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초절기교’,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

올댓아트 송지인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1.10.05 15:59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1.10.05 16:00

피아니스트 임윤찬|사진 올댓아트 송지인

“탁월한 것을 탁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며, 이 멋진 시작을 목격하게 된 것은 드문 행운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가 김초엽의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대해 소설가 정세랑은 이런 추천사를 남겼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꼭 같은 생각을 했다. 뒤로 젖혀져 있던 몸은 무대를 향해 절로 숙여지고 닫아놨던 귀가 쫑긋 세워지며 열리기까지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저런 걸까. 작은 종소리부터 화산의 폭발음까지, 임윤찬은 피아노 한 대로 수많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음과 음 사이까지 꽉 채운 연주는 대담했고 저돌적이었다.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 무대에 오른 임윤찬의 모습 ⓒ예술의전당(Seoul Arts Center)

허세 없이 진지한 연주 안에서 에너지가 폭발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스승인 손민수 피아니스트가 겹쳐 보이기도 하는데, 이 제자는 스승보다 훨씬 도발적이다. 주변의 호들갑에 동하지 않는 성격은 음악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임윤찬은 치열한 연습을 통해 치밀하게 설계한 음악을 무대 위에서는 오히려 본능적으로 연주했다. 스스로가 그것을 의식했든 하지 못했든, 그의 몸은 훈련된 움직임에 타고난 감각을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탁월한’ 피아니스트, 지금의 임윤찬을 목격하게 된 것은 정말로 드문 행운이었다.

(영상) 임윤찬이 연주하는 리스트 <순례의 해> 2년 ‘이탈리아’ 中 페트라르카 소네트 123|Youtube

2004년생인 임윤찬이 피아노를 시작한 것은 7세 때다. 그의 말을 빌리면 솔직히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연습에 그리 열심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은 피아노가 운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이는 지금의 스승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인 손민수 피아니스트다. 만 13세 때던 2017년, 손 교수를 만난 후 임윤찬의 재능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2019년에 개최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만 15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우승의 기록을 세웠고, 2020년에 예원학교를 음악과 전체 수석으로 졸업, 2021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 입학했다.

(영상) 임윤찬이 우승했던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 당시 2차 본선 경연 무대|Youtube

여기까지는 한국 클래식계의 수많은 기대주와 비슷해 보이나 임윤찬의 진가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우승 후 열린 여러 차례의 공연에서 제대로 드러났다. 음악평론가, 클래식 음악 전문 기자 등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클래식 음악계 최고의 기대주로 부상한 것은 물론이고, 몇 번의 공연만으로 애호가들 사이에서 바로 입소문이 났다. 가장 가까운 시일 내 열리는 서울 공연은 공연 일이 2주 정도 남았는데도 1천여 석의 좌석 중 이미 90% 이상이 동났다.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 <초절기교> 상세 보기

임윤찬은 지난 <교향악 축제>에서 수원시립교향악단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2번을 협연했다 ⓒ예술의전당(Seoul Arts Center)

임윤찬이 처음 공식적인 무대에 오른 것은 2015년, 만 11세에 연 금호영재콘서트 리사이틀 때였다. 이 공연으로 데뷔한 후 그는 2019년 스페인 마드리드 산페르난도 왕립미술원 콘서트홀에서의 첫 해외 독주회를 가졌다. 2020년 평창대관령음악제 메인 무대에서는 또 한 명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함께 2대의 피아노로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1번을 연주해 화제가 됐다. 음악제의 예술감독인 손열음이 유튜브에서 임윤찬의 영상을 보고 “함께 연주하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냈다는 것은 업계에 잘 알려진 이야기다.

(영상) 임윤찬의 데뷔 무대 영상, 당시 만 11세였다|Youtube

임윤찬은 2020년 코리안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하고, 2021년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의 최연소 협연자로 수원시립교향악단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2번을 연주하는 등 경험을 쌓아가는 협연 무대에서도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교향악 축제> 때는 앙코르가 끝난 후에도 객석에서 커튼콜이 멈출 줄을 몰랐다. 금호아트홀, 통영국제음악당, 예술가의 집(더하우스콘서트) 같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성지’와 같은 곳에서 연 단독 리사이틀에서는 바흐, 베토벤, 리스트 등의 작품을 연주했는데, “앙코르 공연을 열어달라”는 관객 요청이 쇄도해 2020년 금호아트홀 공연의 경우 실제 앙코르 공연이 열렸다.

