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가 아닌, 줄리엣을 사랑한 줄리엣…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올댓아트 임승은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1.11.03 11:20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1.11.11 10:09

“빛이다! 저기가 동쪽이니까 그렇다면 나의 줄리엣은 태양이야.”

이 대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 등장하는 로미오의 독백입니다. 줄리엣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그가 넘쳐흐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내뱉는 말이죠. 그런데 화자가 달라진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줄리엣이 줄리엣에게 건네는 말이라면요.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공연 사진. 창작집단LAS, 골든에이지컴퍼니

10월 21일,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이 개막했습니다. 이번 공연은 2018년 초연 이후, 다시 돌아온 세 번째 시즌인데요. <줄리엣과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한 작품입니다. 줄리엣과 사랑에 빠지는 인물을 로미오가 아닌, 그의 누나이자 동명이인인 또 다른 줄리엣으로 설정했죠. 이 공연은 두 줄리엣의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며, 퀴어 여성의 삶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우투리: 가공할만한> 등, 고전을 재창작하는 창작집단 LAS (이하 ‘라스’)가 제작했고, 줄리엣 몬테규 역을 맡은 배우 한송희가 직접 극작을 담당했습니다. 두터운 마니아 팬층을 보유한 라스답게 <줄리엣과 줄리엣>은 초연부터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전 세대를 걸쳐 사랑받은 작품, 그것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재창작’한다는 것은 무모하게 비칠 수 있습니다. 이미 익숙한 이야기를 비틀어 해석해 버리면, 자칫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왜 하필 이들은 세기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선택해 각색했을까요?

비극적인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

<로미오와 줄리엣>, 포드 브라운|Wikipedia

1597년에 발표된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셰익스피어는 16~17세기 영국을 풍미한 당대 최고의 극작가인데요. <햄릿>,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 밤의 꿈> 등 숱한 명작을 발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16세기 베로나, 캐플렛 가(家)와 몬테규 가(家)는 서로 원수 관계입니다. 하지만 두 가문의 딸과 아들, 줄리엣 캐플렛과 로미오 몬테규는 한 가지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줄리엣은 가족으로부터 패리스 백작과의 결혼을 강요받고 있었고, 로미오는 로잘린이라는 여성과 만남을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로미오는 캐플렛 가(家)의 무도회에 숨어들어가게 되고, 그 순간 줄리엣과 사랑에 빠져버립니다. 결국 둘은 로렌스 신부에게 도움을 청해, 그의 앞에서 비밀스레 결혼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다음 날, 두 가문 사이에 일어난 싸움으로 인해 로미오는 도시 내에서 추방당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캐플렛 가(家)는 줄리엣과 패리스 백작의 결혼을 강제적으로 진행시켜버립니다. 결국 줄리엣은 로렌스 신부가 건네준 약을 먹고 가사 상태에 빠져버리는데요. 이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로미오는 차갑게 굳은 줄리엣의 모습을 목격한 후 충격에 휩싸입니다. 그 모습을 오해한 패리스 백작은 그에게 달려들고, 로미오는 얼떨결에 백작을 살해해버리죠. 그 후,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인 로미오는 독약을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뒤늦게 깨어난 줄리엣 또한 그의 죽음을 발견한 뒤,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사망하게 됩니다.

