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백조의 호수’와 2인자의 슬픔

장지영 공연 칼럼니스트
입력2019.03.25 14:35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03.25 14:37

마리우스 프티파의 그늘에 가려졌던 레프 이바노프

발레의 메카로 러시아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발레 용어가 만들어지고 발레학교 및 발레단이 처음 생긴 곳은 프랑스지만 현재 전 세계 발레단의 기본 레퍼토리가 러시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발레의 무게중심이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옮겨간 것은 19세기 후반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극장(지금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활동한 마리우스 프티파(1818~1910) 덕분이다.

발레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이름을 들어봤을 프티파는 고전(Classic) 발레를 완성한 인물이다. 프티파는 낭만(Romantic) 발레 시대에 등장한 파드되(2인무)를 발전시켜 ‘그랑 파드되’(큰 2인무라는 뜻으로 남녀 주인공이 추는 고난도의 긴 2인무) 형식을 확립했고, 줄거리와 상관없이 다채로운 춤을 보여주는 ‘디베르티스망’을 도입했다. 또 흰 튀튀를 입은 군무의 일사불란한 춤인 ‘발레 블랑’이 자리 잡은 것도 프티파에 의해서다.

마리우스 프티파(왼쪽)와 1895년 <백조의 호수>에 출연한 무용수들. | 프티파 소사이어티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돈키호테> 등 오늘날 전 세계 발레단에서 공연되는 고전 발레의 대부분은 프티파가 창작 또는 개작한 것이다. 19세기 전반 낭만(Romantic) 발레를 상징하는 <지젤>도 프랑스에서는 잊혔다가 프티파가 러시아에서 재안무한 덕에 부활했다.

그런데, 프티파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프랑스인이다. 프티파는 1847년 황실극장의 주역급 무용수로 러시아에 처음 왔다. 다만 스타 무용수는 아니었다. 그가 스페인에서 여자 문제로 스캔들을 일으킨 뒤 파리오페라발레의 스타 무용수였였던 형 뤼시엥 프티파(1815~1898)의 주선으로 황실 극장에 기용됐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황실과 귀족의 비호 아래 뒤늦게 발레 붐이 일면서 유럽의 무용수와 발레 마스터(안무가)가 잇따라 초청됐다. 특히 발레 마스터로는 발레의 본고장인 프랑스 출신이 선호됐다. 유럽에서 발레가 쇠퇴한데다 러시아 황실의 대우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이들 대부분 응낙했다.

1847년 <파키타>의 주역으로 러시아 데뷔를 한 프티파는 이듬해 새로운 수석 발레 마스터로 온 쥘 페로 밑에서 무용수 겸 조수로 활동했다. <지젤> 안무로 유명한 페로는 황실 극장에서 여러 프랑스 작품을 리바이벌했는데, 프티파는 대작의 안무나 제작에 대한 노하우를 익힐 수 있었다. 또 1859년 페로의 뒤를 이은 아서 생-레옹은 관대한 편이어서 프티파에게 안무 기회를 줬고, 1860년 파리오페라발레의 발레 마스터가 된 뤼시엥 프티파는 동생에게 발레 대본들을 보내주며 최신 흐름을 챙길 수 있게 도왔다.

<백조의 호수>의 3막 흑조 파드되. | 마린스키 발레단

1862년 차석 발레 마스터가 된 프티파는 <파라오의 딸>의 성공으로 인정받기 시작해 <해적>(1863), <칸다울의 왕>(1868), <돈키호테>(1869)를 잇따라 발표했다. 그리고 생-레옹이 프랑스로 돌아간 뒤 프티파가 1871년 52살에 마침내 수석 발레 마스터가 되면서 러시아 발레의 황금시대도 도래했다. 프티파는 1871년부터 1900년대 초까지 황실극장에서 <카마르고>(1872), <파피용>(1874), <라바야데르>(1877), <탈리스만>(1889), <잠자는 숲속의 미녀>(1890), <코펠리아>(1894), <백조의 호수>(1898), <라이몬다>(1898), <에스메랄다>(1899) 등 주옥같은 작품을 잇따라 창작 또는 개작했다. 이들 작품 가운데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아름다운 음악과 어우러진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등 3부작은 클래식 발레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그런데, 프티파 혼자서 이런 작품들을 모두 안무한 것일까. 후대 연구에 따르면 프티파는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 54편의 신작 발레, 17편의 개정 안무, 35편의 오페라 속 발레 장면을 만들었다. 이런 엄청난 작업량은 프티파가 페로와 생-레옹을 비롯해 여러 안무가들의 작품 아이디어를 가져오거나 일부 장면을 종종 차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늘날엔 표절 등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지만 당시엔 저작권의 개념이 희박했다. 게다가 프티파가 여성 솔로 안무에는 뛰어났지만 남성 무용수들의 춤은 그렇지 못해서 남성 무용수들이 자신의 춤을 직접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레프 이바노프. | 위키피디아