(영상) 클래식 음악 애호가/평단이 극찬한 금호아트홀 공연은 앙코르까지 열렸다|Youtube

음악계의 뜨거운 반응은 임윤찬이 아직 해외의 대형 콩쿠르에 출전-입상하기 전이라 더 놀랍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를 제외하면 2018년 미국 클리블랜드 국제청소년피아노 콩쿠르 2위, 미국 쿠퍼 국제 콩쿠르 최연소 3위 수상 기록이 전부다. ‘타이틀’을 중시하는 국내 문화에서 쇼팽, 차이콥스키, 퀸 엘리자베스, 반 클라이번 등 해외 유수의 콩쿠르 수상 이력 없이 실력만으로 인정받기란 특히 어렵고 드문 일이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이 만 17세의 피아니스트는 벌써 첫 전국 투어 중에 있다. 전곡 리스트의 작품으로 통영, 광주, 대구, 성남, 서울의 관객들을 만난다. 지난 25일 통영에서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임윤찬은 오는 10월 12일 서울에서 이번 프로젝트의 피날레를 장식할 예정이다. 서울 공연은 또 하나의 기록이다. 임윤찬은 롯데콘서트홀 개관 후 역대 최연소로 단독 리사이틀을 개최하는 연주자가 됐다. 매 공연마다 국내 클래식계를 들썩이게 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늘 음악 생각뿐인 ‘천생’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만났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사진 올댓아트 송지인

이번 투어 프로그램으로 통영에서 첫 공연을 마쳤습니다. 스스로는 그날 연주에 만족했나요.

음…그래도 논란이 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논란의 기준은 뭔가요.

중간에 연주를 멈췄다거나 악보를 잊었다던가 하는 정도로 망치지는 않아서 다행이에요. 저는 그런 점 때문에 악보 보고 연주하는 걸 찬성하는 쪽인데요. 아직 나이가 어린데 악보를 보고 하면 좋지 않게 보일 것 같아서 그렇게는 못하고 있어요.

통영 공연 끝나고 미소를 활짝 지었는데, 무슨 의미였나요.

금호아트홀이나 통영국제음악당 같은 곳에서의 연주가 유독 긴장돼요. 두 곳을 찾으시는 관객분들의 수준이 정말 높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통영 공연이 굉장히 힘들었는데, 끝나니까 기분이 좋았어요.

앞으로 4번의 공연이 남아 있는데요. 수업도 받고 공연 준비도 하려면 잠잘 시간도 없을 것 같아요.

오전 9시에 수업이 있는 날은 그렇긴 한데…오전 수업 없을 때는 점심때까지 자요.(웃음) 오후 2시부터 새벽까지 연습하고요. 연습은 낮에도 하고 밤에도 하고…그냥 하루 종일 하는데, 항상 밤 9시쯤부터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제 주위의 피아노 전공하는 친구들도 그렇다고 하고요.

피아노를 연주하는 임윤찬의 모습|사진 올댓아트 송지인

임윤찬은 이번 투어에서 인터미션(Intermission)*공연 중간의 휴식 시간을 없앴다. 90분을 오직 피아노 소리로 가득 채운다. 그런데 인터미션이 없기에는 다소 혹독한 프로그램이다. 리스트의 평생의 걸작 <순례의 해> 중 2년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 소네트 전곡(3곡), 그리고 ‘초절기교’ 에튀드 전곡(12곡)을 연주한다. 휴식 시간도 없이 이 15개의 명곡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실력, 체력, 정신력, 그리고 굳은 의지와 자신감이 필요하다. 오히려 지금 나이이기 때문에 대차게 도전해 볼 수 있는 프로젝트다. 임윤찬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번 공연의 인터미션을 없앤 이유에 대해 “작곡가의 인생을 감정과 시간적 연속성에 따라 표현하다 보니 일부러 공백을 없앴다”고 밝혔다.

