 사실 예술이라는 것은 돈과 떨어뜨려놓고 볼 수 없거든요. 상상력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돈이 들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경기민요하는 사람이에요’ 하면 대다수가 ‘그게 뭐지’ 하는 반응을 보였어요. 그러다 보니 스스로도 많이 위축되었고요. 왜 당당하지 못할까,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을 하다 보니 결국엔 작업의 질이더라고요. 물론 소리를 ‘기깔나게’ 잘 한다면 이런 걱정이 없을 수도 있지만(웃음) 요즘 시대는, 지금의 대중들은 소리와 함께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도 집중해야 시선을 주거든요.

돌이켜 보면 ‘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수가 되고 싶었던 그는 대학시절 기획사에 들어가 연습생으로 살기도 했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에 좌절한 그는 일본에서 영상을 공부하는 것으로 진로를 변경했고, 이후 귀국해 뮤직비디오 조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소리를 시작한 것은 18년 전, 스물일곱의 나이였다. ‘엄마 친구(이춘희 명창)’가 소리를 해보라고 권유한 것이 계기였다. 배경에 주목한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 여기에 ‘남들과 달랐던’ 그의 행보들이 처음부터 좋게 평가되진 않았다.

무대 위에서는 굉장히 당차 보였는데 그 이면에는 여러 고민이 있었네요.

맞아요. 그렇다고 겉치레만 신경 쓸 수는 없으니까 내적으로도 많이 노력했어요. 기본을 다지기 위해 오랜 시간 공부했고, 한 우물을 팠어요. 그 덕에 대통령상(제16회 전국민요경창대회)도 타고 그랬죠(웃음). 어머니, 이춘희 선생님, 장영규 감독, 이태원 감독 등 훌륭한 분들의 도움과 영향도 많이 받았어요. 컨템퍼러리 한 활동을 하게끔 도와주시는 멘토 안은미 선생님도 빼놓을 수 없고요.

그럼에도 굉장히 자유롭게 그리고 즐긴다는 느낌이 들어요.

2014년 프로젝트 ‘쾌’를 진행할 때 장영규 감독에게 딱 하나 요구했어요. 나는 춤을 추고 싶다고(웃음). 제 DNA가 그렇거든요. 처음 경기민요의 기본을 배울 때 아, 이 분야는 틀리거나 다르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저라는 사람이 그때라고 달랐겠어요(웃음). 제가 가는 곳엔 항상 말이 많았죠. 바지를 왜 그렇게 속옷이 보이도록 입느냐 같은 문제로도 혼이 났던 것 같아요. 많이 위축되어 있었는데 그러던 찰나에 안은미 선생님의 프로젝트에 함께 하게 됐어요. 선생님은 제가 뭘 해도 칭찬만 해주셨어요. 때로는 칭찬이 너무 과해서 이게 맞나, 하는 의심을 할 정도로요(웃음). 그런데 그 칭찬이 사람을 변하게 하더라고요. 힘이 생겼고, 사람마다 갖고 있는 보석이 모두 다르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어요. 선생님과 작업을 하면서 제 자신을 좋아하게 됐어요. 무대에서 틀리는 것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러다 보니 굉장히 자유롭게 그리고 즐기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저 역시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본인이 즐거워야 한다’고 강조해요. 무대에 오른 사람이 즐겁지 않으면 그 에너지는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고정관념처럼 갖고 있던 전통의 이미지를 깼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국악계의 이단아’라는 수식어에 대해 본인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요.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죠(웃음). 대놓고 저한테 그렇게 표현한 사람도 아직 없기도 하거니와 그런 표현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어요. 분명한 건 이런 파격적인 모습이나 행동들을 받아들이는 문화나 분위기 한국이 조금 더 유별나다는 것이에요. 외국에서는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다르거든요. 제가 배우들처럼 외모가 엄청 잘 생겼다면 덜했겠지만(웃음), 제 스스로 자신감을 갖기 위해 한 행동들이에요.

‘도올아인 오방간다’ 中 |KBS

독특한 비주얼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나요.