유럽에서 발레가 단순한 볼거리로 전락했던 시기에 프티파가 러시아에서 발레를 예술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분명하다. 다만 프티파가 고전발레에 기여한 많은 안무가들의 공을 모두 독차지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프티파 개인의 천재성과 의지 못지않게 조력자들의 도움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랫동안 프티파의 그늘에 가려졌던 차석 발레 마스터 레프 이바노프(1834~1901)에 대해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티파가 안무한 작품 가운데 이바노프의 기여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전막 기준으로 10편이 꼽힌다. 특히 <호두까기 인형>과 <백조의 호수>는 이바노프가 없었으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1892년 초연된 <호두까기 인형>은 1888년 황실극장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로 처음 호흡을 맞춰 성공을 거뒀던 차이콥스키와 프티파와 두 번째 협업에 나선 작품이다. 하지만 프티파가 초연 3개월 전 병석에 누우면서 차석 발레 마스터인 이바노프가 안무를 승계하게 됐다. 프티파의 구상에 따라 이바노프가 안무한 이 작품은 1막의 마임 부분이 늘어지고 2막은 춤이 지나치게 반복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몇 번 공연되지 못한 채 황실극장 레퍼토리에서 빠졌다.

그러나 눈송이 왈츠 장면은 당시에도 찬사를 받았다. 눈송이가 아름답게 흩날리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 군무는 프티파 특유의 형식미와 거리가 멀지만 매우 서정적이다. 이후 <호두까기 인형>은 1934년 키로프 극장(옛 황실극장)에서 바실리 바이노넨의 재안무로 부활된 후 1954년 미국 뉴욕시티발레가 조지 발란신의 재안무로 선보이면서 세계적인 인기작으로 되살아났다.

▲ <호두까기 인형> 중 1막 눈송이 왈츠. | 영국 로열 발레단

발레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백조의 호수>에서도 이바노프의 역할이 중요했다. 차이콥스키가 처음으로 발레 음악에 도전한 <백조의 호수>는 볼쇼이극장에서 1877년 율리우스 라이징거 안무와 1880년 조셉 한센 안무로 선보였지만 호평을 받지 못했다. 차이콥스키 음악의 위대함을 알고 있던 프티파는 <백조의 호수>를 재안무하기로 마음먹었고, 차이콥스키 역시 동의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가 1893년 11월 갑자기 타계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 사후 작곡가 추모 열풍이 일었고 프티파는 1894년 2월 추모 콘서트에서 이바노프에게 2막의 호숫가 장면을 새로 안무하도록 지시했다. 이바노프는 2막을 아름답고 서정적인 백조들의 군무로 만들었고, 이 공연의 성공 덕분에 <백조의 호수> 전막 준비가 빠르게 진행됐다. 개정판은 1895년 1월 무대에 올라갔는데, 프티파가 궁중의 연회 장면인 1막과 3막을, 이바노프가 백조의 호숫가 장면인 2막과 4막을 안무했다. 프티파의 화려한 형식미와 이바노프의 시적이고 아름다운 군무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백조의 호수>를 발레 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특히 이바노프가 안무한 군무는 발레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군무라는데 이견이 없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 ⓒ유니버설발레단 Photo by Kyoungjin Kim

이바노프는 19세기 말 황실극장이 배출한 최초의 중요한 러시아 안무가였다. 러시아가 발레를 받아들인 이후 황실극장에서 안무를 담당한 발레 마스터는 프티파까지 모두 외국인이었다. 페로나 프티파 같은 외국인 발레 마스터들 사이에서 그는 내국인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 당했다. 생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그는 사후 30년이 지나 구 소련에서 자국의 발레 역사를 재정립하는 움직임 속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바노프는 대부분의 동료 러시아 무용수들처럼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한때 고아원에 맡겨지기도 했다. 그는 11살 때 황실극장 소속 발레학교로 보내졌다. 당시 황실극장 발레학교는 농노 등 빈곤층의 자식들이 학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외모와 체격조건이 괜찮으면 발레학교에서 수업료 없이 훈련받은 뒤 황실 발레단에 입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발레리나는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의 후원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리기도 했다.