리스트의 페트라르카 소네트 전곡과 초절기교 에튀드 전곡을 인터미션 없이 연주하는, ‘도전적’인 프로그램입니다. 음악적으로 잘 풀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이 프로젝트를 후회한 적은 없나요.

리스트의 페트라르카 소네트는 작년부터 했던 곡이지만 초절기교 에튀드는 올해 5월부터 처음 하게 됐는데요. 예전에 제가 쇼팽 에튀드 25번(*12개의 연습곡 모음)을 두 달 정도 준비하고 연주한 적이 있어서, 리스트 초절기교 에튀드도 12곡이니까 그때처럼 두 달 정도면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곡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웃음) 처음 1-2주간 악보를 보면서 ‘이거 잘못하다가 큰일 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매일 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통영 공연이 끝났지만 앞으로도 네 번이나 남아서 지금도 마음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저는 남들과는 다른 어려운 길을 가고 싶고, 그래서 제가 이 프로젝트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절기교 에튀드는 피아노 레퍼토리 중에서도 손꼽히는 난곡인데요. 짧은 시간 안에 이 곡을 소화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뭔가요.

제가 잘 아는 곡일수록 제 문제가 무엇인지 눈에 더 잘 들어오는데, 이 곡을 하면서 제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사람인지 알게 되어서(웃음) ‘나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구나’ 하는 걸 많이 느끼게 되었어요. 그게 좀 힘듭니다.

반대로 가장 즐거운 점이 있다면.

초등학생 때부터 ‘리스트의 초절기교 에튀드를 언제 한번 다 연주해 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것을 이루게 되어서 기쁩니다. 키신의 음반으로도 들었었고, 제가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 피아니스트지만 베르조프스키가 초절기교 에튀드 전곡을 한 걸 보고 ‘이런 곡이 다 있구나’ 하면서 도전해 보고 싶어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는 예브게니 키신이 녹음했던 5번도 좋아했고, 듣기 효과적인 곡들을 좋아했던 때라 10번도 즐겨 들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초절기교 에튀드 중 어느 곡을 가장 좋아하나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초절기교’는 ‘기교가 너무 어렵다’는 것인데, 사실 리스트의 의도는 그게 아니라 그 어려운 기교를 넘어서 음악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 과정을 초절기교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저는 9번과 11번의 음악이 그 뜻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멜로디도 특히 마음에 와닿아서 이 두 개 곡을 가장 좋아합니다.

“어려운 기교를 넘어서 음악으로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초절기교”…다른 인터뷰에서도 “기교를 뛰어넘는 서사를 만들어내야 진정한 초절기교”라고 답했던데, 답변들이 인상 깊어요. 이런 생각들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제 선생님, 제 음악 친구들, 그리고 제가 아는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은 초절기교를 그렇게 ‘어려운 기교’ 같은, 일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요. 진지하게 피아노를 연주해온 사람들은 이 초절기교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고, 저도 그런 사람들이 해왔던 생각들을 당연히 이어서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임윤찬은 이번 투어에서 리스트의 <순례의 해> 2년 ‘이탈리아’ 中 페트라르카 소네트 전곡과 초절기교 에튀드를 연주한다 |사진 올댓아트 송지인

리스트의 다른 작품 중에도 좋은 곡이 많은데, 초절기교 에튀드 앞의 프로그램으로 페트라르카 소네트를 고른 이유는 뭔가요.

이 곡의 진행 코드, 화음에는 리스트의 작품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방법들이 쓰였어요. 그리고 많은 분들께서도 느끼셨겠지만 페트라르카 소네트는 리스트가 작곡한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아름다운 곡이에요. 멜로디도 시적이고요. 제가 처음에 편하게 시작할 수 있는 곡으로써 선택했어요.