이 질문을 정말 많이 받는데요. 저는 반대로 이렇게 물어보고 싶어요. 역할에 따라 분장을 다르게 하는 배우들에게도 이런 질문을 하나요? <캣츠>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고양이 분장을 왜 하느냐고 물어보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 공연의 일부죠. 아주 솔직하게 지질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이런 비주얼을 선택하게 됐어요. 또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제 모습이 다르게 느껴져요. 같은 소리를 하더라도 그런 비주얼, 이를테면 힐을 신고 노래를 부르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정체성이 등장해 소리와 결합되어 또 다른 모습을 완성하죠. 한복을 입었을 땐 나오지 않았던 소리에요. 나아가 몸짓도 다르고, 말하는 것도 달라져요. 그런 경험을 하다 보니 판타지가 생기더라고요.

이희문을 설명하는데 ‘오더메이드레퍼토리’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 이는 기존의 진부한 전통 공연을 기성복으로 명명하고 이 시대의 변화를 새로 입은 전통음악을 ‘오더메이드 레퍼토리’로 지칭해 이희문만의 음악세계를 펼치는 시리즈다. 2013년 선보인 ‘잡(雜)’은 말 그대로 여러 가지가 마구 뒤섞인 이란 의미로, 전통예술과 무용이 혼합된 다원 장르 공연이었다. 그는 조선시대 직업 소리꾼이 불러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전통 성악 ‘12잡가’를 주제로 인생의 희로애락을 12개의 무대로 구현해냈다. 이듬해 이어진 ‘쾌(快)’는 유쾌·상쾌·통쾌·불쾌와 야릇한 쾌들을 재밌게 풀어낸 작품으로 굿과 재담소리에 현대의 이야기를 담아냈고, 2016년 ‘탐(貪)’을 통해서는 전통소리와 서구적 클럽 문화의 장르적 융합을 탐색했다.

그간의 무대를 보면서 기발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이디어는 주로 어떻게 얻으시나요.

공부를 많이 하죠. 역사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보러 다니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아이디어가 나오곤 해요. 저는 전통 음악에서 보기 힘들었던 레퍼토리 시리즈를 해오고 있는데요. 유럽은 레퍼토리 문화가 발달되어 있어 전 세계 투어도 하고 그러잖아요. 연극도 한 작품이 만들어지면 주인공은 바뀔 지언 정 수십 년간 이어지고요. 그런데 우리 전통은 그렇지 못하고 너무 단발성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쉬웠어요.

이희문 오방신과 콘셉트 사진 |이희문컴퍼니

다양한 장르와의 협업을 하고 있는데요. 그 기준이 있나요.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느냐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에요. 사람마다 성향이 다 다르잖아요. 협업은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이 뒷받침되어야 하거든요. 깨를 볶을 만큼 친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엔 작업이 늘 겉돌더라고요. 완벽을 추구하는 분들, 이를테면 절대음감이어야 해, 하는 분들은 저랑 못하죠(웃음). 물론 그분들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예술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들 다를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장영규 감독한테 정말 감사해요. 그전까지 전 현대 음악과의 교류가 없었거든요. 마치 ‘나 홀로 아리랑’처럼요(웃음). 장 감독은 홍대의 인디밴드 맛을 보게 해줬어요. ‘씽씽’ 활동 덕분에 오방신과, 노선택, 구남 등 훌륭한 뮤지션들을 알게 됐고요.

‘씽씽’의 해체를 아쉬워하는 분들도 많아요.

여전히 전통 음악을 좋아하고 제 뿌리이자 무기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런 활동들도 꾸준히 해보고 싶어요. ‘씽씽’은 돈을 못 벌었지만(웃음), 그냥 즐거웠어요. 제겐 취미 생활이자 ‘힐링’의 대상이었죠.

그 이후엔 ‘프로젝트 날’을 진행했죠.

‘씽씽’이 해체되고 나서 상실감이 컸어요. ‘씽씽’에서 난 어떤 사람이었나, 무엇을 했던 사람이었나, 고민하게 됐죠.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날’인데요. 나는 싱어였고, 퍼포머였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제 소리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드럼과 모듈러 신스, 장구 이렇게 멜로디 없는 세 악기와 제 목소리로만 음악을 만들어냈죠.