발레 <라 바야데르>의 솔라르 역에 출연한레프 이바노프. | 프티파 소사이어티

1852년 황실발레학교를 졸업하고 발레단에 들어간 이바노프는 프티파의 영향 아래 놓였다. 프티파가 발레 마스터로 승진한 후 프티파가 맡았던 수석 마임 무용수와 캐릭터 무용수 역할을 넘겨받았으며, <라 바야데르> 등 프티파의 발레들 중 여러 편의 초연 배역을 맡았다. 이바노프는 무용수를 거쳐 황실극장 무대감독으로 활동하다 51살이던 1885년 차석 발레 마스터가 됐다.

이바노프는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해 악보를 읽지 못했다. 그러나 작곡과 즉흥연주를 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한 번 봤던 춤을 완벽하게 재현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그다지 진취적이지는 못했다. 평소 말이 없고 침울한 성격인 그는 불행한 두 번의 결혼생활 등의 영향으로 자주 과음을 했으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다가 주변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그가 발레를 배울 때만 하더라도 러시아는 발레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외국인(주로 프랑스인) 발레 마스터의 권위가 매우 높았다. 당시 러시아 상류층이 프랑스어를 필수적으로 배운 데다 황실 발레학교와 발레단에서는 프랑스어가 러시아어보다 더 중요했다. 50년 넘게 러시아에 살면서도 러시아어를 배우지 않은 프티파의 경우 유독 자신감이 넘치고 권위적이던 스타일이었다. 이바노프는 황실극장에서 일한 50년 가까이 프티파에게 철저하게 복종했다.

황실발레학교의 한 세대 이후 후배인 ‘사실주의 발레의 창시자’ 알렉산드르 고르스키(1871~1924)나 ‘20세기 발레의 개혁자’ 미하일 포킨(1880 1942) 등 후배들이 프티파의 유미주의를 비판하며 발레의 혁신을 외쳤던 것과 비교된다. 이들 후배들은 그와 달리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다채로운 예술 교육을 받아 지성적이었다. 특히 당시 민족주의 성향의 러시아 문화예술계의 강한 영향을 받아 러시아 발레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르스키는 모스크바에 왔다가 연극계의 거장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를 만난 뒤 발레에 사실주의를 도입하는데 적극 나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발레단에서 아예 모스크바 볼쇼이발레단으로 옮긴 그는 <백조의 호수> <돈키호테> <라바야데르> 등 프티파의 작품을 잇따라 재안무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공연되는 수많은 <돈키호테>는 고르스키 개정본을 토대로 재안무된 것이다. 포킨은 고도로 양식화되고 인위적인 몸짓에 의존하거나 튀튀나 토슈즈를 무조건 착용해야 한다는 등 발레가 맹목적으로 전통을 순응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창단한 발레 뤼스에 안무가로 참여해 <레 실피드> <불새> <페트루슈카> <세헤라자데> 등 혁신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발레 뤼스는 20세기 초반 지구촌을 뒤흔들며 발레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 마린스키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2막 일부.

하지만 구 소련에서 이바노프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면서 그의 발레 스타일이 후대 안무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연구가 잇따랐다. <호두까기 인형>의 눈송이 왈츠나 <백조의 호수> 2막과 4막을 보면 그가 움직임을 통해 작품의 정서 그리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매우 탁월했다는 점이다. 이는 전형적인 프티파의 특성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작품의 정서를 묘사하는 이바노프의 특징은 황실극장에서 10년 넘게 발레 마스터로 일했던 페로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그를 거쳐 포킨의 <레 실피드>로 이어진다.

심리 묘사와 관련해 이바노프는 당시로서는 가장 앞서간 안무가였다. 물론 발레는 20세기 전반 유럽에 등장하는 표현주의 무용처럼 자아를 표출하고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는 스타일까지 발전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인물의 심리묘사를 정교하게 춤으로 풀어내는 드라마 발레가 나오기까지 이바노프가 발레사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유니버설발레단 <백조의 호수>
2019.04.05 ~ 2019.04.13
서울 유니버설아트센터
공연시간 140분 (중간 휴식 20분)
기본가 1만 ~ 10만 원
초등학생 이상 관람가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
2019.08.28 ~ 2019.09.01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공연시간 140분 (중간 휴식 20분)
8세 이상 관람가

공연 칼럼니스트 장지영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성균관대 공연예술협동과정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한국기자협회 지원으로 일본 도쿄대학대학원 문화자원학과에서 연수했다. 1997년 국민일보에 입사해 문화부 스포츠부 사회부 국제부 등 여러 부서를 거쳤다. 2003년 문화부에서 처음 공연을 담당하면서 공연계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기자로서만이 아니라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다양한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재밌게, 재밌는 것을 진지하게, 진지한 것을 유쾌하게, 그리고 유쾌한 것을 어디까지나 유쾌하게”라는 일본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격언을 따르려고 노력 중이다.

<장지영 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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