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올림픽 개막 무대 노리는 ‘디지털 아이돌’

장지영 공연 칼럼니스트
입력2019.02.18 10:19

음악계에 혁명 가져온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

하츠네 미쿠와 결혼식을 올린 콘도 아키히코 | OTAQUEST 트위터

일본에서 지난해 11월 인공지능(AI) 홀로그램 가수 하츠네 미쿠와 실제 결혼식을 올린 일본 남성의 이야기가 최근 국내 온라인을 달궜다. 국내 예능 프로그램에 방영되면서 널리 알려진 이 결혼 뉴스는 단순한 흥밋거리를 넘어 AI 로봇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미래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미 해외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일본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이 남성은 10년 전 직장에서 왕따를 당해 휴직했을 때 하츠네 미쿠의 노래에서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하츠네 미쿠의 열렬한 팬이 된 그는 지난해 일본의 IoT(사물인터넷) 전문 회사인 게이트박스(gatebox)가 출시한 한정판 하츠네 미쿠 홀로그램 장치를 경험한 후 결혼까지 결심하게 됐다. 회사명과 동일한 이름의 이 제품은 투명한 원통 안에 캐릭터가 입체 홀로그램으로 등장한다. AI 프로그램 및 내장 카메라와 인체 감지 센서가 장착돼 있어 사람과 대화도 가능하다.

39명이 하객으로 참가한 결혼식에서 이 일본 남성은 봉제 인형으로 된 하츠네 미쿠에게 반지를 끼우고 키스도 했다. 캐릭터 사랑이 유별나기로 유명한 일본에서도 이 남성의 행동은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해 ‘디지털 아이돌’로 불리는 하츠네 미쿠의 대단한 인기를 고려할 때 하나의 해프닝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하츠네 미쿠

하츠네 미쿠는 보컬과 안드로이드의 합성어 ‘보컬로이드’ 소프트웨어를 캐릭터화 한 것이다. 나이 16세(최근 버전에선 17세), 신장 158cm, 체중 42kg에 녹색 머리를 가진 하츠네 미쿠는 2007년 8월 발매된 2세대 보컬로이드다. 일본 야마하가 컴퓨터 음악 제작을 위해 만든 보컬로이드는 사람의 목소리에서 소리의 최소 단위를 추출해 합성하는 소프트웨어다. 가사와 멜로디를 입력하면 사람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하츠네 미쿠는 일본 성우 후지타 사키의 목소리에서 음성을 추출했다.

보컬로이드는 지원 언어나 음역 폭에 따라 버전이 나뉘고 그 버전을 ‘세대’라 칭하는데, 하츠네 미쿠는 2세대에서 등장했다. 마케팅을 담당했던 일본 크립톤퓨처미디어는 이용자들이 친근함과 현실감을 줄 수 있도록 가상의 아이돌 캐릭터를 만들었다. 1세대에서도 보컬로이드 캐릭터가 나왔지만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2007년 8월 일본의 UCC 동영상 사이트 니코니코 동화에 한 사용자가 1930년대 핀란드 노래 ‘이에반 폴카(Ievan Polkka)’를 부르는 하츠네 미쿠를 업로드하면서 2차 창작 붐을 촉발시켰다. 하츠네 미쿠가 노래하면서 커다란 대파를 돌리는 이 동영상이 큰 인기를 끈 뒤 다른 사용자들도 앞다퉈 하츠네 미쿠를 사용한 동영상을 만든 것이다.

처음엔 하츠네 미쿠가 기존의 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점차 아마추어 작곡가들이 만든 신곡을 부르는 경우가 늘어났다. 사용자들은 마치 자신이 하츠네 미쿠라는 가수의 곡을 만드는 프로듀서나 작곡가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2007년 12월 창작자 프로젝트 그룹 슈퍼셀(Supercell)의 작곡가 료(Ryo)가 만들고 하츠네 미쿠가 부른 ‘멜트(Melt)’는 니코니코 동화에서 수백만 건의 재생 횟수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멜트’가 포함된 슈퍼셀의 음반은 2009년 일본 오리콘 차트 2위까지 올라갔다.

‘멜트’ 외에도 하츠네 미쿠가 부른 신곡들 가운데 ‘센본자쿠라’ 등 온라인에서 인기를 끈 곡들은 일본의 메이저 음반회사를 통해 다시 유통되며 오리콘차트 1위까지 올랐다. 가난한 아마추어 작곡가들에게 있어서 하츠네 미쿠는 자신들의 노래를 불러주는 ‘희망의 여신’이 된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인기 있는 싱어송라이터 요네즈 켄시는 10대 시절 니코니코 동화에서 하츠네 미쿠를 통해 발표한 노래들이 인기를 끌면서 주류로 진출했다.