한국남자 콘셉트 사진|이희문컴퍼니

오방신과(OBSG) 레퍼토리도 이희문컴퍼니의 대표 작업이다. 오방신과는 2019년 방송된 TV 프로그램 <도올아인 오방간다>에 출연하며 결성한 팀이다. 이희문과 서브 보컬 놈놈, 밴드 허송세월로 구성된 이 팀은 중생(관객)들과 함께 속세를 탈출한다는 ‘사바세계 탈출기’를 콘셉트로 ‘뽕끼’ 가득한 스타일의 민요를 선보였다.

오방신과 공연, 앨범 작업 등 중장기 사업의 일환으로 많은 걸 했더라고요. 그중 하나가 재즈밴드 프렐류드와 함께 한 ‘한국 남자’ 2집이었죠. 어떤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었나요.

‘민요’가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노래라면 ‘잡가’는 주로 전문 소리꾼들이 부르던 노래에요. 그 시대 이슈나 관심사에 따라 소리꾼이 부르기 좋게 만든 음악인데 여러 가지가 섞여있고 규정하기 어려워요. 굉장히 불규칙적이죠. 그런 부분이 재즈가 갖고 있는 즉흥적인 성격과 잘 맞을 것이라고 봤어요.

이외에도 꾸준히 작업 활동을 하고 있어요. 최근엔 스핀 오프 뮤비 ‘미뇨(Minyo)’ 프로젝트도 공개했죠.

처음 컴퍼니를 만들면서 1년에 최소 하나의 작품을 만들자고 다짐했어요. 다행히 꾸준히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더라고요. ‘미뇨’는 경기민요의 근현대사에 대해 공연인 ‘깊은 사랑 시리즈’ 중 ‘3부 민요삼천리’ 공연에 뿌리를 둔 작품이에요. 신작을 만들어 영상화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는데 이 분야가 생소하다 보니 신작으로는 인큐베이팅이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연극적인 베이스가 있는 ‘민요삼천리’를 떠올렸어요. 그냥 영상이 아니라 스핀 오프처럼 뮤직과 무비가 결합된 ‘뮤비’에요. ‘미뇨’라고 하는 아이가 이상한 나라를 헤집고 다니는 이야기죠. 현재 편집 중인데 마무리가 끝나는 대로 공개할 예정입니다.

최근 전통음악을 좋아한다고 소신을 밝히는 젊은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 좋아함의 배경에 선두로 있진 않나 생각되는데요. 더 가깝게 즐기는 방법을 제안해 주신다면.

매우 반가운 일이죠. 저는 앞서 언급한 ‘깊은 사랑’ 시리즈를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이 시리즈를 만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들을 줄 아는 분들, ‘귀명창’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소리가 왜 좋은지 그걸 알려주고 싶었거든요. 사실 좋아하게 되는 것은 관심에서부터 출발해요. 그러려면 그 소리를 자꾸 들어봐야 하죠. 해보면 더 좋고(웃음). 사실 전통 음악이 쉬운 장르는 아니에요. 옛날에는 소리가 남자들의 취미생활이었어요. 박자도 없고 리듬도 없고 그냥 자유롭게 노래를 했대요. 그러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여성의 소리가 되었는데, 이를 상품으로 내놓기 위해 지금의 아이돌 기획사처럼 트레이닝을 시키면서 도제식으로 변하게 되었죠. 여성들의 소리는 꾸밈이 많아서 점점 느려지는데 그러다 보니 다소 지루한 경향이 있어요. 저는 이것을 다시 빠르게 하려고 시도하고 있고요. 그러다 보니 엄청 바빠요(웃음). 이런 배경을 알고 들으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네요.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이희문컴퍼니가 준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런 시도도 해보고 싶다, 하는 것이 있을까요?

사실 전 무계획이 계획인데요(웃음).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소리가 있는 1인 뮤지컬을 해 보고 싶어요. 그걸 온라인으로 실시간으로 송출하면서 영상으로 보여주고, 아주 극소수의 관객들과 함께 하는 무대를 꾸며보면 해보면 어떨까 고민하고 있어요. 나아가 제 이야기로 영화를 한 편 만들어보고 싶고요(웃음).

사진 |이희문컴퍼니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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