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환수’ 스토리…우먼 인 골드·겸재정선화첩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1.07.26 14:17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1.07.26 14:18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Portrait of Adele Bloch Bauer I) | 위키피디아

신화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 황금빛 문양 속에서 돋보이는 여인의 자태. 드러난 것이라고는 고작 두 손과 어깨, 얼굴이 전부이지만 쉽사리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 속 여인의 이름은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입니다.

부유한 오스트리아 금융업자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18살 연상의 사업가이자 문화예술 후원자인 페르낭드 블로흐와 결혼했습니다. 매력적인 아내가 소중하고 자랑스러웠던 페르낭드는 아델레를 문화계 인사들이 드나드는 살롱의 안주인으로 활동하게 했죠.

1907년 그녀는, 후원인이자 당시 인기 화가였던 클림트 초상화의 뮤즈로 활동하게 됩니다. 금박을 붙여 더욱 화려해진 그녀의 초상화는 무려 4년이나 걸려 완성됐다고 합니다. 정성을 쏟은 만큼 이 초상화는 훗날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라 불리며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를 관람하러 온 관광객들로 벨베데레 미술관은 언제나 북적였죠.

그러나 1998년을 기점으로 아델레 초상화의 운명은 뒤바뀌게 됩니다. 페르낭드 부부의 조카인 마리아 알트만이 이 초상화를 비롯해 총 5점의 작품에 소유권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마리아는 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초상화에 얽힌 진실을 접합니다. 숙모 아델레의 뜻에 따라 미술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진 초상화 등 페르낭드 부부 소유의 저택과 재산이 나치 정권에 의해 부당하게 몰수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노년의 마리아는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합니다. 누가 봐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외로운 싸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과거의 상처까지 다시 되짚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초상화는 단순히 유명한 초상화가 아닌 전쟁과 나치의 횡포 속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추억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델레 숙모는 그녀에게 각별했던 존재였고요.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그녀는 고군분투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입장도 강경했습니다. 아델레의 초상화는 이미 국가적 보물에 해당하는 위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문화재 반환을 결정하는 순간 파생될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해결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마리아는 자국 법원에 이를 문의했고, 미국 대법원은 그녀가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양측의 대립은 8년간 팽팽하게 이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초상화가 숙모의 고향이자 본국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국가가 개인의 재산을 몰수해간 사실을 인정한다면 합의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지만 이 또한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2004년, 마침내 국제사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마리아는 초상화의 새 주인이 됐습니다. 아델레의 기증 의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애초 그림을 의뢰한 사람도, 그림값을 지불한 사람도 페르낭드인 만큼 그의 유언에 따라 조카들이 그림의 소유권을 상속받아야 한다는 것이 판결의 근거였습니다.

영화 같은 이 이야기는 2015년 개봉된 영화 <우먼 인 골드>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초상화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오스트리아 측이 작품의 이름을 ‘레이디 인 골드’로 대체했던 이야기에서 기인한 제목이었다고 합니다. 극 중 예술 반환 위원회 연설의 발언권을 얻은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환수’란 단어는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제가 사전에서 뜻을 찾아봤어요. ‘원래 상태로 돌아가다 ’라는 뜻이더군요. 이걸 읽고 생각했죠. 저도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고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라고요. 저희 세대 수많은 도망자들은?그럴 수 없었어요. 최소한 우리 물건을 돌려받을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

<우먼 인 골드>의 사례는 전 세계 22개국에 분포돼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입하여도 크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2021년 4월 1일 기준 국외소재문화재는 20만 4,693점입니다. 이는 전 세계 주요 박물관 및 미술관 등으로부터 소재를 파악한 문화재 중심의 수치로, 개인 소유의 문화재까지 포함한다면 그 숫자는 이를 초월할 것입니다.

희망적인 것은 모든 환수 과정이 <우먼 인 골드>의 사례처럼 ‘퍽퍽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문화재의 가치를 알아보고 자발적으로 반환한 ‘훈훈한’ 사례들도 있는데요. 왜관수도원의 ‘겸재정선화첩’도 그중 하나입니다.

‘겸재정선화첩’ 중 ‘연광정도’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1911년 2월, 독일 성 베네딕도회 소속 상트오틸리엔수도원 초대 원장이었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는 파견된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교회들을 둘러보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4개월간의 체류 기간 동안 그는 한국의 풍습과 문화를 세심하게 관찰하며 그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14년 뒤인 1925년 또다시 한국을 찾은 베버 신부는 전통문화를 다룬 두 편의 기록 영화를 남기고 금강산을 유람했습니다. 뛰어난 예술가이자 탁월한 저술가였던 그는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의 금강산에서」 등으로 기록했습니다.