페트라르카 소네트는 다른 리사이틀에서도 여러 번 선보였던 레퍼토리인데요. 처음 공식적인 무대에서 연주했을 때와 지금 연주할 때를 비교해 보면 스스로 느끼는 변화가 있나요.

처음 페트라르카 소네트를 했을 때는 이 곡을 연주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게 있었어요. 그래서 청중들에게 감동받으라는 식으로 했었는데(웃음) 지금은 힘을 많이 빼고 하게 됐어요. 제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작품 자체가 워낙 호불호가 없는 곡이거든요.

피아니스트 임윤찬|목프로덕션

임윤찬은 그간의 여러 인터뷰를 통해 레퍼토리 확장에 대한 의지를 밝혀 왔다. 피아노 작품이란 무수히 많은데, 그중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작품들은 피아노 레퍼토리의 줄기와 같은 굵직한 곡들이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는 “할 수 있다면 녹음만 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음반 작업에 대한 열의도 한창 불타는 중이다.

레퍼토리 욕심이 있다고 들었어요. 다닐 트리포노프처럼 거의 모든 레퍼토리를 점령해 보고 싶다고요.

제가 두세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다 마스터하지 못하는 게 피아노 레퍼토리라서요. 살아있는 동안 그냥 대충 이것저것 하는 게 아니라, 그 많은 피아노 레퍼토리 중에서도 진짜 중요한 줄기와 같은 곡들을 다 연주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그러면 이번 공연 후 다음 프로젝트로는 어떤 곡을 생각하고 있나요. 최근 한 인터뷰에서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언급했던데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은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해보고 싶은 곡이에요.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음반을 낸 피아니스트들이 많은데, 누구의 연주를 가장 좋아하나요.

어릴 때 제일 처음 접했던 건 어쩔 수 없이 글렌 굴드의 연주였는데요. 지금은 안드라스 쉬프의 바흐를 가장 좋아합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인 피터 세르킨의 연주도 좋아하고요. 원래 중학교 1학년 때 이 곡을 배우기 시작해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다 해보는 게 목표였어요. 중간에 콩쿠르도 열리고 해서 그 계획은 무산되긴 했지만…그때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음반을 제게 많이 주셨거든요. 그중에 콘스탄틴 리프쉬츠라는 러시안 피아니스트가 저와 비슷한 나이에 모스코에서 했던 게 있는데, 아마 졸업 연주였던 것 같아요. 그 음반도 좋아합니다.

앞으로 도전할 곡들을 음반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도 있나요.

손민수 선생님께서 “죽고 나서 남는 것은 음반”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음반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손민수 피아니스트에 대한 존경심이 큰 것 같아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손민수 선생님은 종교다”라고 했을 정도로요.

저뿐만 아니라 선생님께 배우는 다른 친구들, 동생들, 선배들도 다 저와 같은 생각일 거예요. 정말로 선생님 그 이상의 존재이신 분이세요.

금호아트홀 공연 당시 임윤찬의 모습 ⓒKumho Cultural Foundation

임윤찬의 인생을 바꾼 스승 손민수 피아니스트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재야의 고수와도 같은 연주자다. 매체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 아닌데도 손민수의 공연 좌석은 언제나 마니아들로 가득 찬다. 음악가로서의 사명감과 철학을 가지고 연주하는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존경받는 교육자이며, 임윤찬에게는 정신적 지주다. 지난해 명동성당에서 열렸던 임윤찬의 리사이틀 후, 손민수는 제자의 재능과 강점에 대한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하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2017년부터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지도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손민수 피아니스트|목프로덕션

