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사라진 조선의 ‘인장’, 미국 국토안보수사국이 떴다?!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1.07.07 14:44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1.07.20 09:52

덕온공주 동제인장 |국립고궁박물관

인장(印章)의 사전적 의미는 ‘금, 은이나 뿔, 나무 등을 재료로 글씨, 그림, 문양을 새겨 인주나 잉크를 발라 찍거나 점토 등에 눌러 개인, 혹은 집단이 특정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하는 물품’입니다.

‘특정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하는 물품’이라는 대목에 방점을 찍어봅니다. 즉 인장은 개인 또는 집단을 상징하는 공적인 효력이 있는 도구인데요. 인장이 없다면 공문서는 실효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계약은 온전하게 성사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약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이 사라졌다면?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1924년 4월 9일, 조선 왕실 사당인 종묘 경내 영녕전 신실에 각각 모셔졌던 덕종과 덕종비, 예종과 예종비의 어보(御寶)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관리가 허술했던 틈을 타 도둑이 든 것입니다.

어보는 국가의례에서 왕과 왕후의 덕을 기리는 칭호를 올릴 때나 왕비·세자·세자빈을 책봉할 때 사용된 인장입니다. 사후에는 신위와 함께 종묘 신실에 영구히 모셔져 왕실과 국가를 지키는 존재로 여겨졌는데요. 전례 없는 이 엄청난 사건에 순종은 밤을 새우며 발을 동동 거렸습니다. 그러나 실무 담당자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종묘의 어보는 당장 쓰는 것도 아니고, 승하하신 뒤에 만들어놓은, 돈으로 쳐도 몇 푼 안 되는 것인데 그만한 것을 잃었다고 좋아하는 꼴푸(골프) 놀이를 못한단 말이요?”

이왕직(일제 강점기에 조선 왕실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 산하, 예식을 담당하는 예식 과장이자 ‘매국노’ 이완용의 아들이었던 그의 이름은 바로 이항구. 근신을 해도 모자랄 상황에 뻔뻔하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망언’까지 쏟아낸 셈이죠.

잠깐! ‘왕의 인장’하면 국새(國璽)를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국새와 어보는 모두 국가의 존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인장입니다. 다만 그 용도에 따라 구분되는데요. 어보는 주로 의례용으로 사용된 반면 국새는 국왕 통치에 쓰인 실무용 인장이었습니다. 왕위 계승 시 선양의 징표인 동시에 외교문서, 교지, 공식 문서에 사용되는 등 관인의 성격을 갖고 있었죠.

자료에 따르면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 국새와 어보는 각각 37점, 375점 총 412점이 만들어졌습니다. 국가의 정체성이 담겨 있는 만큼 제작도, 관리도 엄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2021년 기준 국내에 현존하는 것은 9점의 국새와 333점의 어보뿐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도난당하거나 분실했기 때문입니다.

국새와 어보는 대한민국 정부의 재산으로 소지 자체가 불법인 유물입니다. 개인 간의 사적 경로를 통해 거래할 성질이 아니며 국가 상징 유물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환수되어야 하는 문화재입니다. 때문에 유네스코 123개 회원국을 비롯하여 인터폴,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에는 행방불명 상태인 유물 목록이 공유되고 있습니다.

2014년 HSI 소속 이민관세청과 ‘한미 문화재 환수 협력 양해각서’를 맺은 문화재청은 공조·수사·협상·기증 등을 통해 불법 반출된 국새와 어보를 환수하는데 힘쓰고 있습니다. 다양한 노력과 방법으로 제자리를 찾은 국새와 어보들, 어떤 사연이 있을까요? <안녕, 국외소재문화재> 6,7화에서 정리해봤습니다.

■ 사라진 덕종어보, 비운의 왕실 유산

앞서 언급한 ‘덕종어보(德宗御寶)’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당시 경찰은 도난범과 사라진 어보를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덕종어보|국립고궁박물관

세조의 장남이었던 덕종은 병약했던 탓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0세에 요절했습니다. 아들인 성종은 재위 2년(1471년)에 세자 신분으로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버지를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으로 추존하고 ‘덕종’이란 시호를 올리게 됩니다. 이때 ‘덕종어보’가 탄생하게 됐죠.