이런 2차 창작 열풍은 크립톤퓨처미디어가 하츠네 미쿠 캐릭터에 대해 비영리인 경우 자유로운 사용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사이키 마사오 등 유명 작곡가들도 앞다퉈 하츠네 미쿠를 활용해 신곡을 발표하는가 하면 아무로 나미에, 범프 오브 치킨 등 유명 가수들과 하츠네 미쿠의 컬래버레이션이 행해지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하츠네 미쿠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상 캐릭터(virtual character)이며, 하츠네 미쿠를 앞세운 보컬로이드가 음악계에 혁명을 초래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극소수의 음악산업 종사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누구나 손쉽게 집에서 노래를 만들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하츠네 미쿠 덕분에 카가미네 린과 카가미네 렌 그리고 메구리네 루카 등 다른 보컬로이드들도 큰 인기를 얻게 됐다. 그리고 현재 보컬로이드는 5세대까지 나오면서 점점 성능도 좋아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보컬로이드 3세대에 속하는 시유가 나왔지만 일본처럼 2차 창작 붐이 일지는 않았다.

‘디지털 아이돌’ 하츠네 미쿠는 인기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 소설, 게임, 피규어 등의 파생 상품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하츠네 미쿠의 최고 히트곡 ‘센본자쿠라’가 나온 후 이를 모티브로 한 동명 소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만화가 출판된데 이어 니코니코 동화에 하츠네 미쿠 등 보컬로이드 캐릭터들이 나오는 동명 뮤지컬이 업로드됐다. 그리고 이것은 뮤지컬 전문 배우와 AKB 멤버들이 출연하는 실제 뮤지컬로 다시 만들어졌으며, 일본의 유명한 가부키와의 컬래버레이션 무대까지 이어졌다.

하츠네 미쿠는 게임회사 세가와 손잡고 인터넷을 넘어 현실 세계로 발을 넓혔다. 세가는 2009년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 전용 게임 ‘하츠네 미쿠-프로젝트 디바’를 출시해 인기몰이를 한데 이어 이듬해 콘서트 무대 위로 하츠네 미쿠를 끌어올렸다. 바로 홀로그램 콘서트를 기획한 것이다. 원래 팬들을 위해 단발성 이벤트로 기획됐지만 열광적인 호응을 얻자 지금까지 매년 이어지고 있다. 점점 기술력이 더해진 하츠네 미쿠는 매년 일본 전역에서 홀로그램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 중국 유럽 싱가포르 등 해외에서도 홀로그램 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하츠네 미쿠 2018 라이브 영상

사실 하츠네 미쿠보다 앞서 홀로그램 콘서트를 연 가상 밴드가 있다. 영국의 4인조 밴드 고릴라즈다. 고릴라즈는 1998년 영국 록그룹 블러의 보컬이자 리더인 데이먼 알반이 <탱크걸>로 유명한 만화가 제이미 휴렛과 손잡고 만들었다. 보컬 겸 키보디스트 2D, 베이시스트 머독 니칼즈, 드러머 러셀 홉스, 기타리스트 누들이 고릴라즈의 멤버들이다. 카툰으로 형상화된 멤버들은 치밀하게 만들어진 각각의 바이오그래피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왼쪽부터) 고릴라즈, 공연 사진 | 위키피디아

2차원 카툰으로 시작된 고릴라즈는 2005년 MTV 유럽 뮤직 어워드에서 처음 홀로그램 콘서트를 펼쳤다. 고릴라즈 멤버들이 처음 입체적(3D)인 모습으로 등장한 이 특별 이벤트는 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고릴라즈는 미국 그래미 시상식에서 마돈나와 함께 홀로그램 콘서트를 다시 펼쳤다.

그러나 하츠네 미쿠가 소프트웨어를 통해 인간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고릴라즈는 알반을 비롯해 실제 가수가 직접 노래를 부른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하츠네 미쿠의 경우 성능이 좋아졌어도 여전히 기계적인 느낌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하츠네 미쿠가 홀로그램 콘서트를 자주 여는 것과 달리 고릴라즈는 특별 이벤트로만 펼치고 있다. 지난 2017년 국내 록 페스티벌에 온 고릴라즈의 공연도 멤버들의 카툰 영상을 배경으로 알반이 노래하는 것이었다.