“윤찬이의 특별함은 첫 레슨을 시작하면서 바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과묵하게 듣고 있다가도 눈을 번쩍이며 찾아나가는 기쁨을 보일 때. 그리고 늘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제가 내준 것 이상을 준비해올 때. 항상 외부적인 도드라짐보다는 음악 안에서 내성들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려고 하는 모습…. 음악에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윤찬이를 보며 (아무리 어린 나이라 할지라도) 순수하게 음악에 모아진 마음이 얼마나 큰 기적들을 만들어 내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타고난 집중력과 자연스러운 우아함, 그리고 그것들이 연주를 통해 나타나는 특별함, 강한 설득력, 단지 한 악기의 연주자로서만이 아닌 음악 전반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 역사에 대한 탐구정신, 어떠한 난곡을 마주쳐도 가장 효율적으로 곡을 준비하고 투명할 정도로 선명하게 나타나는 음색, 무대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한계점이 없이 맹렬히 파고 들어가 음악과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주자로서의 모습, 무한한 테크닉, 상상력, 표현력, 확신, 시적인 섬세함, 그리고 냉철한 두뇌까지. 임윤찬 군은 음악가에게 필요한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성장해 나가고 있는 피아니스트입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금호아트홀 공연 사진 ⓒKumho Cultural Foundation

유행을 좇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것을 추구한다는 임윤찬은 요즘 인기 있는 연주자들보다 20세기에 활약했던, 꼭 그의 스승처럼 전통적인 피아니즘을 고수하는 피아니스트들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 마리아 유디나, 에드빈 피셔, 유리 에고로프, 이그나츠 프리드만, 알프레드 코르토…. 가장 좋아하는 대중음악 가수도 굳이 꼽자면 또래에서 인기 있는 아이돌이 아니라 김광석, 유재하라고 한다. 음악 애호가라면 이쯤에서 그의 취향에 고개가 끄덕여질 터다. 그런데 이 ‘천생’ 음악가가 처음 피아노를 배운 계기는 흥미롭게도 단순히 어머니의 권유 때문이었다.

피아노를 배우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그건 아니에요. 처음에는 그냥 어머니께서 “악기를 하나 배웠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시작했어요.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요. 그러다가 TV에서 예술의전당 영재 아카데미를 다니는 분을 보게 된 거예요. 그걸 보고 어머니에게 예술의전당 영재 아카데미에 대해 말씀드렸고, 초등학교 2학년 때 입학하게 됐습니다.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 건 언제였나요.

영재 아카데미에서 저를 처음 가르쳐주셨던 교수님께 배운 첫 곡이 쇼팽 왈츠 B minor(10번)이었는데, 그 교수님께서 “키신과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를 한번 들어봐”라고 하셨거든요. 그때부터 키신의 음악을 계속 찾아 들었어요. 그러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키신의 내한 공연을 봤는데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았고(웃음) 말도 안 되는 연주를 했어요. 그걸 보면서 ‘아, 이거 진짜 멋진 거구나’ 하고 깨달았고, 피아니스트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마리아 유디나,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에드빈 피셔 같은, 20세기에 활약했던 피아니스트들에게 빠졌다고요. 유튜브에도 영상이 거의 없는 피아니스트들인데 이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손민수 선생님께서 20세기에 활동했던 피아니스트들의 이름을 많이 알려주셔서, 그들의 음반을 다 들어 보았어요. 그때부터 키신 말고도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 피아니스트들에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스스로가 피아니스트로서 무대에 서고 있는데, 가장 최근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기쁘고 뿌듯한 감정을 느꼈던 때는 언제였나요.

최근에는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연습할 때 그나마 좀 뿌듯한 순간은 제 머릿속에 있는 음악이 현실에 나왔을 때예요. 그걸 위해서 연습한 것이기 때문에, 그럴 때 가장 기분이 좋습니다.

임윤찬은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나이와 관계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주자다|사진 올댓아트 송지인

평소 좋아한다는 <무한도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에 또래 친구들과 비슷한 장난기가 언뜻 스쳤다가도, 이내 눈빛을 다잡고 진지한 태도로 답하는 그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계속해서 머릿속에 되새기고 있는 듯했다.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그 찰나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평단의 격찬을 받은 연주뿐만 아니라 생각도, 말도 성숙한 성인 연주자와 다를 바 없었다. 외려 그는 입만 산 일부 성인 연주자들보다 훨씬 엄숙한 태도로 음악을 대했다. 특히 “피아니스트라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걸 절대 장난으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할 때는 차가우리만치 단호한 모습이었다. 어린 나이치고, 나이가 무색한, 이런 표현들은 그의 연주와 말 앞에서 무색하다. 음악에 대한 확고한 가치관과 성실함, 거침없는 성격은 자신감과 실력이 되어 임윤찬의 연주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무한한 가능성을 만든다.