현재까지도 ‘명작’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라고 들어보셨나요? 원수 가문이라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혔던 두 주인공처럼, 주변에서 자신의 의지를 위협하고 무력화시킬수록 더 강하게 저항하게 되는 심리 현상을 뜻하는데요. 미국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반대가 강한 연인일수록 애정이 심화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의 이름을 본 딴 심리학 용어가 있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들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는 유명하다 못해, 러브스토리의 원형으로 자리 잡기까지 했죠. 대체 이 희곡이 현대까지도 꾸준히 회자될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품 속 두 주인공은 단 5일 동안 목숨을 버릴 정도로 광적이고 격렬한 사랑을 나눕니다. ‘사랑’이란 어떠한 이해관계나 정치적인 상황으로부터 독립된 가장 날것의 감정인데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마음이기도 하지만, 순수하기에 더욱 쉽게 물들고 빠르게 망가지기도 하죠. 때문에 ‘사랑’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은 달랐습니다. 둘의 무모할지라도 용기 있는 선택은, 희생적인 사랑의 형태를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놀라움과 경외심을 전달합니다. 물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지만, 독자들은 이를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편의 시처럼 읽히는 문체의 영향도 큽니다. 셰익스피어는 대부분의 작품을 운문체 희곡으로 집필했는데요. <로미오와 줄리엣> 또한 영시에서 흔히 쓰이는 약강 5보격 운율을 사용해 완성했습니다. 우리말로 따지면 4·4조 혹은 그 변조(7·5조)와 비슷한 형식이죠. 하지만 유난히 해당 작품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인물과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운율의 운문 대사를 구사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두 주인공의 대사는 독자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합니다.

영화부터 SF 물까지, 다양하게 재해석된 <로미오와 줄리엣>

작품은 오랜 시간 동안 발레, 오페라, 연극,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재해석돼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각각 1968년, 1996년에 제작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먼저 1968년판은 배우 올리비아 핫세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만든 작품인데요. 원작의 내용을 충실하게 담아내어 화제가 된 영화이기도 합니다. 시대 배경과 의상의 고증도 완벽함에 가까웠고, 등장인물들의 시적인 대사도 중세 영어로 옮겨 번역했죠. 실제 1969년 제22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제41회 미국 시상식에서 의상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96)은 이와 조금 다릅니다. 바즈 루어만의 감독 하에 전체적인 시대 배경을 현대로 재해석했는데요. 대부분의 줄거리는 원작과 동일하게 흘러가나, 이로 인해 일부 장면이 현대적으로 각색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제51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하며, 훌륭한 고전의 재해석 사례로 평가되었습니다. 해당 영화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로미오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공연계에서도 원작을 재해석한 작품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 2016년에 국내에서 초연된 창작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은 특색 있는 각색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공연은 핵전쟁 이후 생겨난 돌연변이 로미오와 마지막 인류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주인공의 이름과 전체적인 틀은 희곡과 동일하지만,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줄거리가 새롭게 창작되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발코니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을 감옥으로 변경하는 등, 원작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치들을 곳곳에 숨겨놓기도 했습니다. 관객들에게는 신선한 각색이라는 평을 받으며, 마니아층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2018년 초연을 시작으로 2021년 삼연까지 선보인 연극 <알앤제이(R&J)> 또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공연은 엄격한 가톨릭 남학교에 재학 중인 네 명의 소년이 늦은 밤 기숙사를 빠져나오며 시작됩니다. 비밀 장소로 향한 이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낭독하며, 희곡 속 금지된 사랑, 폭력, 욕망에 점점 매료돼가는데요. 심지어는 작품 속 등장인물에 자신들의 삶을 투영하며,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관습, 규율, 금기, 억압, 편견의 장별을 넘어설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알앤제이>는 극중극 형식으로, 배우들이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낭독하며 진행됩니다. 공연 속 대거 인용된 <로미오와 줄리엣>은 후반부로 갈수록 소년들의 이야기라고 느껴질 만큼 작품 속에 깊게 스며들죠. 그 미묘한 경계 속에서, 희곡의 흐름을 따라가던 관객들은 점차 학생들의 감정에 빠져듭니다. 해당 공연은 원작을 새로운 형식으로 재창조했다는 점에서, 초연 당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기 위해 애쓰는 <줄리엣과 줄리엣>