종적을 감췄던 덕종어보는 훗날 미국에서 발견됐습니다. 아시아 미술품 수집가였던 故 토마스 스팀슨(Thomas D. Stimson) 여사는 1962년 미국 뉴욕에서 반출된 덕종어보를 구입한 후, 이듬해 2월 시애틀 미술관에 기증했는데요. 조선 왕실의 당당함과 굳건한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덕종어보는 ‘한국에서 온 대사(Ambassador), 한국 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받았다고 합니다.

관련 정보를 입수한 문화재청은 2014년 7월부터 미술관과의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시애틀 미술관으로부터 덕종어보 뿐만 아니라 인수(印綬, 어보에 달린 끈으로 2008년에 서울시 매듭장 김은영 씨 제작)까지 함께 기증하겠다는 입장을 전달받았습니다.

마침내 2015년 4월, 덕종어보는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외국 소장기관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우호적으로 해결했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였죠.

그러나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았던 환수 과정은 한차례 고비를 맞이합니다. 문화재청이 특별전을 앞두고 어보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금 함량이 압도적으로 높은 조선시대 어보와 달리 구리 함량이 가장 높은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24년 5월 2일 <매일신보> 기사에는 “조선미술품제작소에 제작을 명해 어보를 새로 만들어 위안제를 지내고 종묘에 바쳤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고국의 품에 안긴 덕종어보는 도난 후 다시 제작된 것이었죠.

2017년 진행된 ‘국새와 어보’ 국립고궁박물관 전시 전경 |문화재청

덕종어보처럼 재제작된 어보는 총 28개에 달합니다. 궁궐이 불타 소실됐거나, 도난당했거나 혹은 죽은 선조를 기리기 위해 후대에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문화재청 역시 종묘에 정식 봉안됐던 유일한 덕종의 현존 어보인 만큼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제자리를 찾은 덕종어보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관리 중입니다.

■ 고종의 굳은 의지를 담은 황제지보

1897년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하며 그 위상에 걸맞게 각종 보새(寶璽, 어보와 국새)를 제작했습니다. 그 결과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등 10과의 대한제국 국새가 만들어졌죠.

황제지보 | 국립고궁박물관

이 중 ‘황제지보’는 황제가 직접 관료를 임명할 때 내려주는 임명장과 훈장 서훈(敍勳) 사유를 적은 훈기(勳記)에 찍는 인장이었습니다. 용의 형상을 조각한 모습이 인상적인데요. 고종은 중국에서 하사받아 거북으로 표현되던 그간의 국새를 폐지하고 이렇게 자주독립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용맹함은 오래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해 불법 반출된 황제지보가 소리 없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3년, 한국전 참전 군인의 사위가 인장의 가격을 알아보기 위해 골동품 가게를 찾으면서 입니다.

이를 감지한 HSI는 문화재청에 사진을 보냈고, 이를 확인한 문화재청은 역사적 기록을 통해 이 인장이 황제지보임을 밝혀냈습니다. 이후 인장은 ‘관세 규정’에 의거하여 압수?반환 절차를 밟았습니다. 수사 요청부터 압수까지 걸린 시간은 30여 일. 양국의 긴밀한 협력 관계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굳건했던 고종의 마음을 담은 황제지보는 2014년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금의환향하게 됩니다.

이때 황제지보 외에도 순종이 고종에게 태황제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수강태황제보(壽康太皇帝寶), 조선 왕실에서 관리 임명에 사용한 유서지보(諭書之寶)와 준명지보(濬明之寶), 조선 헌종의 서화 감상인인 향천심정서화지기(香泉審定書畵之記), 조선 왕실에서 사용한 우천하사(友天下士), 쌍리, 춘화(春華), 연향(硯香) 등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2017년 1월 황제지보는 대한민국의 보물 제1618-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에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중입니다.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새 28점, 어보 45점 등 총 73점(2021년 2월 기준)은 행방불명 상태입니다. 다행인 것은 한 나라의 국가 상징물, 그 소중한 가치를 아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망설임 없이 ‘사라진 역사’를 돌려주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료 및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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