스스로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하나요. 혹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글렌 굴드가 “완벽한 음악은 오로지 스튜디오에서 일어난다” 라고 했던 게 기억나요. 굴드도 워낙 완벽주의자였는데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음악가라면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진짜 음악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벽주의 외적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평소에도 이렇게 진지한 편인가요.

피아노가 성격을 바꾼다고, 어릴 때는 밖에 나가서 노는 것도 좋아하고 그랬어요. 제 친구들도 그렇고요. 초등학교 때도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손민수 선생님께 배우기 시작하면서 달라졌어요. 선생님께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건 말도 안 되게 힘든 일이고, 정말 진지하게 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저도 그런 자세로 배우기 시작하면서 달라졌고…사실 저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로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은 대부분 진지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피아노를 한다는 것에는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서요. 피아노를 잘 연주하는 사람인데도 이상하게 일이 안 풀려서 나중에는 더 이상 음악을 못할 정도로 힘들어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 상황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저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피아니스트라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걸 절대 장난으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사진 올댓아트 송지인

지난해 명동성당에서의 연주가 인상적이었어요. 뭐랄까, 무아지경에 빠진 것 같았거든요. 그럴 때는 어떤 기분을 느끼나요.

어떤 감정이 느껴진다기보다는, 제 손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 들어가려면 연습이 잘 되어 있어야 해요. 제가 많이 긴장했던 때를 생각해 보면 일정 때문에 말도 안 되게 짧은 기간 안에 연주를 준비할 때였거든요. 확실하게 준비되어 있을 때, 자신감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그런 (무아지경의) 상황에 빠지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저돌적인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연주를 보면 성격을 안다고 하잖아요. 관객으로서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면 그런 면이 좀 느껴지더라고요.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내 길을 간다” 하는 게요. 실제 성격에 그런 부분이 있나요.

저도 옛날에는 남들이 하라는 거 하고 눈치도 많이 보고 그랬는데요. 생각해 보니까 인생은 남이 책임을 져줄 수 있는 게 아니고, 또 피아노를 연주하는 행위 자체가, 제가 연주를 할 때는 아무도 저를 방해할 수 없잖아요.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제가 어떤 공연을 앞두고 너무 긴장해서 힘들었거든요. 친구에게 “너무 긴장된다”고 했는데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우주는 끝도 없이 크고 어디가 끝인지 모르고 행성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데, 그 많은 행성들 중에서 지구가 제일 큰 것도 아니고 엄청 작은 행성인데, 그보다 더 작은 인간 앞에서 연주하는 걸 떨려 하면 안 된다”고요. 맞는 말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제 마음대로 해버리는 걸로 바뀌게 됐습니다.

이제 점점 더 많은 무대에 서게 될 텐데요. 해외에는 흔히 말하는 ‘최고의 공연장’이라는 곳들도 많고 큰 규모의 페스티벌들도 많은데, 연주자로서 꼭 서보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요.

저는 카네기홀이나 이런 곳보다는 너무 크지는 않지만 정말 위대한 음악가들이 거쳐갔던 그런 곳을 좋아해요. 어릴 때부터 항상 꿈꿔왔던 베르비에 페스티벌이나 위그모어홀 무대에 서보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받을 질문이겠지만 지금의 임윤찬의 답이 궁금합니다. 어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나요.

제가 말러를 좋아하지는 않고 기독교를 믿지는 않지만, 말러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굉장히 힘든 길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납니다. 저는 남들이 쉽게 가는 길 말고 아무도 가지 않은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번 리스트 초절기교 전곡 프로젝트도 그런 생각으로 선택한 거고요. 쉬운 길만 가거나 유치한 레퍼토리만 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음악을 하는 피아니스트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리사이틀 <초절기교>|목프로덕션

자료|목프로덕션, Youtube, 금호문화재단,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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