원작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다

그렇다면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은 어떠한 형식으로 원작을 재해석했을까요? 앞서 말했다시피, 남자 주인공 로미오가 여성인 줄리엣 몬테규로 변경됩니다. 또한 기존의 로미오는 줄리엣의 남동생으로 출연합니다. 공연의 줄거리는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편이지만, 주인공들이 마주하게 되는 외부적인 억압의 주제가 달라지는데요.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가문 간의 갈등이 아닙니다. 오히려 <줄리엣과 줄리엣>은 두 가문이 원수지간이 되기 이전의 이야기를 다루거든요. 두 여성의 사랑 앞에 놓인 장애물은 바로 동성애자를 향한 주변인들의 혐오 섞인 반대죠.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공연 사진. 창작집단LAS, 골든에이지컴퍼니

레즈비언인 줄리엣 몬테규는 사랑하는 여인 로잘린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런 줄리엣을 지켜보던 동생 로미오는 그에게 무도회에 참석해 볼 것을 권유하는데요. 한참을 거절하던 그는 결국 무도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그곳에 있던 줄리엣 캐플렛에게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이전까지 성 지향성을 깨닫지 못했던 줄리엣 캐플렛 또한 그에게 매료되죠.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원작이 그러했듯,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에도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줄리엣 캐플렛의 커밍아웃 이후 그의 오빠는 몬테규 가(家)에게 찾아가 혐오 섞인 말을 내뱉고, 어머니는 현실을 부정합니다. 누나를 보호하기 위해 임기응변을 발휘했던 로미오 또한, 섣부른 말로 줄리엣 몬테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두 주인공이 마주하는 혐오와 억압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까지에 이릅니다. 이처럼 <줄리엣과 줄리엣>은 여전히 편견을 마주해야만 하는 퀴어 여성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아냅니다. 관객들이 공연을 단순히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고전을 바탕으로 하나,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방향은 오롯이 현시대를 향해있으니 말이죠.

또 다른 소수자들의 등장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공연 사진. 창작집단LAS, 골든에이지컴퍼니

<줄리엣과 줄리엣>에는 레즈비언을 제외한 또 다른 성소수자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바로 줄리엣 캐플렛의 하녀 ‘네릿서’인데요. 자신의 성 지향성을 뚜렷이 언급하지 않으나, 은유적인 대사들을 통해 무성애자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죠. 줄리엣 캐플렛의 사랑을 진심으로 지지해 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눈여겨볼 점은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네릿서의 전부를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비성소수자가 굳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다양성이 반영된 캐릭터 구성과 그들을 사용하는 방식은 <줄리엣과 줄리엣> 창작진들의 세심함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시대 배경과 이질적인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원작에서는 로렌스 신부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을 담당했다면, 공연에서는 새로운 인물 ‘승려’가 그를 대신합니다. 당시 16세기 유럽은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요. 비주류를 대표하는 불교의 승려를 추가함으로써, 소수자가 또 다른 비주류의 사랑을 포용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연출해냈죠. 또한 승려는 자칫 무겁고 심오해질 수 있는 극에 적절한 유머 요소를 가져다주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지난 시즌과 달라진 점

이번 공연은 지난 시즌과 비교해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먼저 줄리엣 캐플렛의 아버지를 어머니로 변경했는데요. 이를 통해 한층 더 복잡해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애착 관계를 그려냈습니다. 특히나 줄리엣 캐플렛의 커밍아웃 직후, 어머니는 딸을 책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물어보는데요. 이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딸에게 자아를 투영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남성이 연기했던 승려 역에 여성 소리꾼인 정지혜를 캐스팅했습니다. 승려는 작품 속에서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로 등장하기도 하죠.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재해석한 <줄리엣과 줄리엣>. 이 작품이 반가운 이유는, 그동안 한국 공연계에서 많이 다루지 않았던 레즈비언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인데요.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궁금하시다면, 지금 공연장을 찾아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2021.10.21~2021.11.21
서울 브릭스씨어터
공연 시간 100분
만13세 이상 관람가
한송희, 김희연, 김연우, 허영손, 이안나, 이주희, 정지혜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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