네티즌의 놀이로 시작된 보컬로이드 문화는 테크놀로지와 예술이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하츠네 미쿠의 인기와 확장성에 놀란 순수예술 분야에서도 하츠네 미쿠에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2012년 일본의 저명한 작곡가 토미다 이사오는 자신의 <이하토브 교향곡> 초연에 하츠네 미쿠를 솔리스트로 출연시켰다. 홀로그램의 하츠네 미쿠가 일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등 300여 명의 인간과 함께 등장한다. 이 콘서트는 초연 당시 평단과 관중의 호평을 받아 전국 투어가 열렸다.

하츠네 미쿠 오페라 ‘The End’

그리고 같은 해 2012년 12월 일본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예술센터는 전자음악 작곡가 시부야 케이이치로, 극작가 겸 연출가 오카다 토시키에게 의뢰해 만든 세계 최초의 보컬로이드 오페라 <The End>가 공연됐다. 이 작품은 인간이 전혀 나오지 않은 채 하츠네 미쿠가 노래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이듬해 도쿄 공연을 시작으로 프랑스, 중국 등 해외에서도 잇따라 초청됐다.

젊은 층의 외면을 받고 있는 일본 전통예능도 하츠네 미쿠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잇따라 꾀했다. 전통 인형극인 분라쿠는 하츠네 미쿠가 분라쿠 음악에 맞춰 춤추거나 반대로 분라쿠 인형이 하츠네 미쿠의 히트곡에 맞춰 춤추는 공연을 펼쳤다. 또한 하츠네 미쿠를 주인공으로 한 현대적인 분라쿠도 시도했다. 여기에 전통 가면극인 노에서도 하츠네 미쿠와의 합작을 꾀하는가 하면, 전통 악기들로 하츠네 미쿠의 곡을 연주하는 밴드가 등장하는 등 일본 전통예능은 하츠네 미쿠를 통한 젊은 층과의 소통에 적극적이다.

다만 하츠네 미쿠는 화제성과 신곡 재생 횟수 등의 측면 면에서 2012~2014년 정점을 찍은 듯한 모습이다. 당시 일본을 넘어 해외에서도 하츠네 미쿠가 만들어낸 패러다임에 주목해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 구글과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루이 뷔통 등이 하츠네 미쿠를 모델로 발탁했다. 또 2012년 미국 CBS의 ‘데이비드 레터맨 쇼’가 하츠네 미쿠를 초대해 라이브 공연을 여는가 하면, 팝스타 레이디 가가는 2014년 자신의 미국 투어 오프닝 공연에 하츠네 미쿠를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하츠네 미쿠가 일으킨 보컬로이드 문화는 이후 열기가 다소 식었다. 실제로 도쿄돔을 가득 채우던 홀로그램 콘서트는 이제 그보다 작은 규모의 공연장으로 바뀌었다. 이와 관련해 일본에서는 한동안 보컬로이드 쇠퇴론 논쟁이 일기도 했는데, 다양한 보컬로이드 문화를 만들어내며 신드롬을 일으키던 단계에서 이제 자연스럽게 정착했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실제로 하츠네 미쿠를 이용한 수많은 창작물이 여전히 끊임없이 나오는 등 대중화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하츠네 미쿠가 2020 도쿄올림픽 개·폐막식 무대에 설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다시 한번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폐막식에 게임 캐릭터 슈퍼마리오 차림으로 등장하면서 2020 도쿄올림픽 개·폐막식은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일본 캐릭터들의 향연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 바 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의 음악감독을 맡는 등 일본의 국제 행사에서 단골로 참여하는 유명 작곡가 사에구사 시게아키 도쿄음대 교수는 일찌감치 하츠네 미쿠에게 올림픽 공식 주제가를 부르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을 정도다. 이외에도 하츠네 미쿠와 일본 전통예능을 대표하는 가부키 배우, 와타이코(일본의 전통적인 큰 북) 단체와의 합동 무대를 도쿄올림픽 개·폐막식 프로그램에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하츠네 미쿠가 가상 캐릭터로는 처음 올림픽 개·폐막식에 출연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공연 칼럼니스트 장지영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성균관대 공연예술협동과정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한국기자협회 지원으로 일본 도쿄대학대학원 문화자원학과에서 연수했다. 1997년 국민일보에 입사해 문화부 스포츠부 사회부 국제부 등 여러 부서를 거쳤다. 2003년 문화부에서 처음 공연을 담당하면서 공연계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기자로서만이 아니라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재밌게, 재밌는 것을 진지하게, 진지한 것을 유쾌하게, 그리고 유쾌한 것을 어디까지나 유쾌하게”라는 일본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격언을 따르려고 노력 중이다.

<장지영 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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