“내가 그토록 빨리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나라, 조선. ”
-「고요한 아침의 나라」


또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버 신부는 한국 여행 중 서울 정동의 대한성공회 성당 근처 고미술품점에서 겸재정선화첩을 구입, 이후 자국으로 가져간 것으로 전해집니다. 겸재정선화첩은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이 비단에 그린 총 21점의 그림인데요. ‘진경산수화’, ‘고사인물화’, ‘산수인물화’ 등 다양한 화제(畵題)를 다룬 이 화첩은 정선의 다채로운 예술세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작품으로 회자됩니다.

‘겸재정선화첩’ 중 ‘금강내산전도’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특히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 금강산이 통째로 드러나게 그린 ‘금강내산전도’는 겸재의 진경산수 화풍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꼽힙니다. 정선은 내금강의 전체 경관을 담은 ‘금강내산도’를 9점이나 남길 만큼 금강산을 즐겨 그렸는데, 이 화첩 속 ‘금강내산전도’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747년 작품인 ‘해악전신첩’의 ‘금강내산도’와 상당히 흡사하여 그의 말년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겸재정선화첩’ 중 ‘함흥본궁송도’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또 다른 그림인 ‘함흥본궁송도’는 태조 이성계가 함흥본궁, 즉 함흥의 고향집에 직접 심었다는 세 그루의 소나무를 그린 작품입니다. 정선은 이 소나무들을 직접 보지 않고, 함흥에 다녀온 사람의 설명만으로 그렸다고 하는데요. 과감한 구도가 인상적인 소나무의 모습이 꼭 태조의 기개를 닮았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겸재정선화첩이 다시금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반세기의 시간이 흐른 후입니다. 독일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던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는 우연히 베버 신부의 「한국의 금강산에서」를 접하게 됩니다. 책에 실린 그림들을 수소문하던 그는 오틸리엔수도원을 찾게 됐고 이곳에서 우연히 겸재정선화첩을 발견하게 됐죠.

1976년, 겸재정선화첩 소식을 국내에 전했지만, 반가운 마음도 잠시. 작품의 진가를 뒤늦게 알아본 수도원 측은 보안 등의 이유로 이 작품을 보존 처리 후 수장고에 보관하게 됩니다.

‘겸재정선화첩’ 발견한 유준영 교수 | 유준영 교수 제공

한편, 왜관수도원의 선지훈 신부 역시 겸재정선화첩의 귀환을 그 누구보다 바랐습니다. 그는 1991년부터 1996년까지 오틸리엔수도원에 머물며 뮌헨대학교에서 교회사를 전공했는데요. 이때 겸재정선화첩을 접했다고 합니다.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던 화첩을 좀 더 잘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며 한국으로의 반환을 요청했지만 전례가 없었던 탓에 수도원 측에서도 긍정적인 답변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1990년대 겸재정선화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입니다. 겸재정선화첩을 직접 본 미국 덴버미술관의 연구원 케이 블랙이 “숨 막힐 듯한 걸작”이라고 감탄하며 이를 미술 전문지 「오리엔탈 아트」에 논문을 실었고, 유명 경매 회사인 뉴욕 크리스티가 거액의 거래를 언급하며 경매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뭔가를 주려면 기꺼이 줘야 합니다. 화첩이 더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곳에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슈뢰더 아빠스의 담화문 중

2009년, 오랜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오틸리엔수도원은 겸재정선화첩을 왜관수도원에 선물했습니다. 왜관수도원은 6.25 전쟁 이후 오틸리엔 수도사들이 한국에 정착하며 각별한 인연을 맺은 곳이었습니다. 오틸리엔수도원은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유산을 돈으로 환산하기보다는 영구대여 방식으로의 반환을 하겠다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입니다. 2013년에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최된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특별전을 통해 대중에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이 선물이 더욱 값진 것은 이를 계기로 반환의 선순환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오틸리엔수도원은 2014년 ‘식물표본’ 420점을 국립수목원에 기탁했고, 2016년 6월에는 ‘익산 호적’을 문화재청에 기증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2018년 1월에는 독일인 신부가 한글로 제작한 ‘양봉요지’를 왜관수도원에 영구대여의 형식으로 돌려주었는데요. 이는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가 1918년 서울 백동(현재의 혜화동)에 위치한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쓴 것으로, 100년 전 한국의 근대 서양 양봉 기술의 탄생 과정을보여주는 자료이자 유일본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와 의미가 있는 유산입니다.

한국을 사랑했던 신부와 그 뜻을 이어받은 수도원의 빛나는 결정,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사연임이 틀림없지요?

아, 아델레의 초상화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클림트 애호가이자 화장품 회사인 에스티 로더의 상속자 로널드 로더에 약 1억 3,500만 달러에 판매됐습니다. 그는 14살 때 이 그림을 처음 본 후, 매년 이 초상화를 보기 위해 벨베데레 미술관을 찾았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수익금을 LA 오페라단을 비롯한 많은 곳에 기부했습니다. “새로운 소유주는 그림을 대중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마리아의 조건에 따라 현재 초상화는 로더 가문의 미술관인 뉴욕 노이에 갤러리에 전시돼 있습니다.

자료 및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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